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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의 딸 나카가와 히데코 저 | 마음산책 |
『셰프의 딸』은 여러 나라를 삶의 무대로 삼은 한 코즈모폴리탄의 특별한 이야기를 담았다. 다양한 갈림길 앞에서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마음이 이끄는 곳을 택했던 사람. 그는 일상에 파묻혀 꿈을 접어둔 이들에게 ‘안주’와 ‘정체’ 대신 스스로 찾아가는 삶의 기쁨,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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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처음 만들어준 요리는 카르보나라였다. 오뎅이나 니쿠자가 같은 일본 가정 요리를 만들어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카르보나라라니, 솔직히 좀 난처했다. 남편이 말한 건 내가 일본이나 유럽에서 먹었던 카르보나라가 아닌 ‘미국식 카르보나라’. 만들 줄 모른다고 하기 싫어서 혼자서 끙끙거렸다. 그 무렵 한국은 대형 서점에 세계 각국의 요리책이 진열되어 있지도 않았고, 인터넷 검색도 수월하지 않았다. ‘미국식 카르보나라’의 레시피를 쉽사리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장차 남편이 될 남자친구에게 요리를 잘하는 면을 어필하고 싶어서 고육지책을 썼다. 일본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를 한 것이다.
“아빠! 미국식 카르보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요?”남자친구에게 만들어줄 거라는 말은 차마 못했다.
“흠, 글쎄다. 크림치즈랑 생크림에 달걀을 섞으면 비슷하게 되는 거 아니냐?”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대답도 애매했다.
“알겠어요. 만들어볼게요. 고마워요.”갑자기 왜 그런 걸 만드느냐고 물어보실 것 같아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크림치즈라니…… 왠지 미국 느낌이 나는데?’
곧바로 ‘사러가’에 갔다. 있다, 있어.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달걀과 크림치즈, 판체타(소금과 향료로 처리한 이탈리아식 베이컨이나 훈제하지 않은 말린 베이컨 대신 베이컨), 1990년대에는 ‘사러가’에도 없었던 이탈리아 직수입 파르메산 치즈 대신, 녹색 원통형 용기에 든 크래프트 가루치즈를 사서 하숙집 부엌으로 돌아왔다. 시험 삼아 먼저 만들어보기 위해서였다.
볼에 달걀노른자 세 개와 생크림 조금, 파르메산 치즈, 소금을 섞고 스파게티 면을 삶은 물을 조금 넣는다. 여기에 알덴테(스파게티 면을 삶았을 때 안쪽에서 단단함이 살짝 느껴질 정도를 말한다)로 삶은 면을 넣고 버무린다. 접시에 옮겨 담고 바삭바삭하게 구운 베이컨을 올린 후 카르보나라의 어원과 관련된 후추를 듬뿍 뿌리면 완성되는 간단한 요리다.
이탈리아어로 카르보나라는 석탄 캐는 광부라는 뜻이다. 광부들이 휴식 시간에 파스타를 만들었는데, 손에 묻은 석탄가루가 떨어지면 이런 모양이겠거니 하고 검정 후추를 듬뿍 뿌린 것이 카르보나라 소스의 기원으로, 상당히 담백한 맛이 난다. 크림치즈를 넣으면 과연 어떤 맛이 날까.
일단 원래의 카르보나라 소스와 같은 방법으로 볼에 재료를 넣고, 파르메산 대신에 고체 크림치즈를 적당량 잘라 손으로 부수어가며 볼에 넣고 섞었다. 나무 주걱으로는 치즈가 달걀에 잘 섞이지 않았다. 거품기를 써봐도 액화가 쉽지 않다.
‘어떻게 할까…… 그렇지! 생크림을 넣어보자.’
나는 냉장고에 우유가 없는 것보다 생크림이 없는 것이 더 불안해서 늘 냉장고에 생크림을 준비해둔다. 반 컵 정도 넣어보았다. 그러자 크림치즈도 점점 녹아서 달걀에 잘 섞였다. 원래 생크림을 넣는 레시피는 달걀이 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즉 생크림을 넣으면 실패할 리 없는 것이다. 거품기로 달걀을 섞고 있는데 스파게티 면이 거의 익었다. 국자로 면을 삶은 물 약간을 볼에 넣고 섞으니 크림치즈 덩어리도 모두 녹아서 내 멋대로 상상했던 걸쭉한 미국식 카르보나라 소스가 완성되었다. 후추를 듬뿍 뿌리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삶은 스파게티 면에 섞은 뒤 구운 베이컨과 치즈를 뿌렸다. 진한 카르보나라였다.
로마의 지방 요리에 불과했던 카르보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에 진주한 미군이 달걀과 베이컨을 배급하면서 이탈리아 전 지역에 전파되었다고도 한다. 달걀과 베이컨을 좋아하는 미군 사이에서 후추가 듬뿍 들어간 카르보나라가 인기 메뉴로 부상하여, 미국으로 돌아간 군인들에 의해 이 레시피가 미합중국 전체로 퍼졌다는 얘기도 있다.
‘어쩌면 남자친구가 먹고 싶다고 한 카르보나라는 담백한 로마식일지도 몰라…….’
카르보나라의 역사를 떠올리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 다음 주 주말에 ‘미국에서 먹었던’ 카르보나라를 만들어주기로 약속했다. 혼자 시험 삼아 한 번, 그리고 그때 남편에게 만들어준 것으로 끝난, 크림치즈를 넣은 ‘스파게티 알라 카르보나라(카르보나라의 정식 이름)’. 그 당시에는 남편도 연신 맛있다고 하며 먹긴 했지만, 결혼하고 나서
“그때 먹은 카르보나라 한 번 더 만들어줘” 하고 말한 적이 없다. 지금은 요리 교실 레시피에도 들어가 있는, 달걀과 파르메산 치즈로만 만드는 로마식 ‘스파게티 알라 카르보나라’만이 우리 집 식탁에 등장한다.
이러한 연유로 나의 카르보나라는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완수하였으며, 그 후 남편은 답례로 설로인 스테이크(소고기 중에서 등심의 연한 부위를 구운 것)를 만들어주었다. 코바우에서 자주 어울렸던 친구와 함께 마주앙 프랑스 와인을 들고 스테이크를 얻어먹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은 고기 굽는 기술이 천하일품이다. 연애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 음식만 생각나는 것은,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일까. 남편을 만나고 나서의 추억을 떠올려보면 먼저 요리 이름이 생각나고, 그런 다음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하며 먹었는지가 차례차례 생각난다. 데이트를 하면 반드시 한 번은 함께 밥을 먹게 되니 남편과는 수많은 음식을 먹고 마셨다.
결혼 후 첫아들의 돌까지 2년간,
“아직 한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함께 살면서 배워라” 하는 시부모님의 뜻으로 두 분을 모시고 살았다. 카르보나라로 시작된 우리 사랑에 얽힌 이야기들이 그렇게 같이 먹은 요리와 함께 차례로 떠오른다.
나는 인생에서 자립을 배우는 시기인 20대에 일본을 떠나 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다. 부모님의 충고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런 탓에 시부모님께 무엇을 지적당할 때도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미숙한 한국어, 혹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한국 문화와의 충돌 등 사소한 일로 자주 시부모님과 부딪쳤다. 시어머니께 된장찌개나 곰탕을 배웠을 때는
‘나는 이렇게 안 만들 거야. 훨씬 더 맛있는 된장찌개를 만들어 보일 테야’ 하고 의욕에 가득 차서는, 일주일에 한 번 무형문화재인 고故 황혜성 선생님께서 운영한 궁중음식연구원에 몰래 다니기 시작했다. 옹알이를 갓 시작한 아들을 시어머니께 맡기고 말이다. 황혜성 선생님의 따님인 한복려 선생님께도 요리를 배우며 3년간 원서동 연구원에 다녔지만, 결국 된장찌개도 곰탕도 시어머니의 맛을 훌륭히 계승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만들어준 요리 중에 뭐가 제일 좋아?”오랜만에 남편에게 애교스럽게 물어보았다.
“오이랑 햄이랑 사과가 들어간 포테이토 샐러드랑 굴튀김! 그리고 겨자를 찍어 먹는 일본식 오뎅.”파에야나 부야베스 같은 각종 호화 요리를 만들어준 것에 비해서는 꽤나 소박한 대답이었다. 사람의 미각이란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