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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수험일, 아버지가 싸준 도시락에 화가 난 이유

아버지는 만들기 간단한 주 메뉴 한 개로 도시락을 싸는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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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5년 전 ‘셰프의 도시락’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대학 수험일. 그날 내가 들고 간 도시락은 아버지가 만드신 셰프 특제 도시락이었다. 수험 당일 아침이라 도시락 메뉴까지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어떤 도시락이라도 상관없었다. 아버지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방에 챙겨 넣고 수험 장소인 여대까지 갔다.

 
셰프의 딸
나카가와 히데코 저 | 마음산책
『셰프의 딸』은 여러 나라를 삶의 무대로 삼은 한 코즈모폴리탄의 특별한 이야기를 담았다. 다양한 갈림길 앞에서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마음이 이끄는 곳을 택했던 사람. 그는 일상에 파묻혀 꿈을 접어둔 이들에게 ‘안주’와 ‘정체’ 대신 스스로 찾아가는 삶의 기쁨,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물건을 오래 쓰신다.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물건을 오래 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만, 어머니가 보관해둔 물건을 해외에 갈 때 가지고 가면 어느 나라 사람이 보더라도 깜짝 놀랄 정도다. 그만큼 오래되고 낡은 물건을 깨끗하게 보관하신다. 지난겨울에도 일본에 갔을 때 한국에서 가지고 온 양말이 부족해서 어머니께 좀 빌려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장롱 서랍에서 내가 중학생 때 신던 긴 양말을 세 켤레나 가지고 오셨다. 매우 좋아하던 양말이라 그 당시에도 애지중지 신었지만, 설마 이런 물건까지 버리지 않고 보관해두다니. 어머니께 새삼 감탄했다.

이런 어머니께서 지금까지 보관해둔 물건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 손바닥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디작은, 빨간 장미가 그려진 양은 도시락통일 것이다. 뚜껑 부분에는 고풍스러운 장미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다섯 살짜리 유치원생 딸의 도시락통에 이런 무늬라니. 그 당시 아이들이 좋아했던 만화 캐릭터도 아닌 ‘빨간 장미’는 아마도 어머니의 취향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께 국제전화를 걸었다.
“엄마, 혹시 우리 독일에 살기 전에 내가 유치원 갈 때 들고 다닌 빨간 장미 도시락통 아직 있어요?”
“어머, 아마 있을 거야. 부엌 찬장에 있어. 갑자기 왜? 필요하니?”
설마 진짜 있을 줄이야.
“한국에서 책을 쓰게 되었는데 그 도시락통 사진을 좀 찍으려고요. EMS로 좀 보내주실 수 있어요?”
며칠 뒤, 도시락통이 도착했다. 몇십 년 만에 다시 만난 빨간 장미 도시락통.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아서 아무리 유치원생이었다지만 요만큼 먹고 배가 찼다는 게 신기하다.


독일에서 살기 직전에 1년 반 정도 일본 지바현에 있는 가톨릭계 유치원에 다녔다.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매일 들고 다녔다. 내가 좋아했던 반찬은 일본 술의 향취가 조금 나는 달착지근한 계란말이와 닭 가슴살 튀김. 어머니의 튀김은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매일 도시락을 들고 다니게 되었을 때에도 자주 등장한 단골 메뉴다. 한국인들의 술안주처럼 닭다리 살을 육즙 가득히 튀겨내지 않고, 밑간한 닭 가슴살에 녹말을 골고루 묻혀 가늘고 길게 자른 김으로 감싸 바싹 튀겨낸다. 가끔 어머니의 김말이 튀김을 추억하며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려 해도 도시락을 싸야 하는 바쁜 날에는 튀김에 김을 말기가 귀찮아진다.

우리 집 도시락은 언제나 어머니가 싸주셨다. 여섯 남매의 장녀였던 어머니는, 천방지축인 나를 혼낼 때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사남매의 도시락을 매일 만들었단다.”
‘흥,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고요. 그런 건 이제 자랑거리도 아니라고요. 칫칫.’
이렇게 생각했던 나는 얼마나 불효녀였는지. 어머니의 도시락은 호화롭게 보일 뿐만 아니라 도시락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만족시키고 있었다. 그 작은 공간을 근사한 예술 작품으로 바꿔놓은 어머니의 도시락. 게다가 맛있기까지 했다. 유치원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먹는 즐거움으로 점심시간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가끔씩 셰프인 아버지가 도시락을 싸주실 때도 있었다. 저녁 때 남은 반찬을 도시락 반찬에 솜씨 좋게 활용하는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만들기 간단한 주 메뉴 한 개로 도시락을 싸는 스타일이다. 주먹밥을 싸주실 때도 도시락을 열어뢺면 거대한 주먹밥 한 개가 덩그러니. 남자다운 도시락이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남자답기 때문에 이렇게 만드신 것은 아니다. 나도 요리 교실을 열고부터는 아이들의 도시락이나 수제 간식을 대충 만들어줄 때가 많다. 물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도시락 뚜껑을 열면 주변 친구들이 “이야, 맛있겠다!” 하고 감탄하여 자랑스럽게 만들어주고 싶다. 영양을 듬뿍 담아주고 싶다. 하지만 아침부터 도시락 만들기는 번거롭다. 밖에서는 남들을 위해 요리하는 아버지도 분명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25년 전 ‘셰프의 도시락’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대학 수험일. 그날 내가 들고 간 도시락은 아버지가 만드신 셰프 특제 도시락이었다. 수험 당일 아침이라 도시락 메뉴까지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어떤 도시락이라도 상관없었다. 아버지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방에 챙겨 넣고 수험 장소인 여대까지 갔다. 오전 시험이 끝나고 드디어 점심시간. 아무리 긴장했을지라도, 아무리 아버지의 도시락일지라도, 어떤 반찬이 들었을까 설레는 기분은 매한가지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짜잔, 뚜껑을 열었다. 오각형의 뚜껑을 열자 눈에 들어온 것은 도시락 한가운데 새까만 김으로 싸인 삼각형 주먹밥 두 개. 주먹밥 주위로 한겨울이라 매우 값비쌌을 새빨간 딸기가 하트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너무나 창피했다.

주변 다른 수험생들의 도시락을 슬쩍 보고는 곧바로 뚜껑을 덮어버린 기억이 난다. 집으로 돌아와서 도시락통을 후다닥 씻으며, 얄미운 아버지께는 도시락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마도, ‘가고 싶은 대학의 시험이니까 먹기 쉬운 주먹밥이랑 딸기를 한 손으로 먹으면서 점심시간에도 마지막으로 점검하라’ 하는 뜻이었을 것이다. 값비싼 딸기는 아버지의 진심이 담긴 응원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심시간의 충격 탓이었는지 그 여대 시험에는 떨어졌다.

작년에 둘째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체육관과 급식실 리노베이션 공사로 3월부터 7월까지 도시락을 쌌다. 난생 처음으로 매일 아침 도시락을 쌌는데, 손에 익자 적당량을 기억하여 어머니처럼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을 척척 싸줄 수 있게 되었다. 소고기 덮밥을 싸간 날은 학급 전체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달걀로 부드럽게 감싼 소고기 덮밥이 학부형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난 것이다. 학교나 길거리에서 학부형들과 마주치면 “우리 아들이 그러던데, 지훈이가 싸온 소고기 덮밥에 든 소고기가 진짜 맛있었대요. 지훈이가 1등급 한우로 만든 일본식 덮밥이라고 했다던데, 도시락에 한우라니 굉장하네요! 나중에 그 덮밥 만드는 법 좀 알려줘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깜짝 놀랐다. 대충 만든 도시락이 그렇게까지 입소문이 날 줄이야. 사실은 우리 아들이 거짓말을 했다. 마침 한국에 미국산 소고기가 재수입된 시기여서 “오늘은 지훈이가 좋아하는 소고기 덮밥이야. 어제 마트 가니깐 미국산 소고기가 있더라고. 맛있을 거야” 하고 정확히 ‘미국산’이라 말해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친구들이 맛있다, 한입 더 줘, 하며 소란을 피우자 자기 도시락을 더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엄마인 나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아들의 명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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