이 음악만 틀어놓으면,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나는 눈보다 귀를 더 유용하게 쓰는 사람이다. 특별히 집중하지 않으면, 눈뜬장님처럼 보고도 놓치는 게 많다. 책 읽을 땐 놓치는 문장이 많아서, 책을 여러 번 읽을수록 새로운 경지에 이르는 체험을 하곤 한다. 상대적으로 귀는 밝다. 어디서 내 얘기를 하는 걸 놓친 적이 없어 “넌 참 귀가 밝구나”라는 칭찬 아닌 칭찬도 여럿 들었고, 내가 관심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기똥차게 알아듣고 반응한다. 잘생긴 사람의 부탁은 거절할 수 있지만, 목소리 좋은 사람의 부탁은 절대 거절 ‘못’한다. 더러운 곳은 견뎌도, 시끄러운 곳은 견디지 못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방음이 좋지 않아서, 나는 요즘도 집안에서 혹은 집 밖에서 들리는 낯선 소리에 귀를 쫑긋 새우는 일이 있다. 왜 갑자기 청력 자랑이냐 싶겠지만, 굴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이야기다. 이번 주 내내 우리 집에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연주됐다. 그런데 이 곡만 틀면 뭔가 낯선 소리가 들리는 거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오디오를 끄고 귀를 기울였다. 분명 문밖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는데? 말소리를 들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음악을 들으며, 다른 일을 하다가 뭔가 이상한 소리에 또다시 멈칫. 그렇게 음악을 멈추기를 반복했다. 아니, 이 웬 납량특집인가. 나는 “이 음악만 들으면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고 혼자 섬뜩해했다.
그게 CD 안에 녹음된 소리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 집에 동네 이웃 한 분이 놀러 왔는데, 그분도 클래식을 즐겨 듣는 분이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이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굴렌 글드란 사람, 참 재미있지? 굴렌 글드가 구부정한 자세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허밍 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기분이 다 좋아져. 얼마나 음악에 취했으면, 자기 목소리까지 음반에 녹음했겠어.”
천재이자 괴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그러니까 내 방의 공기를 낯설게 만들었던, 그 알 수 없는 소리의 정체는 연주자 굴렌 글드의 목소리였다! 맙소사. 연주를 하면서, 허밍 소리까지 녹음해버리다니! 굴렌 글드라는 이 피아니스트,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은 천재지만, 기인 혹은 괴짜로도 유명한 사람이란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말할 때, 글렌 굴드를 빼놓을 수가 없어. ‘골드베르크’가 아니라 ‘굴드베르크’라고 농담을 하기도 해. 우리가 첫 번째 미션곡으로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이야기했을 때, 별도로 음반을 소개하면서 색다른 베토벤 교향곡을 듣고 싶다면 피아노 편곡 버전으로 들어보라고 소개한 음반이 글렌 굴드의 피아노 음반이었어.”(보러가기
//ch.yes24.com/Article/View/21778)
“젊은 시절, 배우 에단 호크를 연상시키는 날렵한 외모”지만, “외모보다 더 빼어난 실력을 자랑”한다고 선배가 사심을 숨기지 않고 소개한 글렌 굴드는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다.
“글렌 굴드는 공연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한번 녹음한 곡은 다시 녹음하지 않았어. 녹음실에 오면, 마치 의식을 치르듯 뜨거운 물에다 손을 담그고 있었고. 자기만의 피아노 의자를 가지고 다녔던 연주자야. 피아노를 칠 때는 그 음에 맞춰 허밍을 하곤 했어. 네가 들은 환청 같은 웅얼거림이 그 소리야. 그와 같이 연주했던 한 연주자는 이런 말까지 했대. ‘살짝 미친 게 아쉽지만, 피아노 연주만큼은 놀랄 만큼 매력적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마다 좋은 것, 슬픈 것을 표현하는 방식도 모두가 다르다. 예술가들이 보이는, 기이하고 특이한 습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아, 저게 저 사람의 남다른 감수성을 유지, 보관하는 방식이구나.’ 싶다. 오히려 그런 관리법이 없는 우리가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른 온도, 다른 색깔의 감수성을 갖고 있지만,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있으니까.
상하거나 상처받기 쉬운데, 때론 뚜껑도 닫지 않고 아무 데나 박아둔다. 내 마음의 온도나 분위기도 괘의치 않고 말이다. 그의 기이한 습관을 살펴보니, 글랜 굴드란 사람, 평소에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친해지는 건 어렵겠지만, 분명 ‘특별 보관’해야 할 만큼 마음도 여리고, 깊은 속내를 지닌 사람이 틀림없을 거다.
“글랜 굴드의 음악은 기존의 클래식 연주와 좀 다른 느낌이 있어. 클래식보다는 팝 쪽에 가깝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글랜 굴드의 이 음반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클래식 마니아보다 대중음악도 두루 듣는 사람들이 눈에 띄어. 이 ‘허밍버전’이 이상하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꾸만 손이 가는 음반이란 말이지. ‘굴드베르크’가 농담만이 아니라니까.”
음악의 아버지를 넘어 음악의 신으로 추앙받는 바흐
선배가 나에게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을 쥐여 주며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바흐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음악 시간에 배운 거 기억나? 이분이 음악의 아버님이셔.” 참고로 어머님은 헨델이다. 두 분이 음악을 낳으셨단다(!) 바흐와 헨델은 태어난 해도 같다. 바흐는 1685년 3월 21일생, 헨델은 1685년 2월 23일생. 이 의미심장한 우연!
“선배! 바흐가 아버지고 헨델이 어머니라는 건, 단순히 음악적 수사만은 아니로군요? 그런데 왜 바흐가 아버지인가요?” 불순한 의도로 의혹을 던졌으나, 당시 바흐와 헨델은 서로 알고 존경하는 사이였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클래식 팬들 사이에서는 이것도 겸손한 표현이야. 바흐의 위상은 ‘음악의 신, 하느님’ 정도지. 천재니 악성이니 하는 모차르트, 베토벤도 그래 봤자 인간계인 거고, 바흐는 하늘에 속하는 급이랄까. 하지만 이걸 음악적 수사를 통해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듣고 ‘아, 음악의 신이구나!’ 그 진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야.
이제까지 들어온 모차르트나 베토벤, 라흐마니노프와 비교해볼 때, 바흐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복잡하고 심각한 편이야. 귀에 쏙 들어오는 선율도 그다지 없지. 바흐를 직접 발견할 수 있을 때까지, 바흐가 세상에 단 한 명의 유일한 작곡가인양 격찬하는 사람들의 말도 꾹 참으며 들어줘야 해. 그 정도까지 들어서 득도할지 말지는 나중에 결정하고, 일단은 바흐가 그 정도 급의 위상을 지닌 음악가라는 것만 알아두자고.”
생활인 바흐, 흥부가 따로 없네
바흐가 음악을 낳았다, 그러니까 만들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바흐가 아버지라고 불리는 까닭은, 단순히 위대하다는 감상적인 표현에 의한 게 아니라, 바흐가 실제 서양음악의 기본적인 틀을 짰기 때문이다.
“물론 바흐가 다 만든 건 아니지. 하지만 이렇게 상상해봐. 아들, 딸이 방안에 옷이니 제 물건을 어질러놓고 간 걸, 아버지가 딱딱 정리해서 잘 찾아 쓸 수 있게 만든 거지. 교회에서 일했던 바흐의 음악은 종교적이고 엄숙한 느낌이 있어.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하이든과 비발디 음악이 가진 명랑함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지.
그의 <마테 수난곡>이나 <칸타타>를 듣고 있으면, 그 음악에서 느껴지는 경건함 때문에, 그래서 신이라고 부르나? 싶을 정도야. 실제로 열렬한 신앙심에서 곡을 썼어. 하지만 그의 작곡에는 역시 생계적인 이유도 빼놓을 수 없지.“
바흐는 가난한 대식구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결혼은 두 번 했는데 자식을 무려 스무 명이나 낳았다. (“흥부 집안이었다니까!”) 그러니 열심히 일하고 벌어야 하는 삶을 살았단다.
“예전에 바흐의 평전을 읽었는데, 그의 음악과 너무 다른 모습 때문에 바흐에게 갖고 있던 신비감이 깨진 적이 있어. 음악만 들으면 순수하고 담백한 게, 기본에 충실한 맛있는 한정식을 먹는 느낌이거든.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은, 한식이고 정식이고 따질 것 없이 생활고에 허덕이던 예술가였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선배 말을 듣는데 정말 믿기지 않았다. 조용한 마을의 시골집. 처마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반짝거리며 톡톡 음을 만들어 낸 듯한 이 곡을, 전쟁 같은 일상에서 써내려갔다고? 정말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거나, 집안에 흐르는 음악 유전자를 이어받은 (역시) 천재였던가 보다. 예술이라는 게 그저 환경에서 ‘마련’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자장가 용도로 만든? <골드베르크 변주곡>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트 변주곡>
그의 굽은 등, 쉴새 없이 ‘연주중’인 입모양이 인상적이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느릿느릿한 피아노 소리로 시작하는데, 마치 육중한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낯선 곳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어렴풋하게 낯선 것을 접할 때 느끼는 호기심, 설렘 같은 게 콩콩 담겨 있달까? 글렌 굴드의 엇박 연주는 더욱 그렇다. 꿈결을 헤매는 느낌이다. 바흐 연주가 귀에 쉽게 들리지 않는다지만, 이 곡은 흘러나오는 순간 주변의 공기마저 바꾸는 음악이다. 늘 내가 구구절절 감탄하면 선배는 이렇게 정리한다. “난이도, 취향을 넘어 경지에 이른 예술은 통하기 마련!”
“클래식을 들으면 잠이 온다고들 하잖아. 바흐의 음악은 반복되는 구절이 많아서인지 특히 그래. 하지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었는데 잠이 온다면, 그건 이 음악을 잘 들은 걸 수도 있어. 잠이 잘 들 수 있는 자장가 용도로 만든 음악이거든.”
사연인즉슨 이렇다. 옛날 옛적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한 백작이 있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음악을 듣곤 했단다. 물론, 그 당시에 CD나 MP3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음악가가 백작 옆에서 밤새 라이브로 곡을 연주한 것이다. 그 백작을 모시고 있던 골드베르크는 바흐의 제자였는데, 그 백작이 잘 잠들 수 있는 자장가를 써달라고 요청해, 만들어진 게 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그러니 잠이 와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단 얘기.
“골드베르크가 이 곡의 첫 연주자라서, 그의 이름을 따서 사람들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불렀지만, 원제는 따로 있어. ‘클라비코드를 위한 여러 가지 변주를 지닌 아리아’야. 제목부터 자장가용이지.(웃음)” 생각해보니 이 곡을 들을 때의 편안함, 안정감, 몽롱함은 내가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것 같다. 음악에 깊이 빠져든 줄 알았는데, 잠에 빠져든 순간이었구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또다른 분위기로 느낄 수 있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한장면
스무 명의 자식을 거느린 바흐야말로, 이렇게 자장가를 들으며 쉴 틈 없이 일해야 했을 텐데, 그런 사람이 누군가를 쉬게 하는 음악을 만들었다. 바흐 집안은 200여 년 동안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했다고 하는데, 바흐에게 “당신만이 오늘날까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고 말해주면, 아마 그는 정말로 놀랄 것이다.
평생을 교회에서 일하며 신의 음성을 적어 나갔던 바흐. 그의 삶과 음악 이야기에서 그의 소박한 삶의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예술과는 동떨어진 생활고 속에서도 신앙을 통해 자기의 감수성과 재능을 보존하고 지켜온 것이리라. 음악을 하거나 돈을 번 시간 외에 바흐가 보낸 시간이 궁금해진다.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명상하는 그 조용한 시간 속에서 그만의 것들을 축적해 나갔을 테니까.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다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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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선택된 음반
임동혁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피아노의 여제 아르헤리치의 막강한 후원을 받고 데뷔한 악동 임동혁의 음반이 열렬한 지지를 얻고 2위가 되었다. 아니 이렇게 어린 나이에 바흐를? 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글렌 굴드도 바흐를 첫 녹음을 한 나이는 임동혁과 같은 23살이었다.
쇼팽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가 바흐는 어떻게 연주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 음반도 들어보세요~
피에르 앙타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바흐시대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싶다면, 바로 이 음반. 음이 찰랑대는 듯 화려하고 아름다운 하프시코드(쳄발로)의 음색을 너무나도 잘 살린 음반이다.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피아노 음반”으로써 훌륭하다면, 이 음반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가진 자체의 매력을 한껏 드높였다. 피에르 앙타이는 이 외에도 많은 훌륭한 쳄발로 음반들을 내놓았으니 음색이 맘에 들었다면 다른 음반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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