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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조 마라톤 금메달, 한국인 기억 속 가장 감격적인 장면

과거는 자랑할 것이 없다 현재 역시 자랑할 것이 없다 미래도 자랑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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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조가 8월10일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도 한국인 손기정이 금메달을 땄지만, 그는 일장기를 달고 뛰었다. 황영조의 마라톤 금메달은 역대 올림픽에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감격적인 장면의 하나로 남을 쾌거였다…

<사상 최악의 콘서트 참사…>에 이어
계속됩니다.



4월2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주일간 폭동이 일어났다. 흑인청년 ‘로드니 킹’을 집단구타한 경찰관 4명에 대해 무죄평결이 나오자 흑인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폭력ㆍ방화ㆍ약탈ㆍ살인을 일삼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수백 곳의 한인상가가 주요한 표적이 되었다. 이 폭동으로 55명이 죽었고 2,383명이 부상했으며 1만3379명이 체포됐다. 한인교포 이재성(18)은 사망자 중 한 명이었다. 한인상가가 공격을 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동안 한국인들이 흑인과 히스패닉 등 유색인종들의 친구가 되지 못했음을 반증해주었다. 흑인폭동은 앞만 보고 지독하게 달려온 한인사회를 돌아보는 뼈아픈 계기로 작용했다.

5월19일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갔다’는 김영삼이 경선에서 이종찬을 꺾고 마침내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종찬이 신당을 결성해 독자출마할 태세를 보여 당이 쪼개지기 직전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5월26일엔 김대중이 이기택을 누르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다음 대통령은 둘 중 하나였다. 김영삼이냐 김대중이냐. <중앙일보> 4컷만화 ‘왈순아지매’에서 보듯, 언론은 김대중에 대해선 유독 노골적 반감과 적의를 드러냈다. 그때쯤이었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초기도 아니었고 말기도 아니었다. 수술을 하면 회복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했다.


주말을 이용해 고향에 내려갔다. 마당에 은색 엘란트라가 있었지만, 열쇠를 달라는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몸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이거 어쩌면 좋아요” 따위의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시라. 수술 하면 좋아질 것”이라는 위로도 하지 않았다. 나는 벙어리였다. 아버지와 자주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그냥 밥을 먹었고, 텔레비전을 봤으며, 괜히 청소를 하겠다며 물걸레로 마루를 닦다가 내 방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집을 나올 때는 “안녕히 계시라”는 한 마디 뿐이었다. ‘수술하면 건강해지시겠지’라고 막연하게 낙관했다.

그해 7월의 어느 날로 잡혔던 수술은 무산됐다. 당일 집도의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일정을 미루겠다는 병원 쪽의 일방적인 통고를 받았다. 전날 밤 과음을 했다는 거였다. 큰 수술은 준비하는 과정만으로도 환자를 지치고 공포스럽게 한다. 어처구니 없었다. 연기된 수술 스케줄은 아버지의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었으리라. 기분 나쁘고 허탈하지만, 현실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다시 단단히 다져먹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예 수술을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노라고 했다.

결론은 기도원이었다. 경기도 북부지역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그 기도원의 원장 목사는 ‘기적의 치유’로 기독교인들 사이에 유명세를 얻고 있었다. 교회마다 홍보 비디오를 돌린 덕분이었다. 나도 방위병 시절 교회 청년회 예배시간에 그 비디오를 보고 경탄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의 고집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두 아들도 무기력했다. 어머니가 “제발 수술을 받으라”고 하면 역정을 냈다. 수술을 거부한 아버지의 뜻을 묵묵히 따른 것은 내 인생 최대의 바보 같은 짓이었다.



드디어 “태극기 금”
황영조 조국에 월계관
‘일장기’ 손기정 이후 56년만에 올림픽 제패
한국 금12 7위…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
2시간 13분23초


【북경=이계성 특파원】태극마크를 단 황영조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2백m 뒤에는 일장기를 단 모리시타의 지친 뜀박질이 있을 뿐이었다.
10일 새벽4시(한국시간). 여명을 밝혀준 황영조의 올림픽 마라톤 제패 쾌거는 위대한 한국인의 기상을 세계 만방에 떨친 것이었다.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식을 지켜보기 위해 몬주익 메인스타디움을 꽉 메운 7만5천여 관중들은 ‘거인’ 황영조가 동쪽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자 일제히 기립했다.
곧 이어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바르셀로나 하늘을 뒤덮었고 황영조의 힘찬 뜀박질과 함께 어우러졌다.

(<국민일보> 1992년 8월11일치)





한ㆍ중 우호시대 열다

【북경=이계성 특파원】북경을 공식방문중인 이상옥 외무부장관은 24일 역사적인 한중수교서명에 이어 이날 하오 양상곤(楊尙昆) 국가주석과 이붕 총리를 예방, 양국 수교가 양국의 번영과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인식을 같이했다.
이 장관은 이날 하오 3시(현지시간) 이붕 총리를 중남해 집무실로 방문, 한중수교를 위해 정치적 결단을 내려준데 대한 노태우 대통령의 인사말을 전하고 한중수교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냉전의 마지막 잔재를 없앤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략)
이로써 우리나라와 중국은 40여년의 단절의 벽을 깨고 국교를 수립했다.
양국정부는 6개항의 이 공동성명서에 유엔헌장의 원칙과 상호불가침, 상호내정불간섭, 평화공존 등 원칙에 입각, 항구적인 선린우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을 천명했다.(하략)

대만 주재 한국대사관 폐쇄

【대북=유동희 특파원】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함에 따라 주대만 한국대사관은 24일 상오9시(현지시간) 현관에 설치했던 현판을 철거하고 대사관으로서의 기능을 마감했다. 정부 수립후 10일 뒤인 지난 48년 8월25일 최초의 해외공간으로 대북시에 개설됐던 주대만대사관은 개설 44주년을 바로 하루 앞둔 이날 폐쇄됐다.
이에 앞서 박노영 대사는 교민회장ㆍ한국주재 상사대표 및 유학생 대표등과 고별간담회를 갖고 대사관이 폐쇄돼도 양국간에 새로운 관계설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존의 관례에 따라 영사업무는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일보> 1992년 8월25일치)




황영조가 8월10일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도 한국인 손기정이 금메달을 땄지만, 그는 일장기를 달고 뛰었다. 황영조의 마라톤 금메달은 역대 올림픽에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감격적인 장면의 하나로 남을 쾌거였다. 8월24일엔 중국과 분단 이후 처음으로 수교를 맺었다. 이제 ‘중공’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동시에 대만과는 단교를 했다. 이념보다 실리가 중요한 시대였다. 1988년에 이미 한-중 양국의 교역량은 31억 달러. 거대한 중국시장과 벽을 쌓고 지낼 수는 없었다. 1990년 한-소 수교에 이은 1992년 한-중 수교는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한 노태우 북방정책의 결정판이었다.

한-중 수교 직후였다. 형과 함께 고향에 내려간 일요일, 아버지는 두 자식을 모아놓고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스스로 차를 운전해서 경기도의 기도원을 드나드실 정도로 기력이 남아있을 때였다.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미혼인 나에게 주택부금을 들어두라는 거였다. 앞으로 결혼도 하고 집도 구해야 할 둘째아들이 못내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형 집에 얹혀사는 관계로 세대주가 될 수 없어 주택부금 가입이 불가능하다고 답하자, 주민등록을 잠시 옮겨서라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둘째, 반드시 조심해서 차를 운전하라는 거였다. 아버지가 위암 판정을 받은 직후 형은 파란색 프라이드 중고 승용차를 샀다. 나는 형과 돌아가며 그 차를 운전해 고향을 드나들었다. 자신이 기도원을 오고가며 목격한 끔찍한 교통사고 이야기를 곁들이기도 했다. 셋째,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는 거였다. 아버지는 9월부터 기도원으로 완전히 들어갈 계획이었다. 마지막으로 두 아들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셨다.



‘북미 무역협정’ 자동차 원산지 규정
정부, GATT에 제소 검토
현지조달 비율 62%나 책정
새 무역장벽 쌓는 ‘독소조항’
국제적 관행 30~40%선…제3국 결정적 타격


정부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한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이 자동차의 원산지규정과 관련한 현지조달비율을 60~62.5%로 정한 것은 원산지규정을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고 판단, 이의 시정을 위해 GATT(관세무역일반협정)에 제소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GATT 24조는 여러 국가가 관세동맹이나 자유무역협정 등을 체결, 경제동맹체를 형성하는 것은 인정하고 있으나 이로 인해 제3의 국가가 그 전에 없던 불이익을 받게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현대자동차 캐나다 현지공장은 부품비 인건비 등을 포함, 제품원가의 40%만 현지에서 조달하면 미국에 관세를 물지 않고 수출할 수 있으나 NAFTA가 발효되는 오는 94년1월부터는 이 비율을 60~62.5%로 높이지 않으면 관세를 물어야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하략)

(<한국일보> 1992년 9월4일치)




이 기사가 마지막이었다. 정부가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 정한 원산지규정을 한국에게도 적용하는 것을 불공정 무역장벽으로 여기고 GATT(관세무역일반협정) 제소를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한국일보> 1992년 9월4일치다. ‘세계화’ 구호가 난무하기 1년 전이었다. 한국은 서서히 세계자본주의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신문기사를 더 끼울 수 있는 스크랩 뒤편 18장의 비닐 공간은 텅 비어있다. 9월5일 이후 기사는 없다. 아버지는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선 신문을 볼 수도, 스크랩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기거하는 그 기도원에 여러 차례 갔다. 첫 방문 때는 방만 둘러보았다. 9월 중순쯤이었다. 아버지의 눈빛은 그때까지 살아있었다. 몸은 바짝 말랐지만, 적은 양이나마 식사를 했고, 혼자서도 조금은 걸어 다닐 정도였다. 그날도 아버지는 주택부금 이야기를 꺼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함께 일요일 예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팔을 잡아줘야 걸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나으려면, 아들인 나도 불신의 마음을 지워야 했다. 그 기도원 원장 목사에게 뭔가 신비한 능력이 있을 거라는 믿음과 긍정의 에너지를 내 마음속에 채워야 했다.

기도원은 세상에서 질병으로 절망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공간 같았다. 고통의 골짜기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는 자들과 그 가족들이 울부짖으며 통성기도를 했다. 예배는 기적을 소망하는 하나의 굿판이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박수를 치면서 찬송가를 불렀다. 굳건한 믿음을 스스로 부채질하였지만, 가슴 밑바닥에선 어떤 혐오가 치밀어 올랐다. 기도원 원장 목사는 허풍쟁이로 보였다. 매일매일 누군가 병이 깨끗이 나아 돌아간다고 큰소리를 쳤다. 곳곳에서 “아멘” “주여!” “믿습니다”라는 목메인 절규가 터져 나왔다. 맹목적인 믿음은 싫었다.

세 번째 방문 때는 아버지를 부축해 그 기도원 원장목사에게 데려갔다. 안수기도를 받기 위해서였다. 특별헌금을 몇 백만 원인가 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 도움 없인 제대로 걷지도, 서지도, 앉지도 못했다. 원장 목사 앞에서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10여분을 기다리다 차례가 왔다. 아버지는 그의 앞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원장 목사는 힘센 대통령 같았고, 아버지는 죄 지은 아기 같았다. 이렇게 한없이 작아 보이는 아버지 모습은 처음이었다. 원장 목사가 아버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축 늘어져 있다가 기도가 끝나자 작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멘.” 아, 아버지가 불쌍했다. 너무 불쌍했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기도원 원장 목사는 사기꾼이었다. 치유의 은사도, 기적도 모두 거짓이었다. 몇 년 뒤 그의 사기행각은 텔레비전 시사고발프로그램에 등장했다. 하나님에게 매달렸던 아버지는 헌금만 날린 채 아무런 ‘은혜’를 입지 못했다. 몸만 더 망가졌을 뿐이었다. 병세가 전혀 호전되지 않고 악화되자, 아버지의 정신도 제대로 돌아왔다. “이대로 죽게 놔둘 거냐”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했다. 어리석은 뒷북이었다. 모종의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머나먼 부산의 큰 병원에 입원을 했다. 별 도리가 없었다. 다시 고향에 있는 작은 병원으로 갔다. 수술은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그곳에 머물던 어느 날 밤 작은 음성으로 “동치미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동치미를 구해왔다. 어머니는 누워있는 아버지의 입에 동치미 국물을 몇 숟가락 떠 넣었다. 나는 병원에서 최후를 향해 달려가는 어떤 인간의 극단적인 나날을 감상했다. 그 몸은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마를 수 있는지 최대치를 증명해보이려는 듯 했다. 항암제 탓에 머리카락은 절반이 빠졌다. 50대의 육신은 아프리카 기아 난민같은 70대 노인이 되어있었다.

12월18일 대선에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했다. 그는 41.4%(997만 7646표)의 지지를 얻었다.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33.8%(804만1690표),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는 16.1%(388만167표)를 얻었다. 김대중은 다음날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 그를 공격하던 언론들이 온정적으로 그의 정치일생을 평가했다. 김대중은 1993년 1월26일 영국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투표를 할 수 없었다. 병원 의사는 회복 여부에 대해 고개를 저었고 결국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선거 당일 아버지는 식물인간처럼 그저 누워있었다. 코와 입과 항문 등엔 여러 가닥의 관들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때만 해도 의식이 있었고 집안일에 대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형과 나는 휴가를 내어 고향집에서 번갈아 병간호를 하기도 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간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똥과 오줌을 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졸음이었다. 왜 아버지 앞에만 앉으면 지독한 졸음이 밀려왔을까. 미칠 것만 같았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과거는 그랬구나
현재는 고달프다
미래는 별이 보이다

과거는 복잡했다
현재는 미묘하다
미래는 캄캄절벽이다

과거는 죄인이었다
현재는 모른다
미래는 살벌하다

과거는 잘 안다
현재는 갈등이 교차한다
미래는 아름답다

과거는 자랑할 것이 없다
현재 역시 자랑할 것이 없다
미래도 자랑하지 말라





제25권 앞에 있는 또 다른 시다.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이 시 역시 죽음의 암시로 읽힌다. “과거는 복잡했다/ 현재는 미묘하다/ 미래는 캄캄절벽이다.” 왜 아버지는 1992년 초입에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을까.




1993년이 밝았지만, 아버지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텅 비어있는 스크랩 제26권이 그 현실을 웅변한다. 아버지는 병석에 눕기 전 미리 1993년치 스크랩을 준비해놓고 겉에 ‘묘비’라는 제목과 ‘제26권’이라는 호수까지 적어놓았다. 물론 그 안에는 단 한 장의 신문기사도 없다. 1993년 1월이 되자 아버지는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두 음절 이상은 발음하기 힘들었다. 가능한 말은 “물”(물 달라) “가”(이제 그만 가) 정도였다. 상대방이 무슨 말인가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1월 중순쯤 되자 아버지는 눈만 깜빡깜빡했다. 호흡은 가빠졌다. 고향집 마당의 은색 엘란트라는 시동을 켤 주인을 잃 고 5개월째 우두커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정권교체는 아니었지만, 김영삼 정부는 분명히 군사정부와 다른 최초의 문민정부였다. 그의 지지율은 취임 첫 해 저돌적인 개혁 드라이브 속에서 95%까지 치솟았다. 윗물맑기운동이 진행되면서 부정축재 혐의를 받은 공무원 3000명이 구속ㆍ파면되거나 징계당했다. 취임 후 100일간 고위 장성 87명 중 50명이 교체되면서 전두환 노태우를 배출한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는 몰락했다. 8월12일엔 김영삼의 선거공약이기도 했던 금융실명제가 전면실시됐다. 누구나 은행에 주민등록증을 들고 가 통장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더불어 ‘세계화’의 화두가 넘실거렸다. 학생도, 농부도, 노동자도, 공무원도 세계와 경쟁할 때라고 했다. 김영삼의 개혁은 시작되었다. 그는 훌륭한 대통령으로, 세계적인 대통령으로 남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시처럼, 김영삼도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했다. 취임 첫해 기세등등하던 김영삼은 서서히 빛을 잃더니 임기 말 ‘IMF 환란의 원흉’으로 찍혀 신한국당(1996년 2월부터 민자당이 바꾼 당명) 안에서조차 왕따를 당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다.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은 1993년 2월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뜰에서 열렸다. 한 달 전인 1월17일 낮 12시30분, 아버지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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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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