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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악의 콘서트 참사… 1992년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한공연

엘란트라가 주인을 잃었다, 개혁은 시작되었다 “…내 인생이 웃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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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스크랩 제25권을 펼친다. 1992년은 선거의 해였다. 2012년처럼 총선과 대선이 한 해에 있었다. 내가 고향집을 찾아 아버지의 첫 승용차를 만난 것은 3월 총선으로부터 한 달여 지난 4월 중순이었다. 나는 직장생활 2년차였다. 만 스물다섯이었다. 1500cc 은색 엘란트라는 그 여유의 소박한 상징이었다. 하필 비극의 그림자는 이럴 때 들이닥칠까. 1992년은 나에게 먹먹한 흑빛 이미지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스크랩 25권을 다 채우지 못했다.

차다!!
차가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였다. “차 사신 거예요?” 고향집 현관에 들어서는 내 입에선 그 말부터 터져나왔다. 좁은 마당을 지나오며, 이전에 없던 은색 엘란트라 승용차를 발견한 터였다. 아버지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나는 “와!” 탄성을 지르며 휘파람을 불었다. “몰아봐야지~.”

아버지를 채근해 곧장 운전대를 잡고 나갔다. 아버지는 조수석에 앉아 불안한 눈초리로 나를 힐끔거렸다. “정말 잘 할 수 있어?” 운전면허를 딴 지 6개월 되던 때였다. 몇 번이나 시동을 꺼뜨렸다. 삼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출발을 못해 허둥대자 교통경찰이 다가와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수동기어 작동이 익숙치 않아서였다. 그래도 별 사고 없이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집에 왔다. 나는 괜히 마음이 들떴다. 운전하는 맛에 한참 재미를 붙이던 시절이었다. 내 차가 없으니 더욱 더 운전대를 잡는 일에 안달복달하던 때였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보통은 시내버스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그날은 달랐다. “아버지, 터미널까지 좀 태워주세요.” 아버지 역시 운전이 서툴렀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20여 분간 조마조마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안녕히,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했다. 그날 내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보았다. 아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25권을 펼친다. 1992년은 선거의 해였다. 2012년처럼 총선(3월24일)과 대선(12월18일)이 한 해에 있었다. 내가 고향집을 찾아 아버지의 첫 승용차를 만난 것은 3월 총선으로부터 한 달여 지난 4월 중순이었다. 나는 직장생활 2년차였다. 만 스물다섯이었다. 아버지 역시 젊었다. 쉰일곱. 환갑이 3년이나 남았다. 마이카붐이 본격화하던 해에 처음으로 차도 장만하셨다.(1992년에 한국의 자동차는 500만대를 돌파했다) 물질적으로 곤궁하던 시기를 힘겹게 통과했고, 일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성취와 업적을 이뤘다. 이제 조금 여유롭게 살아도 될 만했다. 1500cc 은색 엘란트라는 그 여유의 소박한 상징이었다. 하필 비극의 그림자는 이럴 때 들이닥칠까. 1992년은 나에게 먹먹한 흑빛 이미지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스크랩 25권을 다 채우지 못했다.



“정주영씨에 불우성금 받아”
청와대 시인
“기탁자 뜻에 따라 사용” 당국자
“사용내용 등 공개하라” 민주당
야, 불응 땐 국조권 요구키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청와대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냈다고 폭로한데 대해 청와대가 이를 시인함으로써 정계와 재계에 도덕성 시비가 불붙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고위당국자는 9일 오후 정씨 주장에 대해 “과거의 관행에 따라 소수 기업인들이 불우이웃돕기 등에 보태 써달라고 성금을 기탁한 일이 있는데 그 경우에는 기탁자의 뜻에 따라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자금을 헌납받았음을 시인했다.
이 당국자는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러한 관행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생각, 시정하려고 노력해왔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정씨로부터 받은 자금의 규모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않았다. 청와대측은 정당창당 작업에 나선 정씨가 기존 정치권에 대해 흠집을 내고 당국의 압력을 우려 이를 사전 봉쇄하는 차원에서 정치공세에 나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하략)

(<국민일보> 1992년 1월10일치)





후기대 시험지 도난사건
범인은 학교 경비원
어젯밤 범행 일체 자백
“수험생 부모 부탁받고 단독범행
빼낸 시험지 파문 엄청나 태웠다”
범인 조계택씨 2년 전부터 서울신학대 근무


【부천=원일희ㆍ배국남 기자】서울신학대 대입시험도난사건은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 신고한 이 학교 경비원 정계택씨(44)의 단독범행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22일 밤 정씨로부터 범행일체를 자백 받고 증거확보 수사에 나섰다.
정씨는 이날 경찰에서 자신이 집사로 있는 부천성결교회 신자인 부천 B여고3년 황모양(18)의 어머니 이성분씨로부터 부탁을 받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정씨는 황양 어머니 이씨로부터 “딸이 올해 전기대 입시에서 청주C대에 합격했으나 학교가 멀어 다니기 힘들어 집 가까운 서울신학대에 다시 응시하려하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시험문제를 훔쳐다주기로 했다는 것.(하략)

(<한국일보> 1992년 1월23일치)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치를 시작했다. 1월3일 “앞으로는 기업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월7일엔 “청와대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냈다”고 폭로했다. 청와대 고위당국자는 9일 “불우이웃돕기 명목으로 성금을 받은 일이 있다”고 시인했다. 대통령은 부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불우한 이웃이었다. ‘부자 정주영’은 청와대에 사는 불우이웃을 돕는 일에 질렸는지, 자신이 청와대를 접수하겠다고 나섰다. 2월8일, 그를 대표로 내세운 통일국민당이 창당되었다. 이미 새한당을 만들었던 연세대 교수 김동길과 코미디언 이주일(본명 정주일)이 합류했다. 돈을 가진 자가 권력까지 품으려는 도박이었다.

1월21일엔 서울신학대에서 후기대 대학입시 문제지가 도난당했다. 이로 인해 후기대 대학입시 일정이 미뤄졌다.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검찰과 경찰은 서울신학대 경비원 정계택씨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증거를 찾지 못했고, 영장청구가 어려워지자 다른 기소중지사건으로 구속해버렸다. 엉성한 수사에 대한 비난여론이 드높았다. 그 와중에 사건 직후 직위해제를 당했던 서울신학대 경비과장 조병술씨가 목을 매 자살했다. 그는 정계택씨의 혐의를 처음으로 경찰에 제보했던 인물이었다.1)



‘뉴키즈’ 광란 10대 50여명 부상
올림픽공원 체조장 200명 무대 뛰쳐나가 아수라장
밀치고 깔려 졸도ㆍ실시
앰뷸런스 20대 후송…1명 중태
30분만에 공연 중단


17일 하오7시30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미국의 5인조 남성보컬그룹 ‘뉴키즈 온 더 블록’의 한국공연은 10대 극성팬들의 광란으로 30분 만에 중단된 채 50여명의 소녀들이 깔리고 넘어져 부상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날 공연은 대부분이 10대 소녀들인 1만6천여 청중의 광기와 다름없는 열기 속에서 예정보다 30분 늦게 시작됐는데 30분만인 하오8시께 이 그룹의 히트곡인 ‘투나잇’(Tonight)이 5번째 곡으로 연주되자 청중석에 앉아있던 2백여 명의 소녀들이 괴성을 지르거나 소지품, 꽃다발을 던지며 우르르 무대로 달려나가다 서로 밀치고 깔려 졸도ㆍ실신하는 수라장이 돼버렸고 이중 35명은 앰뷸런스 20여대 편으로 인근 10개 병원에 후송됐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10대이나 서울중앙병원에 옮겨진 25~30세 가량의 여자는 호흡곤란으로 중태이다. 이 소동으로 공연이 중단된 뒤에도 10대 팬들은 “뉴키즈” “아이 러브 조나단”을 외치거나 울음을 터뜨리면서 자리를 뜨지 않고 공연속개를 요구했으나 공연은 하오10시가 넘어서까지 다시 열리지 않았다.
10대 팬들은 공연 시작 4시간여전인 하오3시 이전에 이미 1천여 명이 공연장 주변에 몰려들어 광란소동을 예고했는데 공연 시작전부터 환호와 기성, 울음소리로 장내는 옆 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소란스러웠다.
관할 송파경찰서는 15개 중대 2천여 명을 공연장 안팎에 배치했으나 극성 10대들의 광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국일보> 1992년 2월18일치)





여소야대…정국대변혁 시동
민자 참패ㆍ국민 돌풍…3당체제로
민주 서울 등 선전ㆍ무소속도 강세
14대 총선 개표완료


여야는 14대 총선 결과가 여소야대 재현과 3당체제 출범이라는 대이변을 기록하자 선거에서 나타난 민의를 정국운용에 수렴하기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 정계변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1노3김’을 축으로 한 기성정치권에 대해 ‘물갈이’론 등의 강력한 개혁요구가 수위를 높여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정국은 12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겨냥한 정파간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등 정계재편을 둘러싼 진통으로 몸살을 앓을 것으로 전망된다.
여권은 선거참패의 후유증을 조기수습하기 위해 대규모 당정개편과 국정쇄신 등을 서두르고 있으나 민주ㆍ국민 등 야권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지자제 전면 재실시와 군부재자투표문제 등을 고리로 대여정치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정국은 6월초로 예정된 14대 국회 출범 때까지 첨예한 대치국면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하략)

(<한국일보> 1992년 3월26일치)




2월17일엔 미국의 남성보컬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한공연장에서 200여명의 소녀관객들이 무대 앞으로 뛰쳐나가다가 서로 밀치고 깔려 공연이 중단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7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후송된 뒤 열여덟 살 박 아무개 양이 죽었다. <한국일보>의 사진설명은 개탄하는 어조다. “이게 무슨 꼴인가. 서로 무대 앞으로 뛰쳐나가다 다쳐 넘어지거나 실신한 여학생들이 공연장 바닥에 쓰러져 있다.” 이른바 ‘오빠부대’로 불리던 소녀들의 팬덤문화보다 주최 쪽의 안전관리 소홀을 탓해야 할 사안이었다. 적정 수용인원을 6,000여명이나 초과하여 입장시킨 게 나중에 문제가 됐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서, 팬심에 날뛰는 소녀들의 비명은 더 날카로워졌다. 3월23일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음반 <난 알아요>가 나왔다. 4월11일 MBC <특종! 티브이연예>에선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태지 오빠’는 태풍이 되어 그해 여름을 강타했다.

3월24일 총선에선 여당인 민자당이 참패했다. 한데 3월25일치 <한국일보>의 제목은 엉뚱하게도 ‘민자 총선 압승’이다. 아버지는 제목 위에 붉은 사인펜으로 ‘오보’라고 적었다. 30% 개표상황이었다. 개표완료 상황을 보도한 3월26일치 <한국일보>의 제목은 ‘여소야대…정국대변혁 시동’이다. 지역선거구에서 민자당은 116석(전국구 33석), 민주당은 75석(전국구 22석), 통일국민당은 24석(전국구 7석)을 얻었다. 90년 3당합당으로 뒤집어졌던 여소야대 구도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현대 계열사 직원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정치광고에 거금을 쏟아부은 통일국민당은 약진했다. 김동길은 서울 강남 갑에서, 이주일은 경기 구리에서 당선했다.

洗足

鐵이 철을 비비며 산다
웃기는 여자가 하품을 하니 슬프다
발을 씻고 그 물을 마시고 싶다

생각해보니 싱겁구나
비웃어본다
그래도 자꾸만 그 물을 吐하고 싶다

발이 무섭게 운다
말없이 울기 때문에 무섭다
손을 씻으라. 손을 털어라
발을 빼라 씻는 것보다 빼는 것이 좋다
내 인생이 웃기는구나





스크랩 25권 맨 앞에 아버지가 적어놓은 시다. 세족.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하여 교회에서는 특별한 날에 ‘세족식’을 했다. 겸손과 봉사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는 의식이다. 그 세족과는 뉘앙스가 다른 세족이다. 인생을 비웃는 세족이다. “생각해보니 싱겁구나…발이 무섭게 운다…발을 빼라 씻는 것보다 빼는 것이 좋다…내 인생이 웃기는구나.” 발을 씻지 말고 빼라고 한다. 자꾸만 인생이 웃긴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닥칠 뭔가 안 좋은 운명을 예감하는 듯한 시다.




1) 부가설명이 필요하다. 도난당한 건 수능고사 문제지가 아니었다. 1994년 이전엔 학력고사였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 출범직후인 1981년 시작한 학력고사는 처음엔 선시험 후지원이었다. 학력고사 시험을 한 번 본 뒤 그 점수만으로 전기대와 후기대 입시를 차례로 치렀다. 1988년부터 이 제도가 선지원 후시험으로 바뀌었다. 지원할 학교를 정한 뒤 그 학교에서 학력고사를 보았다. 당연히 전기대 입시와 후기대 입시문제가 달랐다. 위 사건은 그중 후기대 입시문제지를 누군가 훔친 것이었다. 20점의 체력장 점수와 내신을 제외한 320문항의 학력고사에서 시험지 유출은 치명적이었다.(학력고사 이전, 즉 1969년부터 1980년까지는 모든 대학입시 지원자들이 예비고사를 치르고 자신이 지원하는 대학에서 본고사를 봤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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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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