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은 사이버머니다. 2012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월급생활자에게 월급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한 달간의 게임 한 판을 위해 충전한 포인트가 몇 시간 만에 동이 나버리듯 월급날 들어온 돈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을 드러낸다. 25일, 당신은 월급을 받은 지 며칠 만에 0원이 되는가? 월급이 통장을 스쳐간다는 직장인들의 하소연처럼 우리 통장에는 수많은 손님들이 들락거리면서 우리 제 몫을 챙겨간다. 카드회사, 보험회사, 연금, 이동통신업체, 각종 공과금, 은행 등 많은 손님들이 부지런히 방문한다.
사이버머니를 관리하려면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이 있다. 카드 결제일과 각종 할부금의 결제일을 딱 들어맞게 설정해야 한다. 한쪽 톱니바퀴가 상대 톱니바퀴 홈에 순차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듯이 말이다. 우리가 이번 달 카드 값을 결제해주어야 카드 회사는 다음 달 소비를 허락해주기 때문이다. 원래 톱니바퀴는 고장이 잘 나고 톱니가 금세 무뎌지며 한 바퀴가 다른 바퀴와 어긋나기 쉽다. 또 오래 굴리다보면 축이 무너지기도 한다. 우리의 사이버머니 시스템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살면서 한두 번 이상은 미끄럼 현상이 발생하고 이직이나 실직으로 인해 축이 무너지기도 한다.
내가 뉴질랜드에 출장갔을 때 그곳에 살고 있는 지인과 월급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 월급을 받는다고 이야기하자 그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급을 받고 있었던 그는 만일 한 달에 한 번 회사로부터 급여를 받게 되면 본인의 카드값과 자동차 할부금, 주택 융자금 등의 스케줄이 모두 틀어질 거라는 것이다.
상상해보라. 만약 우리 급여가 한 달에 한 번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1년에 한 번 지급된다면 어떨까? 그 친구의 톱니바퀴 한 축은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는데 다른 한 축이 한 달에 한 번 돌아간다면 분명 틀이 깨지고 말 것이다. 겨울까지 써야 할 몫이 여름에 다 동날 수도 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월 단위 또는 주 단위로 지급하는 ‘급여’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산업혁명 이전에는 그 사람이 제공한 노동의 양을 정확하게 따져서 임금을 지급했다. 그 대가를 지급하는 수단도 화폐가 아니라 그들이 생산한 물품이나 생활필수품이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관리자’ 계급이 출연하면서부터 월급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실 노동자가 얼마만큼의 일을 했는지를 관리자가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종의 ‘패키지’ 개념으로 급여를 지급했다. (지금도 외국계 기업에서는 샐러리 패키지salary package라고 표현한다.) 일정 기간 관리의 대가로 임금을 지급하게 된 것이 월급의 유래인 셈이다. 생산량을 정확히 측정하지 못하고 지급하는 것이니 생산량이나 노동량에 따라 월급을 지급하기보다 ‘일정 기간 제공한 노동’에 근거해서 임금을 지급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언제 줄 것인가가 다시 문제가 되었다. 주는 쪽은 가급적 늦게 주고 싶어할 것이고 받는 쪽은 가급적 빨리 받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한 알력과 타협 속에 현재 우리는 대개 후불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노동의 대가를 지급하는 것으로 사회적 합의를 보았다. 다만 그 후불제의 날짜는 직종과 회사에 따라 다르다.
친구들끼리 소주잔을 기울이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월급 이야기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월급날이 제각각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의 월급날은 대개 20일에서 25일에 집중되어 있고 중소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의 월급날은 10일에 집중되어 있다. 공무원들은 대부분 20일에 급여를 받는다.
월급날이 25일이라는 것은, 한 달 동안 노동했던 대가를 모든 일이 끝나는 말일보다 5일 더 빨리 지급한다는 뜻이다. 즉 25일 노동에 대해서는 후지급하는 것이고 5일 노동에 대해서는 선지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0일에 급여를 지급한다는 것은 10일분의 노동에 대해서는 후지급하고 나머지 20일분에 대해서는 선지급한다는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중소기업의 경우 한 달 급여를 다음 달 열흘 후에 지급하는 셈이다.
실제로 많은 중소기업들은 물건을 팔고 나서 대기업으로부터 곧바로 대금을 지급받지 않는다. 적어도 한 달은 기다려야 결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월급을 늦게 지급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숨통이 트이기 때문이다.
한 저명한 경영학 교수가 재무관리의 기본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줄 돈은 최대한 늦게 주고 받을 돈은 최대한 빨리 받는 것이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그렇게 되면 여유자금이 생겨 그돈으로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다. 차입금이 있는 회사는 잠시나마 그 돈으로 차입금을 상환하고 이자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음달 10일을 월급날로 채택한 기업들의 기본적인 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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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급전쟁 원재훈 저 | 리더스북
이 책은 비단 월급을 받는 직장인뿐 아니라 거대한 경제구조 틀 속에서 당하고만 사는 대부분의 시민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왜 많은 회사가 인센티브제도를 선호하는지, 우리의 퇴직금에 관한 여러 가지 셈법, 한국 대기업만의 봉건적 특징, 한국 대학들의 캠퍼스 장사 등 직장인의 삶에 밀착해 여러 경제현상의 숨은 속셈과 원리를 재미있게 설명한다. 또 직장인들이라면 알아야 할 4대보험의 속성과 퇴직금, 은퇴 후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프랜차이즈에 관한 허상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 각 장의 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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