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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묵묵히 요리 열중하는 아버지 뒷모습은 지금 봐도 멋져요

『셰프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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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이들은 잘못한 게 없는데 내 말투에는 가시가 돋쳤다.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들은 엄마가 정성껏 만든 일식보다 양식이 더 좋다고 한다. 왜 그럴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정훈이랑 지훈이가 생각하는 ‘엄마おふくろ의 맛’은 어떤 요리야?”
엄마는 일본인이지만 아빠는 한국인인 데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두 달밖에 안 다닌 우리 아이들의 일본어는 조금 어설프다. 그래서 한국어에도 있을 법하지만 한국어로 똑같이 옮기면 어색해지는 일본어가 내 입에서 나오면, “‘엄마의 맛’이 뭐야?” 하고 되묻는다. “‘엄마의 맛’은 말야, ‘おふくろ’가 한국어로 ‘엄마’란다. 엄마가 자주 하는 요리 중에서 이거야말로 엄마표 요리다! 하는 맛이나, 먹으면 엄마가 생각나는 맛이 바로 ‘엄마의 맛’이야.”

알기 쉽게 설명하자, 초등학교 6학년생 둘째 아들의 대답은 “으음, 나는 명란젓 스파게티랑 라자냐랑 토마토소스 펜네랑 콘 수프” , 중학생 첫째 아들은 “나는 로스트비프랑 매시드 포테이토, 라자냐” 라고 한다.
“아이참, 엄마는 일본 사람이잖아. 가쓰돈이나 미소시루나 니쿠자가는 생각 안 나? 꼭 이탈리아 엄마 같잖아. 좀 더 생각해봐.”

사실 아이들은 잘못한 게 없는데 내 말투에는 가시가 돋쳤다.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들은 엄마가 정성껏 만든 일식보다 양식이 더 좋다고 한다. 왜 그럴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하, 콘 수프나 파스타, 로스트비프가 아이들에게 ‘엄마의 맛’으로 인식된 까닭은, 아마 내 혀가 프랑스 요리 셰프였던 아버지께 배운 ‘아버지의 맛’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만든 라자냐나 로스트비프가 진심으로 맛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일들을 생각하며 멍하니 있는데, 옆에 있던 작은 아들이 “엄마, 라자냐 언제 만들어줄 거야?” 라고 한다. 또 라자냐다.

아버지는 프랑스 요리 셰프다. 매우 정정하셔서 지금도 아침 8시에는 검은 바지에 하얀 요리사 복장으로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의 일터로 향하신다. 아버지는 유유자적 연금 생활을 하여도 좋을 나이인 예순다섯에, 메뉴에 없어도 주문하면 무엇이든 만들어주는 작은 프렌치 레스토랑을 시작하셨다. 이제 곧 여든인 아버지에게 가게 운영은 엄청난 중노동이다. “내년에야말로 바닷가에 살면서 낚시라도 하며 한적한 생활을 즐길 테다” 하고 단언하셨다지만 요리사의 혼은 그리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열여덟 살이던 1952년, 일본의 동쪽 해안에 있는 고향 사도섬을 떠나 도쿄 임페리얼 호텔 주방에서 요리 수업을 받고, 프랑스 요리계의 대부 무라카미 노부오 셰프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60년간 요리사로서 외길을 걸으셨다.

“그런데 아빠, 사도섬에서는 정보를 얻기 어려웠던 시절인데 어떻게 도쿄까지 가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려고 하신 거예요?”
셰프, 게다가 프랑스 요리 셰프라는 아버지의 직업에 전혀 흥미가 없었고 진로를 결정할 시기에도 궁금하지 않았는데, 요리로 돈을 버는 입장이 되고서야 처음으로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할아버지한테 프랑스 과자 요리책이 있었는데, 중학생 때부터 그 책을 몰래 보곤 했단다. 나도 언젠가 이런 근사한 양과자를 만들 거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할아버지가 내 꿈을 이뤄주려고 지인을 통해 임페리얼 호텔을 소개해주셨단다. 그때 상경했지.”

어린 시절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였던 나는, 호텔이나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를 꿈꾸는 소녀는 아니었다. 여러 가지 꿈에 욕심내던, 무엇이든 이루고 말리라는 의욕에 넘치는 오만한 열여덟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아버지처럼 요리가 천직이라고 생각하게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세월이 지나, 프로 중의 프로인 아버지께 큰소리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지금부터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아버지를 뛰어넘는 요리사가 되지는 못하겠지. 부엌에서 홀로 묵묵히 요리 준비에 열중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지금 봐도 멋지다.

“호텔에서 수련할 때, 하루에 백 개도 넘는 감자 껍질을 칼로 벗겼단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씀이다. 요리 교실 준비로 고작 감자 열 개의 껍질을 벗기면서 내심 귀찮은 마음이 들 때면, ‘아니야, 이런 일로 귀찮다 해서야 아버지께 면목이 없지’ 하며 잘못된 마음을 반성하고 부엌칼을 바로잡는다. 이때가 바로 마음이 정화되는, 요리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버지는 묵묵히 부엌에서 일하며 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양파를 다지고 소스를 끓이셨을까. 여쭈어본 적은 없지만, 분명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맛없는 작업도 필요한 거란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아빠가 만든 비프스튜야.”
“난 싫은데. 비프스튜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쓰리단 말이에요.”
어려서 꽤 심술궂은 딸이었던 나는, 아버지께 염치없을 정도로 심한 말을 하곤 했다. 사실은 아버지가 만든 ‘전문가의 맛’이 나는 비프스튜가 너무 싫었다. 하지만 부모님 곁을 떠나 해외에서 결혼하여 한창 잘 먹을 때인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된 지금에야, 아버지의 비프스튜를 실컷 먹어두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먹을 때 조금은 속이 쓰리더라도 혀와 위가 녹아버릴 정도로 진한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의 비프스튜에는 데미그라스 소스가 들어가서 깊은 맛이 난다. 데미그라스 소스는 프로 셰프를 목표로 수련 중인 요리사가, 그의 스승이 썼던 냄비 밑바닥에 눌러 붙은 소스를 집게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며 그 맛을 혀로 외웠다는 그럴싸한 이야기가 떠돈다. 레시피가 있어도 습득하기 어려운 소스라는 얘기다.

데미그라스 소스는 소고기 근육과 양파, 당근, 셀러리를 적당히 익히 후 토마토퓌레와 닭 뼈 육수를 넣고 오랜 시간 뭉근히 끓인 소스다. 아버지께 국제전화로 여쭈어가며 몇 번이나 도전해보았지만 결국 헛수고였다.
비프스튜 말고도 또 하나,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메뉴가 있다. 양파와 버섯을 넣은 데미그라스 소스를 끼얹은 오므라이스.
“엄마가 만든 오므라이스는 외할아버지가 만든 거랑 너무 달라. 이상하게 생겼어.”

이유식을 시작하고부터 일본에 가면 셰프가 직접 만든 요리를 먹은 우리 아이들은 내가 만든 오므라이스를 혹평한다. 배가 부른 것이다. 아버지가 만든, 부드럽게 부푼 계란으로 감싼 밥에 데미그라스 소스를 끼얹어 먹는 오므라이스에 비하자면 내 오므라이스는 경쟁력이 없어도 한참 없다. 더 이상 아들들 앞에서 요리 선생님으로서의 자존심을 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음에 친정에 갈 땐 아버지 곁에서 데미그라스 소스를 만드는 법을 확실히 배워야겠다. 물론 프로의 비법도 슬쩍 훔쳐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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