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불후의 명작『죄와 벌』, 암담한 현실에서 쓰다
그는 뻬쩨르부르그에서 무엇을 보았나…
독자들이 『죄와 벌』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워하는 것 중의 하나는 소설 속의 공간과 시간이 현실의 그것과 괴리를 보인다는 점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뻬쩨르부르그인데, 작가는 이 아름다운 도시를 시종일관 기괴하게 묘사하고 있다.
『죄와 벌』에서 재현된 뻬쩨르부르그의 뒷골목 풍경
도스또예프스끼가 『죄와 벌』을 쓸 당시 그는 스똘랴르니 뻬레울로끄(러시아어로 ‘골목길’이라는 뜻)와 말라야 메쉬찬스까야 거리가 교차하는 집에서 살았다. 도스또예프스끼가 당시 살던 지역은 뻬쩨르부르그의 중심가와는 사뭇 다른 곳이다. 도심은 대로, 화려한 광장, 거대한 궁전, 저택 들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가 살았던 변두리는 시장 상인과 거지, 창녀 들이 운집한 센나야 광장, 꼬불꼬불하게 뒤틀린 예까쩨린스끼(현 그리보예도프) 운하 주변이었다. 이곳은 좁은 길과 막다른 골목 들이 서로 뒤엉켜 있다. 지금은 길 이름이 바뀌었지만 옛 지명을 상기하면 이곳이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동네인지 짐작할 수 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죄와 벌』을 썼던 집의 옛 주소가 말라야 메쉬찬스까야малаямещанская 거리인데, ‘메쉬찬스까야’는 러시아어 ‘메쉬차닌мещанин’에서 파생된 것이다. 메쉬차닌은 ‘소시민’이라는 의미이고, 말라야는 ‘작은’이라는 뜻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곳은 별볼일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는 말이다.
이 지역은 숲이 우거진 공원도 없고, 나무가 적어 여름이면 뙤약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한낮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큰 고역이다. 더군다나 골목길마다 먼지투성이여서 불쾌하기 짝이 없다. 이런 주변 환경은『죄와 벌』의 앞부분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소설은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뜨거운 여름날,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거리를 쏘다니는 것으로 시작된다.
『죄와 벌』에서 뻬쩨르부르그의 이런 이미지들은 살아 있는 등장인물과 흡사한 역할을 한다. 도시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고, 그들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주인공들이 살았던 집, 다녔던 거리, 만났던 장소 등이 실제 지명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곳을 따라 다니면 별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예컨대 라스꼴리니꼬프가 살았던 다락방의 모델이 된 집은 스똘랴르니 골목길과 스레드냐야 메쉬찬스까야 거리(현재는 그라쥐단스까야 거리 19번지)가 만나는 곳에 있다. 이 건물 1층에는 여기가 라스꼴리니꼬프의 집임을 알리는 멋진 기념석이 세워져 있다. 이 집은 재건축한 것이지만 안마당에서 주인공의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여주인공 소냐 마르멜라도바의 집은 예까쩨린스끼 운하와 말라야 메쉬찬스까야 골목길이 만나는 모퉁이에 있다. 이곳의 현 주소는 그리보예도프 운하길 73번지다. 건물은 1층을 더 올리고 녹색에서 황색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처음으로 그녀의 집을 찾아갔을 때 3층으로 된 몹시 낡은 건물은 녹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건물에는 경비원이 있고, 소냐의 집 출입구는 건물 안마당으로 나 있었다.
마당 한쪽 구석에 좁고 어두운 입구가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면 마당 쪽으로 난 회랑 복도가 나온다. 복도는 어둠침침했다. 세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거기서 창백한 얼굴을 한 소냐가 놀란 눈으로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소냐의 집은 『죄와 벌』에 나오는 공간 중에서도 가장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도스또예프스끼는 그 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소냐의 방은 마치 헛간 같았고, 심하게 비틀린 네모꼴을 하고 있어서 무언가 기형적인 느낌이 들었다. 운하 쪽으로 세 개의 창을 낸 벽은 방을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있었고, 이로 인해 방의 한쪽 구석은 심하게 예각을 이루면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는 그 구석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구석은 보기 흉할 정도로 심한 둔각을 이루고 있었다. |
라스꼴리니꼬프가 도끼로 전당포 주인 노파를 살해한 장소도 그대로 있다. 노파의 집은 그리보예도프 운하길 104번지와 스레드냐야 뽀쟈체스까야 거리 15번지가 교차하는 모퉁이 건물이다. 이렇게 작품 속의 지명과 공간이 실제와 일치하는 것은 허구적인 사건들이 마치 실제 일어난 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자아낸다.
뒤틀리는 시공간
독자들이 『죄와 벌』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워하는 것 중의 하나는 소설 속의 공간과 시간이 현실의 그것과 괴리를 보인다는 점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뻬쩨르부르그인데, 작가는 이 아름다운 도시를 시종일관 기괴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작가의 시선(라스꼴리니꼬프의 시선)이 주목하는 것은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건축물, 낭만적인 네바 강과 수많은 운하가 아니라 역한 냄새가 나는 선술집, 하급 음식점, 유곽遊廓, 변두리의 여관, 파출소, 학생들이 기거하는 다락방, 고리대금업자의 아파트, 인적이 드문 거리와 골목, 더러운 마당과 뒤뜰 등이다.
이 밖에도 작가의 시선에 포착된 도시의 살풍경들은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인물의 비극적 파국을 암시하기도 한다. 예컨대, 노파가 사는 아파트에 대한 묘사에서 작가는 계속 ‘노란 벽지’ ‘노란색 나무’ ‘노란 액자들’을 반복함으로써 그녀의 음울하고 사악한 성격을 드러낸다. 이렇듯 도스또예프스끼는 뻬쩨르부르그라는 도시를 인물들의 심리적 갈등과 극적인 순간을 표현하기 위한 공간적 배경과 상징으로 이용하고 있다.
저자가 모스끄바 국립대학 재학 시절 도스또예프스끼 세미나에 참여하면서부터 모아온 방대한 자료와 더불어, 2009년과 2010년 여름, 도스또예프스끼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모스끄바, 대부분의 작품활동을 전개한 뻬쩨르부르그,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중 4년간 감옥살이를 한 옴스끄, 말년에 가족과 전원생활을 즐긴 스따라야 루사 등 직접 취재한 기록을 담았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모스끄바 국립대학에서 러시아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강의교수로 재직중이며, 같은 대학 의대에서 '문학과 의학'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미하일 부가꼬프의 『젊은 의사의 수기.모르핀』, 벨린스끼 문학비평선 『전형성, 파토스, 현실성』(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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