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포 아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무참하게 짓밟은 범인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무죄로 풀려나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은 영화를 주로 만들어 온 죤 슐레진저 감독은 1996년 <아이 포 아이>라는 영화를 통해, 이 잔인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 벌레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하는 두 아이의 어머니인 카렌(샐리 필드)의 큰 딸이 처참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사건에서 이 영화는 시작된다. 검거된 용의자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엄마는 복수를 결심한다. 잔인한 복수극이라는 소재에서 상상 가능한 통쾌함은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감독은 딸을 위한 복수의 방법을 찾아나가는 엄마의 변화에 천천히 그 시선을 맞춘다. 관객들의 시선과 마음은 주인공 카렌의 시점에 철저하게 동화되고, 카렌은 법의 허점을 이용해 합법적이고 정당해 보이는 방법으로 살인자를 처단한다.
2012년 김용한 감독의
<돈 크라이 마미> 역시
<아이 포 아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실화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영화 속 여성들이 처한 현실은 너무나 잔인하다. 여고생 은아(남보라)를 잔인하게 성폭행한 가해자들은 미성년자라는 신분과 증거 불충분으로 법적 처벌을 피해간다. 가해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재판이 끝난 뒤 가해자들은 성폭행 현장을 담은 동영상을 빌미로 은아를 괴롭힌다. 짓밟힌 딸을 위해 엄마 유림(유선)은 홀로 잔인한 복수를 계획한다.
<아이 포 아이>처럼
<돈 크라이 마미> 역시 사적 복수의 정당함을 관객들에게 동의하게 하기 위해 유림의 시선과 감정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대입시킨다.
<도가니>처럼
<돈 크라이 마미>는 관극하는 순간이 너무나 괴로운 영화다. 선량한 피해자를 잔혹한 살인자로 둔갑시키고야마는 우리나라의 법체계의 부실한 현실과 그 잔인한 무감각은 관객을 울컥 치밀어 오르게 만든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 여성인 딸을 지키는 엄마로 살아가야한다는 그 절박한 상황은 남보라와 유선의 처절한 연기를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복수라는 집행을 너무 서둘러 영화의 전체적 흐름이 지나치게 격앙되어 있다는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지만, 한국사회를 비난하고 처단하고 그 속에서 오롯이 살아내야만 하는 ‘피해여성’의 고단한 삶과 범의 무력함을 탓하는 영화의 주제는 선명하게 살아있다.
지난 11월 22일 국회에서 성폭력범죄 처벌특례법 개정안,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개정안, 특정범죄자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법 개정안,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법 개정안, 성폭력범죄자 성충동 약물치료법 개정안 등 성폭력 관련 법률안 5건이 가결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성폭행 처벌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겨온 대표적 독소조항인 ‘친고죄’ 조항이 폐지되었다는 소식은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건 고작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너무 멀다. 이미 우리는 매일 되풀이 되고 있는 성폭행 사건과 그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삶, 너무 쉽게 용서되는 가해자의 죄와 가벼운 형량에 충분히 분노하고 있지만, 그 대안은 아직도 요원한 숙제처럼 남았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성폭력과 폭행의 위험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하는 절박한 현실과 마주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분노, 그 슬픔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사회구조적으로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한국여성에게 있어서, 복수는 권장사항이 아니라 금기시되는 것이었기에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나 <월하의 공동묘지>에서처럼 한국 영화에서 여성의 복수는 죽어 귀신이 되어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 속 여성의 복수는 조금 더 사회적인 문제와 여성의 한에 훨씬 더 깊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에미>
한국형 여성 복수영화의 원형은 1985년 박철수 감독의 <에미>이다. 죤 슐레진저의
<아이 포 아이>보다 10년이나 앞선 이 작품은 김수현이 대본을 쓰고, 윤여정이 주연을 맡은 잔혹한 복수극이자 서글픈 드라마이다. 인신매매 당한 딸을 극적으로 구출했지만, 당시의 충격으로 자살에 이르자 어머니는 잔인한 복수를 준비한다. 윤여정은 ‘어미’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티 없이 맑은 딸을 유린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범죄자들을 찾아서 하나하나 비정하게 살해한다.
영화 속 엄마는 딸의 복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스릴러의 장르 속에 어머니의 모성과 인신매매라는 당시 최고의 사회문제를 녹여낸 <에미>는 지금 봐도 충격적일 정도로 잔인하고 짜임새 있다. 어머니의 이미지를 망친다는 이유로 원래 제목인 ‘어미’를 사용하지 못하고 ‘에미’라고 바뀐 건 시대착오적인 에피소드로 기억되는데, 그 시대착오적인 사회의식이 과연 27년이나 지난 지금, 조금이라도 고쳐졌는지는 의문이다.
<오로라 공주>
2005년 방은진 감독의 데뷔작
<오로라 공주>는 자식을 잃은 모성의 피눈물이 영화의 중심이다. 6살짜리 딸이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되어 쓰레기 매립장에 버려진 사건 이후 펼쳐지는 복수극이다. 딸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어른들은 순간적인 이기심이었다. 누구 하나 따뜻한 어른의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지 않았다. 방은진 감독은 심각한 사회적 함의를 영화에 담아내면서 혼자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싱글 마더가 처한 곤궁 그리고 엄마가 일하는 사이 아이가 부딪쳐야 하는 일상의 위험들. 싱글 마더가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사회적 공공 안전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돌보아줄 친지도 돈도 없는 모녀의 위태로운 일상을 담아낸다. 이 영화를 통해 잔인하면서도 슬픈 모성과 미래의 목사를 꿈꾸는 형사 아버지의 허약과 무책임을 대비시키면서 실패한 가부장을 비판한다. 자식을 잃은 어미이기에 가능한 잔혹한 복수는 통쾌하게 끝날 수가 없다. 이미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미에게 행복한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6월의 일기>
같은 해 개봉한 임경수 감독의
<6월의 일기>는 왕따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였고, 그 이면에는 엄마의 슬픈 복수가 서브플롯으로 숨어있다.
<6월의 일기>는 왕따를 당하던 학생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가해자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일기장에 적힌 날짜에 기록된 방법과 동일하게 학생들이 하나씩 살해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그 사건을 추적하던 형사 자영(신은경)과 동욱(문정혁)은 문제의 일기장을 작성한 왕따 피해 학생은 이미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사건을 추적하면서 연쇄 살인사건을 둘러싼 처참하고 슬픈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왕따 피해자의 엄마(김윤진)는 가해학생들에게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복수함과 동시에, 아이의 고통에 무심했던 싱글 마더로서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자신을 살해하는 것으로 이 모든 가해자들을 처단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영화는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의 극적 반전을 위해 어미의 복수라는 소재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영화는 배우들의 열연과 시의 적절했던 소재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해 큰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는 영화가 되었다.
<공정사회>
<돈 크라이 마미>에 이어 이지승 감독의 <공정사회>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성폭행 당한 10세 여아의 어머니가 무능한 공권력과 한심한 사회 시스템에 대항해 스스로 복수를 선택하는 영화다. <에미>,
<오로라 공주>,
<돈 크라이 마미>에 이어 <공정사회>까지 모두 관람한 관객이라면 그 엄습하는 공포감에 부르르 떨게 될 것이다.
1985년 만들어진 <에미> 속 무능력한 공권력과 터무니없는 사회제도는 2005년
<오로라 공주>에서도 2012년
<돈 크라이 마미>와 <공정사회>에서도 단 한발 짝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사실과 한국사회의 끔찍할 정도로 한결같은 무신경함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엄마들은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보호해주지 못했던 공권력에 대한 불신으로 사회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빼어들었다. 동시에 이들의 복수극은 어떤 법적인 옹호나 변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결말은 꽤나 쓸쓸한 것이다. 11월 25일부터 12월 10일은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이다. 단순한 관심이 아닌 실천적 대안과 사회제도의 변화는 지금부터 서둘러도 너무 늦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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