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마오쩌둥의 고향 후난성에서 여행 다큐멘터리 막바지 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면 으레 함께 고생한 출연자분과 스태프들이 거나하게 한잔 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마지막 촬영이 더디 진행될수록 마음은 급해져 갔다. 그날 우리 팀의 촬영지는 창사의 ‘마오쟈판띠엔(毛家飯店: 모가반점)’. 마오쩌둥의 이웃에 살았던 한 아주머니가 마오의 사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찾아오는 혁명동지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열었다는 유서 깊은 식당이다. 드디어 마지막 컷을 찍고, 한시라도 바삐 촬영 종료를 자축하는 파티를 열려고 하는 찰나, 식당의 지배인이 우리를 불렀다.
“저희 식당에 오신 손님께 식사를 대접하지 않고 그냥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총주방장이 직접 요리를 준비했으니, 아무쪼록 맛이라도 봐주십시오.”
그렇게까지 권하는데 마다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싶어 일정을 잠시 미루고 식당 측에서 준비한 자리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리고 2층 소연회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중국 8대 요리의 하나로 손꼽히는 후난 요리의 정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태호(太湖)에서 잡은 신선한 물고기에 맥주를 뿌리고 죽순과 고추 양념을 듬뿍 얹어 쪄낸, 눈이 아리도록 붉은 그 요리의 이름은 강과 산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하여 ‘짱샨이피엔홍(江山一片紅: 강산일편홍)’이라 했다. 또한 코를 자극하는 아릿한 냄새는 두부를 시커멓게 변색될 때까지 삭혀 기름에 아삭하게 튀기고, 가운데를 눌러 움푹하게 한 뒤에 특제소스를 얹은 ‘쵸우떠우푸(臭豆腐: 취두부)’에서 풍겨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의 눈과 혀를 온통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홍샤오러우(紅燒肉: 홍소육)’였다. 비계가 풍성한 최고급 삼겹살을 두툼하게 썰어 살짝 튀긴 뒤 팔각, 계피, 홍고추 등 갖은 양념을 넣고 간장에 졸이다가 다시 솥에 넣고 쪄낸, 명실상부한 후난 최고의 요리다. 특히 이 마오쟈판띠엔의 홍샤오러우는 마오쩌둥이 가장 좋아했던 요리로 유명하다. 그가 “사흘에 한 번 홍샤오러우를 먹을 수 있다면 힘을 내어 혁명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하니, 이 요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토록 좋은 요리들이 널렸는데 여기에 어울리는 술이 빠진다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드디어 이 식당에서 직접 양조했다는 비전의 바이지우 ‘마오쟈판띠엔지우모가반점주’가 나왔다. 영국을 대표하는 술이 위스키, 프랑스를 대표하는 술이 코냑이라면 중국의 대표술은 누가 뭐래도 바이지우다. 향에 따라 발효향이 강한 장향형(醬香型), 향이 짙은 농향형(濃香型), 맑고 가벼운 청향형(淸香型)으로 나뉘는데, 마오쟈판띠엔지우는 청향형 중에서도 특히 부드러운 면유형(綿柔型: 솜처럼 부드러운) 바이지우라 했다.
한 잔을 따라 코끝에 가져가니, 곡식도 이토록 향기로워질 수 있다고 웅변이라도 하듯 청량한 기운이 비강을 가득 채운다. 증류주를 마실 때 혀끝에 살짝 대보는 것은 9V 배터리의 전극에 같은 짓을 했을 때처럼 불쾌한 자극만을 남길 뿐,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이다. 소량이 되었더라도 단숨에 목구멍을 향해 던져 넣고, 위장에 착지한 술이 얼얼해진 식도를 되돌아 나오는 회향(回香)을 즐길 때 비로소 그 술의 모든 것을 맛보았노라 이야기할 수 있다. 바이지우는 이런 음주법에 가장 알맞은 술이다.
큰 호의를 베풀어준 식당 지배인 웨이 씨와 가볍게 술잔을 맞부딪치고, 잠시 향기를 음미한 다음 곧바로 목구멍을 향해 액체를 털어 넣었다. 깊은 투명함 어디에 그런 뜨거움을 감추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불덩어리가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면유형이라는 분류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내 잘 조화된 곡물의 향기가 놀란 식도를 감싸며 비강으로 되돌아 올라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희미한 곰팡이와 과일의 냄새. 입안에 남아있던 홍샤오러우의 농후한 맛을 한 초식으로 제압하는, 미녀 고수의 섬섬옥수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제작진끼리 오붓한 촬영 종료 파티를 꿈꾸던 우리의 계획은 첫 번째로 상 위를 가득 채운 후난 요리 앞에, 두 번째로 마오쟈판띠엔지우의 화끈하면서도 청량한 맛 앞에, 마지막으로 지배인 웨이씨의 무지막지한 술 공력 앞에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한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우리 일행 4명에게 쉴 새 없이 ‘깐(乾: 원샷)’을 외치면서도(즉 우리의 4배를 마시면서도), 30분 만에 혼자서 바이지우 두 병을 비우도록 낯빛 하나 변화 없는 그에게 꼬이려는 혀를 간신히 펴고 물었다.
“오늘에야 강호가 넓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감히 여쭙는데 혹시 무슨 기공이나 특별한 수련을 하시나요?”
“하하하. 특별히 수련하는 것은 없으나 어렸을 때 집이 술도가를 했지요. 무엇이든 조금씩 계속하다 보면 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중국 촬영 마지막 날 밤의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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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릿 로드 탁재형 저 | 시공사
이 책은 해외 취재와 여행 중 탁재형 PD가 맛본 수많은 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강렬함을 선사했던 어떤 술의 맛과 향기, 그리고 술에 얽힌 때론 황당하고 때론 진중한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술을 향한 그의 ‘진정성’까지 느껴질 정도다. 인기 팟캐스트인 ‘나는 딴따라다’와 ‘탁 피디의 여행수다’를 통해 솔직한 입담과 위트를 자랑했던 한 애주가가 풀어내는 술과 여행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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