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은 호방한 인물이었다. 연암의 웃음소리를 듣고 귀신도 놀라 도망 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동양고전, 2012년을 말하다]의 열하일기 강연을 맡은 고미숙도 호방한 인물이었다. 한 청중은 강연을 듣는 내내 “여장부야. 여장부.”라며 감탄을 뱉어냈다. 10년 전 연암을 만나고 삶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고미숙. 그녀와 함께 열하일기를 읽어보았다.
연암 박지원 [출처: 위키피디아]
연암, 그리고 다산
연암 박지원하면 실학 사상이 떠오른다. 실학 사상하면 자연스럽게 다산 정약용도 연상된다. 흔히는 연암과 다산을 유사하게 엮어서 생각한다. 하지만 그 둘은 여러모로 달랐다. 연암은 노론 명망가에서 태어나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프리랜서 생활을 했다. 반면 다산은 남인출신으로 과거를 공부해 관료의 길을 걸었다. 때마침 정조가 탕평책을 피던 시기와 맞물려 중용될 수 있었다. 고미숙은 이를 보고
“연암은 원심력을 가지고 권력에서 멀어지려 했고, 다산은 구심력을 가지고 권력을 향해 나아갔다.”고 평가했다.
연암이 처음부터 과거를 포기했던 건 아니었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많은 부분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양반의 숫자가 급증하던 시기로 과거를 보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니 과거를 치를 때마다 응시자가 수만 명이나 되어 아수라장이 열리곤 했다. 격식과 규격을 싫어하던 연암에게 과거 제도는 고문이었다.
연암, 우울증을 앓다
연암은 청년 시절 우울증을 앓았다. 거식증과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이었다. 고미숙은 우울증이란 자기와의 소외에서 발병하는 자본주의 이후에 탄생한 병이라 진단했다. 과거에는 설령 굶주려는 죽어도 자기에게 소외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부자체의 욕망에 치우치며 자기 소외가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대 사람이 아니었던 연암이 우울증을 앓았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연암은 어떤 방식으로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노론 명망가의 자재였던 만큼 좋은 약을 구해 먹고 좋아진 건 아니었을까? 연암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저자거리로 나섰다. 그곳에서 연암은 분뇨장수, 이야기꾼, 도사, 건달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요즘의 철학적 용어로 설명하면 타자와의 접속을 시도한 셈이다. 연암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병을 치료함은 물론이고, 방경각외전이란 소설집을 써서 명성을 획득했다.
연암, 백탑파를 만들다
연암은 과거를 포기했다. 특정한 직업도 없었다. 30대의 연암은 백탑파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연암은 친구들과 함께 책 읽고 토론하고 사색했다.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부도 명예도 없었지만, 벗이 있었기에 연암의 30대는 행복했다.
하지만 이 행복도 오래가진 못했다. 당시의 권력자였던 홍국영은 연암을 곱게 보지 않았다. 결국 연암은 홍국영의 위험을 피해서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홍국영이 실각하고 연암은 서울로 돌아왔지만, 백탑파는 이미 해산한 이후였다. 죽은 이도 있었고, 생계가 어려워 시골로 내려간 이도 있었다.
하지만 연암에게 새로운 행운이 찾아왔다. 팔촌형 박명원이 건륭제의 만수절 (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임명된 것이다. 덕분에 연암은 박명원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신단 일행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 여행에서 나온 글이 바로 열하일기다.
열하일기 [출처: 위키피디아]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고미숙은 열하일기야말로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명한 여행기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별거 없습니다 서양인이 중국에서 와서 신기한 걸 본 정도에 그칩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도 별거 없습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이븐 바투타라는 여행기가 하나 있습니다. 중세 이슬람 인명 사전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문체가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루는 여행기는 열하일기뿐입니다. 열하일기에는 문명론부터 시작해서 천하의 형세를 꿰뚫을 뿐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탐구까지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고미숙은 열하일기를 대학을 다 졸업하고야 만났다. 제도권 교육에서는 열하일기를 통째로 읽지 않는다. 국어 국문과에서는 소설을 발췌해서 읽고, 철학과에서는 연암의 명문장을 발췌해서 읽는다.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을 읽고 있는 셈이다. 고미숙은 열하일기가 제대로 읽히지 않고 있는 현실에 아쉬움을 표하며, 문장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지금 바로 열하일기를 읽으라고 조언했다.
체력, 열하일기의 원동력
사신단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황제가 있는 연경에 도착했다. 하지만 황제는 연경에 없었다.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었다. 황제는 조선 사신단을 열하로 불러 들였다. 연암은 사신단 내부에서 특정한 업무를 맡지 않은 프리랜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꼭 열하를 갈 필요는 없었다. 한가하게 연경 유람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박명원이 열하에 가면 기이한 걸 볼 수 있다며 연암을 꼬득였다. 결국 연암은 열하로 가는 일행에 합류하게 된다.
열하로 향하는 길은 고난 그 자체였다. 우선 시간이 촉박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말을 계속 달리게 하고 그 위에서 잠을 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밥도 먹을 수 없었다. 비가 많이 와서 불을 피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길이 평탄한 것도 아니었다. 하룻밤 동안 강을 아홉 개나 건너야 하는 험난한 지형이었다. 그렇게 700리를 달렸다. 하지만 연암은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글을 썼다. 그것도 그냥 글이 아니라 열하일기의 백미이자, 조선 최고의 한문 문장인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를 썼다. 연암의 가공할 만한 체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람이 무박 나흘을 여행한다면 며칠은 죽은 듯이 잠만 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열하에 도착한 연암은 몇 시간만 눈을 붙이고 체력을 회복했다. 그러고는 열하에 있는 사람들과 밤새 필담을 나누며 우정을 쌓았다.
현대인은 편한 여행을 한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지는 못한다. 많은 경우 여행에서 돌아와서 기억을 재구성한 글을 쓰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글만 남긴다. 고미숙은 어떤 상황에서도 글을 쓸 수 있었던 연암의 신체를 부러워했다.
유머, 열하일기를 읽는 이유
우리는 고전을 엄숙하고 진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고미숙은 사람을 무겁게 만들면 진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심오하고 깊은걸 진리라고 여기는 생각은 서양 철학에서 유래되었다고 진단한다. 고미숙은 고전은 무겁게 여기는 통념을 깨고 싶었다. 그리하여 연암의 유머와 해악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그러나 학계에서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연암을 지나치게 희화화했다는 이유였다.
고미숙은 열하일기를 읽는 가장 큰 이유가 유머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용후생이나 문명론도 뛰어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연암 못지 않은 학자들도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웃을까? 고미숙은 웃음은 통념을 깰 때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소위 말하는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웃게 된다. 하지만 웃으면서도 새로운 발견을 하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고미숙은 연암의 색다른 시각을 볼 수 있는 대목으로 호곡장(好哭場)을 꼽았다. 연암은 광활한 요동 벌판을 보고 울기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울음이란 희로애락이 사무칠 때 가능한 것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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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롱이에 가려 아직 백탑은 보이지 않는다. 재빨리 말을 채찍질했다. 수십 걸음도 못 가서 겨우 모롱이를 막 벗어났을 때, 눈빛이 아른거리면서 갑자기 검은 공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오호! 눈앞에 하늘과 땅만이 우주를 가르는 아득한 공간이 펼쳐졌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멋진 울음터로구나. 크네 한 번 울어볼 만 하도다!”
(중략)
“사람들은 다만 칠정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 뿐, 칠정 모두가 울 수 있다는 건 모르지.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슬픔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미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왠 줄 아는가?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 버리는 데에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기 때문이야.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일세. 지극한 정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ㅣ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열하일기, 「호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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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연암은 웃음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연암은 옥전현이라는 마을에 들렀는데, 마을 점포에서 너무나도 재미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동행한 정진사를 불러다가 열심히 베꼈다. 하지만 연암이 베낀 부분과 정진사가 베낀 부분이 앞뒤가 맞지 않았고, 결국 연암은 조금 손을 봐서 열하일기에 싣는다. 그 유명한 호질의 탄생 비화다.
연암이 하도 열심히 글을 베끼자 점포 주인은 궁금해서 물었다. “선생은 이걸 베껴 대체 무얼 하시려오?” 그러자 연암은 답했다.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이외다.” 즉, 남을 웃기기 위해서 그 고생을 한 셈이다.
하지만 연암의 글은 재미있어서 문제였다. 정조는 고문의 위엄을 흔들리게 만든다는 이유로 연암의 글을 싫어했다. 웃음을 막으려고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가지는 공통된 특성인 모양이다.
연암의 삶에서 21세기의 길을 찾다
연암은 어느 한 곳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든지 떠돌아다니고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글을 생산해냈다. 고미숙은 이런 연암의 삶에서 21세기의 사유의 비전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연암에게 있어서 여행은 곧 길이고, 길은 곧 삶이며, 삶은 곧 글이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지성도 길 위에서 삶의 비전을 찾아내서 글로써 생산될 수 있다면, 모두가 자기 자신의 주체이자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보여준 여행과 사유가 21세기적 삶의 비전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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