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수험일, 아버지가 싸준 도시락에 화가 난 이유
아버지는 만들기 간단한 주 메뉴 한 개로 도시락을 싸는 스타일
나는 25년 전 ‘셰프의 도시락’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대학 수험일. 그날 내가 들고 간 도시락은 아버지가 만드신 셰프 특제 도시락이었다. 수험 당일 아침이라 도시락 메뉴까지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어떤 도시락이라도 상관없었다. 아버지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방에 챙겨 넣고 수험 장소인 여대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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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셰프인 아버지가 도시락을 싸주실 때도 있었다. 저녁 때 남은 반찬을 도시락 반찬에 솜씨 좋게 활용하는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만들기 간단한 주 메뉴 한 개로 도시락을 싸는 스타일이다. 주먹밥을 싸주실 때도 도시락을 열어뢺면 거대한 주먹밥 한 개가 덩그러니. 남자다운 도시락이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남자답기 때문에 이렇게 만드신 것은 아니다. 나도 요리 교실을 열고부터는 아이들의 도시락이나 수제 간식을 대충 만들어줄 때가 많다. 물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도시락 뚜껑을 열면 주변 친구들이 “이야, 맛있겠다!” 하고 감탄하여 자랑스럽게 만들어주고 싶다. 영양을 듬뿍 담아주고 싶다. 하지만 아침부터 도시락 만들기는 번거롭다. 밖에서는 남들을 위해 요리하는 아버지도 분명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25년 전 ‘셰프의 도시락’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대학 수험일. 그날 내가 들고 간 도시락은 아버지가 만드신 셰프 특제 도시락이었다. 수험 당일 아침이라 도시락 메뉴까지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어떤 도시락이라도 상관없었다. 아버지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방에 챙겨 넣고 수험 장소인 여대까지 갔다. 오전 시험이 끝나고 드디어 점심시간. 아무리 긴장했을지라도, 아무리 아버지의 도시락일지라도, 어떤 반찬이 들었을까 설레는 기분은 매한가지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짜잔, 뚜껑을 열었다. 오각형의 뚜껑을 열자 눈에 들어온 것은 도시락 한가운데 새까만 김으로 싸인 삼각형 주먹밥 두 개. 주먹밥 주위로 한겨울이라 매우 값비쌌을 새빨간 딸기가 하트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너무나 창피했다.
주변 다른 수험생들의 도시락을 슬쩍 보고는 곧바로 뚜껑을 덮어버린 기억이 난다. 집으로 돌아와서 도시락통을 후다닥 씻으며, 얄미운 아버지께는 도시락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마도, ‘가고 싶은 대학의 시험이니까 먹기 쉬운 주먹밥이랑 딸기를 한 손으로 먹으면서 점심시간에도 마지막으로 점검하라’ 하는 뜻이었을 것이다. 값비싼 딸기는 아버지의 진심이 담긴 응원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심시간의 충격 탓이었는지 그 여대 시험에는 떨어졌다.
작년에 둘째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체육관과 급식실 리노베이션 공사로 3월부터 7월까지 도시락을 쌌다. 난생 처음으로 매일 아침 도시락을 쌌는데, 손에 익자 적당량을 기억하여 어머니처럼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을 척척 싸줄 수 있게 되었다. 소고기 덮밥을 싸간 날은 학급 전체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달걀로 부드럽게 감싼 소고기 덮밥이 학부형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난 것이다. 학교나 길거리에서 학부형들과 마주치면 “우리 아들이 그러던데, 지훈이가 싸온 소고기 덮밥에 든 소고기가 진짜 맛있었대요. 지훈이가 1등급 한우로 만든 일본식 덮밥이라고 했다던데, 도시락에 한우라니 굉장하네요! 나중에 그 덮밥 만드는 법 좀 알려줘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깜짝 놀랐다. 대충 만든 도시락이 그렇게까지 입소문이 날 줄이야. 사실은 우리 아들이 거짓말을 했다. 마침 한국에 미국산 소고기가 재수입된 시기여서 “오늘은 지훈이가 좋아하는 소고기 덮밥이야. 어제 마트 가니깐 미국산 소고기가 있더라고. 맛있을 거야” 하고 정확히 ‘미국산’이라 말해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친구들이 맛있다, 한입 더 줘, 하며 소란을 피우자 자기 도시락을 더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엄마인 나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아들의 명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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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독일, 스페인, 한국 정착, 한 코즈모폴리탄의 건강한 에너지가 넘치는 이야기 나카가와 히데코. 일본 태생의 귀화 한국인으로 한국 이름은 중천수자中川秀子. 일본 이름의 한자 독음을 땄다. 프랑스 요리 셰프인 아버지와 플로리스트인 어머니 곁에서 어릴 적부터 요리, 꽃꽂이, 테이블 코디네이트를 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