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아이가 여섯 살쯤 되었을 어느 날 저녁,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딸아이와 함께 책을 보고 있었다. 마침 퇴근하던 남편이 초콜릿을 사오자 딸이 냉큼 받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엄마, 누워서 뭐 먹으면 정말 소 되는 거야? 지난번에 진짠가 싶어 누워서 껌 씹어 봤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
전래 동화 ‘소가 된 게으름뱅이’를 읽고 너무 진지하게 묻는 딸아이가 하도 귀여워 남편이 한 술 더 뜬다.
“그때는 껌만 씹었지, 먹은 게 아니잖아. 먹어서 꼴딱 삼켜야지. 너 이제 초콜릿 먹었으니까 소 된다. 어, 너 입이 왜 이래? 어어, 얼굴이 점점 길어지네!”
“엄마, 나 어떡해? 나 뿔도 나는 거야?”
예영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기 몸을 더듬거렸다. 심각한 아이 모습이 어찌나 우습고 사랑스럽던지.
작은아이는 오래도록 산타할아버지를 믿었다. 산타가 루돌프 사슴이 끄는 마차를 타고 우리 집에 직접 들어와 선물을 주고 간다며,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제일 아끼는 양말을 머리맡에 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작은아이는 가끔씩 딴 세상에 사는 듯했다. 재미있는 동화책을 읽으면 자신이 정말로 동화 속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실감 나게 말했다.
“엄마, 라푼젤이 머리 내려뜨려서 왕자가 잡고 올라올 때, 머리카락 당겨져서 무지 아팠을 텐데 어떡하지? 나 머리 묶을 때 당기면 진짜 아프던데, 라푼젤은 어떻게 참을까? 근데…. 지금은 머리를 잘랐을까?”
밥 먹다가도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며 눈을 반짝였다.
상상의 시기를 길고도 깊게 보낸 둘째는 어둠을 무척이나 무서워했다. 해질녘이 되면 스무 평 남짓한 우리 집을 전속력으로 달리며 빛이 있는 곳을 찾아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곤 했다. 불이 꺼진 방에는 절대 들어가지 못하고, 언니랑 둘이 자는데도 맘이 안 놓이는지 밤마다 엄마랑 자면 안 되냐며 노래를 불렀다. 밤에 화장실에 갈 땐 반드시 누군가가 동행해야 했다.
“예영아, 이 방엔 아무것도 없어. 우리 집에 괴물 안 살아! 제발 그만 좀 무서워해라! 이제 일곱 살이나 먹었으니까 화장실도 혼자 가!”
날마다 반복되는 ‘무서워’ 타령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른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를 너무 소심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어, 어둠을 이겨보게 하려고 일부러 빈방에 혼자 둬보기도 했다. 나름대로 이것저것 방법을 다 써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결국 나는 무서워하는 아이를 품에 꼭 안고 상상의 세계에 동참하는 것을 택했다. ‘에고, 또 검둥 마귀가 나타났구나! 예영이 수호천사님이 빨리 오셔야 할 텐데. 우리, 천사님 빨리 오라고 기도할까?’ 그리고 이 방법이 아이의 마음을 훨씬 더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이는 요즘도 이것저것 궁리하는 걸 좋아한다. 물건을 살 때 따라오는 잡다한 포장지나 작은 물건들을 모아 방에 쌓아둔다. 방문 앞에 ‘작업 중’이란 팻말도 만들어 걸고 방 안에서 한두 시간은 너끈히 뚝딱인다. 그러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한참 만에 들고 나오는 것은 참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신제품(?)이다.
“이건 새로운 계산기야. 어떻게 하냐면…….”
아이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얼굴로 장황하게 설명을 시작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이미 온통 난장판이 된 방부터 떠오른다. 딸!
청소는 제발 니가 해라, 응?
그랬다. 상상의 시기를 거치는 아이들 안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두려움도 아이의 내부에 있기에, 방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달래며 손목을 끌고 가 불을 켜줘 봐야 소용이 없다.
“그것보다는 아이의 상상 속으로 함께 들어가주는 일, 적어도 아이의 상상의 세계를 그냥 인정해주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엄마는 아이가 그런 상상을 하는 이유를 짐작해서 찾아내야 하며 아이에게 현실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상상 속을 맘껏 헤엄치며 스스로 문제를 다 풀어내야 비로소 그 세계 속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 옛날엔 나 정말 누워서 과자 먹다가 소 되는 줄 알았어. 참 웃기지?”
이제 슬슬 상상 속에서 나오려 하는 작은딸이 ‘옛날’을 강조한다. 겨우 11살이면서 다 큰 아이인 양.
그래도 충분한 상상력은 창의력과 자신감을 심어준다는 호머 레인의 말이 둘째 예영이에게는 아직까지 들어맞는 것 같다. 그는 상상은 거짓을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장하는 방식’이며, 상상의 시기에 허구는 유용하고 필연적이고 정당하다고까지 한다. 그러므로 상상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거짓말도 너무 일찍 차단하거나, 너무 거창하게 확대해석하여 참견하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상상을 존중받지 못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는 몽상가가 되거나, 거짓말만 일삼는 허풍쟁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 관여해야 할지 그때그때 판단하기란 참 어렵다. 내가 적정한 수위로 관여한 건지, 과하게 방치한 건 아닌지…. 사실 답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엄마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엄마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일, 아이 스스로의 힘을 믿고 때에 맞춰 성실하게 반응해주는 일이 필요할 뿐이다.”
어른들은 아이의 잠재된 힘을 믿고 그들의 성장단계를 인정해줘야 한다. ‘신이 주신 또 하나의 사람’과 함께 성장해 나간다는 건, 내 어린 시절을 다시금 돌아봐야 하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많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성찰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말
엄마가 되면 간과하는 당연한 사실 중 하나는 나도 한때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어른의 눈으로는 절대 상상의 세계에 있는 아이를 어루만지고 보듬어줄 수 없다. 사실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넘어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하나의 성장과정일 뿐이다. 아이 스스로가 만들어버린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단순히 그런 건 세상에 없다고 말해줘봤자 그것은 뻔하고 재미없고 아이들에겐 먹히지 않는 어른들 세계의 충고일 뿐이다. 엄마의 신분으로 아이의 세계에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아이의 시각과 눈높이를 맞추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성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때론 맘, 때론 쌤, 그리고 나김영란 저 | 한언
저자는 공립 초등학교, 대안학교, 기간제 교사, 소년원 상담교사 등을 거치면서 결국 맘과 쌤은 하나임을 깨닫는다. 가끔은 엄마란 이름에서, 교사란 이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와 함께 엄마 자신도 끊임없이 키워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꿈을 꾸는 엄마가 진정 행복한 엄마가 되는 길임을 피력한다. 이 책은 좋은 엄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행복한 엄마가 되기 위해선 ‘진정한 나를 찾아 아이와 함께 꿈을 꾸고 부대끼며 성장하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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