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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우리는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의 또 다른 얼굴, 무채색의 도시에 빛을 입힌다. 역동적인 대도시, 쇼핑의 천국, IT 코리아에서 한 겹, 겉옷을 벗으면 이 땅에서 우리의 '시간'이 보인다. 아프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연도 있다. 저자는 우리가 지친 하루를 기대어가는 도시, 그 너머의 새로운 서울을 들여다본다. 그는 소소한 서울의 모습을 담아낸 한 권의 스케치북으로, 구석구석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이 도시의 이야기와 풍경으로 서울을 다시 말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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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동에 백송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우연히 지하철에서 읽고 있던 책에 나온 사진도 없는 몇 줄의 글이 전부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책의 필자는 백송이 아닌 백송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궁궐터나 절터는 익히 들어보았지만 죽은 나무를 기리기 위해, 그것도 사대문 안 그 비싼 땅에 터를 남겨 놓았다 하니 슬쩍 고개를 드는 호기심은 어느새 원래의 계획도 변경한 채 그냥 내 몸을 이끌었다.
서울여행의 장점 첫 번째! 일상에서 발길 한 번, 마음 하나 돌리면 바로 여행이 시작된다는 것. 거창하지 않은 소소함, 준비물 하나 없이 편안한 그 가벼움이 좋다.
3호선 경복궁역에 내려 큰길을 따라 걷기를 잠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집터를 알리는 큰 표지석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표지석의 안내를 따라 골목길로 접어드니 멀찌감치 나무가 보인다. 저 나무인가 싶어 가만히 다시 보니 향나무다. 백송터였다는걸 상기하자! 담 밖에 나무. 옛 골목이기에 가능한 풍경.
드디어 백송과의 만남.
이 통의동에 있는 백송은 천연기념물 4호였다. 그 중 통의동에 있던 이 백송은 우리나라 백송 중에서도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였다. 높이는 약 16미터에 둘레 5미터의 크기로, 당시 600살로 추정되었다.(하지만 죽고 나서 분석해 본 결과 수령이 300년으로 밝혀진 걸 보면, 우리나라 큰 나무들의 추측수령은 오류가 많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겠다.) 그러나 1990년 여름, 거세게 몰아치던 태풍으로 300살 나무의 삶은 종지부를 찍고 만다.
본시 오래살기 대표주자인 나무가 쓰러졌으니 동네사람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더군다나 천연기념물이 아니던가! 통의동은 위치가 청와대에서도 가까워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관심까지 합쳐져 백송회생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고, 다각도의 회생수술, 치료와 더불어 24시간 나무주변 철통경계에 굿판에 올라온 돼지머리 입에 공무원들이 돈을 물리는 등 나무를 살리기 위한 노력은 안 해본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하지만 2년10개월간의 혼수상태를 끝으로 1993년 끝내 사망판정을 받고야 만다. 세간에는 다음 해에 살아날 기미가 보이던 나무를 누군가가 백송으로 만든 관을 쓰기 위해 제초제를 뿌렸다고 하니, 한쪽에서는 살리려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죽이려 한 이 웃지 못 할 일들이 진정 인간사의 단면에 끼어든 나무의 최후가 아니고 무엇일까.
나무가 죽고 마지막 가는 길에는 ‘터주신목’을 퇴장시키는 의식으로 융숭한 제사상을 차리고 고사를 지냈다. 그렇게 백송은 우리 곁을 떠나갔다.
죽은 백송의 그루터기 옆에는 네 그루의 후계목을 심어 결코 쓸쓸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쩐지 흔한 쌈지 공원 같은 느낌이 없지는 않다. 비록 작은 나무일지언정 한 그루만이라도 고목 그루터기 옆에 심어 놓았으면 조금은 다른 느낌의 기념비적인 장소가 되지는 않았을까? 나무가 자라면 네 그루 모두 함께 있기에는 어차피 좁을 터가 아니던가.
하지만 다가가 살펴보니 후계목이 네 그루가 된 이유를 대강 알만했다. 각각의 소유가 있었던 것. 까다로운 백송이니 생존 확률을 높이려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이름 하나 남기고 싶어 하는 짧은 생의 욕구들. 종로구, 문화재청, 서울시 등으로 쓰인 명찰과 함께 남은 하나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홍기옥, 그는 누구일까?
백송할머니라 불리는 홍기옥 할머니는 근처에 살면서 백송지킴이로 알려져 있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가 못내 이곳을 잊지 못해 다시 돌아오셨다고 한다.
이곳은 들어올 때 보았던 표지석이 말하듯 백송과 더불어 김정희가 살던 집터였다는 걸 빼 놓을 수 없다.
충남예산에서 태어난 김정희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글을 잘 썼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봄이 오면 ‘입춘첩’이라고 해서 한 해의 무사태평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같은 문구를 써 붙이고는 하는데, 추사는 7세부터 이를 써 대문에 내걸었다고 한다.
당시 재상이었던 채제공이 추사의 집 앞을 지나다 이것을 보고는 글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채고 문을 두드려 물었다고 한다. 깜짝 놀란 아버지 김노경이 달려 나와 아들이 쓴 글이라 하자, 채제공이 말하길 “이 아이슴 명필로 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오. 하지만 글을 잘 쓰면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 붓을 잡지 않게 하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후에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서울로 올라온 추사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통의동 백송 옆 월성위궁에 살았다. 결국 채제공의 예언은 적중한 셈인가. 명성을 날렸던 글씨와 금석학, 고증학의 대가 김정희는 말년에 당쟁으로 제주도 유배라는 큰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그 유배지에서 보냈던 시간이 ‘추사체’가 탄생이라는 계기가 되었으니, 인간세상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일까!
골목길을 걸어 나오는데, 향나무가 담 밖에 있던 집 대문에 입춘첩이 보였다. 컴퓨터가 보급되어 당최 손글씨라는 걸 쓰기도, 접하기도 녹록치 않은 요즘. 그 풍경이 까닭 없이 반가웠다. 책장보다 컴퓨터 모니터가 더 익숙하고, 추사체는 고사하고 컴퓨터의 고딕체, 명조체밖에 모르는 우리의 오늘날 풍경. 오늘 일기는 간만에 손글씨로 직접 써 봐야겠다,라는 생각을 모락모락 피워내며 늦게나마 약속장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