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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지─빠져나올 수 없는 집

미로에서 길찾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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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는 일은 두말할 필요 없이 매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현상이든 자아가 투영된 표상이든 피할 길 없는 딜레마(빠져나올 길 없는 미로)라 하든, 언어 밖으로 이주할 수 없는 한 그것은 의미의 흔적을 남긴다.

근거지─빠져나올 수 없는 집

상상하는 일은 두말할 필요 없이 매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현상이든 자아가 투영된 표상이든 피할 길 없는 딜레마(빠져나올 길 없는 미로)라 하든, 언어 밖으로 이주할 수 없는 한 그것은 의미의 흔적을 남긴다.

인간은 오직 “최근의 발명품”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성적 정의라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곳의’ 순간을 몸으로 견딘다. 견디는 방법은 누구도 지시할 수 없는 고유한 영토다. 그리고 그것을 ‘견디는 말’의 층위가 어디인가에 따라 말하는 자 자신만의 유일한 전선이 드러난다.

지구의 시간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매일 밤,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그 짧은 시간 안에는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어제 만난 사내
음료수 병 속에서 터지는 방울들은
꼭 그를 닮았다
구직광고 신문을 집어들고 병점역 안에서
웅크려 앉아 있던 사내
탄산처럼 움찔움찔 시간의 거품들
터뜨리고 있다
그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습성이 남아 있어,
쪽방촌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음료수의 기포처럼 떠올랐다가도 금세 사라지는
사내의 방

하루를 머물기 위해 주머니 속
구겨진 지폐 몇 장으로
겨우 흥정을 해서 꿈자리 이어갈 찰나면,
내일의 아침을 몰고 와 사라져버리는 기포의 방

터질 듯 위태로운 방울들이
입 안에서 압사당하면 사내는
텁텁함만을 남기고 간다
기포는 또 다른 기포를 만들어내는 것

사내는 탄산음료를 마실 때마다
돌아갈 집이 없어 고민하는 발걸음처럼
속이 더부룩하다

-홍선영, 「기포의 방」 전문

탄산음료와 사내는 동일한 표상이다. 시는 언제나 근거지 밖을 떠돈다. 떠도는 자들의 이야기는 궁색하다. 기포가 팡팡 터지는 입 안도 “텁텁함만” 남긴다. 자아의 안이든 세계의 밖이든 무한히 떠돌 수 있는 자는 떠돎을 형식으로 완료한 자들이다.

홍선영(검정고시)의 가벼운 “기포”들은 발랄하거나 발칙하지 않다. 고작 병 속이나 입속에서 갇혀 터뜨려지고 압사당하는, 무게도 없이 무거운 것들이다.

“돌아갈 집이 없어” “구직광고 신문을 집어들고 병점역 안에서 / 웅크려 앉아 있던 사내 / 탄산처럼 움찔움찔 시간의 거품들 / 터뜨리고 있다”.

“구직광고” “병점역” “쪽방촌” “지폐 몇 장” “흥정” 등의 예측가능한 단어들이 “탄산음료”를 닮은 “사내”를 누더기처럼 덮고 있다. 사내는 분노하지도 절망하지도 난제를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딱히 자아니 주체니 할 만한 것도 없다. 노숙에 익숙한 상태를 앵글에 담아 스케치할 뿐이다. 당연히 “속이 더부룩”한 거북함 역시 별로 통점이 만져지지 않는다. 아직 모험적인 도발에 몸을 싣는 법을 모른다.

도대체 어떤 도발도 탈주도 없는 이 정태적인 사내는 누구일까. 관습에 가까운 감각적 표현(탄산음료=사내=기포)이 억압하고 있는 무기력한 존재감을 돌파하기 위해서 단지 “집”만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집”은 혹은 ‘성(城)’은 정착하는 것들의 방어적 경계를 만들어 자유롭게 떠돌 수 있는 공간을 지운다. 떠도는 자들에게 축조된 구조 또는 축적된 재화는 사물과 말이 지나가는 길을 가로막을 뿐이다.

어머니의 손을 펴 퇴적된 지층을 읽는다

적토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태양이
이정표 없는, 수많은 갈림길에 갈림길을 거쳐
해안가 한켠에 닿는다
어머니는 화석처럼 박혀 있다

바다 내음을 곱씹으며 어머니는
호객행위를 한다
전어가 댁보고 펄떡펄떡 뛰네, 두어 마리 데려가

마다가스카르를 유영하는
실러캔스처럼 살아 있는 화석인
어머니는
수평선의 생을 살았고
쐐기문자 같은 굳은살이 그 증거였다

펄떡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어머니의 손바닥에 심는다
수백 번의 지각변동이 있었다는 듯
시푸른 지층이 군데군데 침전되어 있다

어머니의 퉁퉁 불은 손을 모아
말향고래의 포말을 불어넣는다

벌겋게 달아오른 지층 사이에
어머니는 물고기 화석처럼 꽂혀 있다

-김주혜, 「어머니라는 화석」 전문


김주혜(19, 살레시오 여자고등학교)의 「어머니라는 화석」에서 눈에 띄는 “전어가 댁보고 펄떡펄떡 뛰네” “펄떡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 어머니의 손바닥에 심는다”라는 뛰어난 부분적 표현은 나머지 부분의 평범한 진술(마다가스카르를 유영하는 / 실러캔스처럼 살아 있뾽 화석인 / 어머니는)과 과잉된 묘사(수백 번의 지각변동이 있었다는 듯 / 시푸른 지층이 군데군데 침전되어 있다)로 인해 힘을 잃었다. ‘어머니’라는 오브제는 경험과 선험 양쪽 모두에서 압도적인 정서를 유발시킨다. 그만큼 자유롭기 어렵다.

나르시시즘과 겹쳐진 원형성은 이상화되거나 절대화됨으로써 실체를 과장하게 한다. 어머니나 혈족과 같은 정서적 덩어리들과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재구성되거나 재배치하는 일은 이데올로기화된 ‘문명’이나 ‘인간’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는 일만큼 힘들다.


해안가 한켠에 닿는다
어머니는 화석처럼 박혀 있다

-김주혜, 「어머니라는 화석」 중에서


어머니에 대한 아픔을 통제하면서 아픔을 느끼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성공한 시는 아프기도 하지만 그래서 아름답다.

혈흔이 되어 스며든 오후가
우울하게 욕실을 서성거립니다
눅눅한 팬티를 갈아입고
불 꺼진 욕실에 쭈그려 앉은 어머니

언제나 솔직해지던 욕실
늙은 곰팡이가 문턱을 오르고
입었던 팬티를 비비고 있는 어머니의 손
머릿속에 줄 지은 건물처럼 들어선
젊은 시절을 주물러봅니다

까칠한 수돗물이 대야에 차오르고
주름이 날카로운 빨랫비누가
팬티에 붉은 자국을 문지릅니다

거품 속에서 흔들리는 어머니의 무늬들

걷은 소매까지 밀려드는 우울의 바다
대야에 차가운 물처럼 채워진 허전함
어머니는 팬티를 비틀어봅니다
제 몸을 비트는 폐경기
오후가 지나갑니다

-박은지, 「주무르다」 전문

박은지(19,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의 「주무르다」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견된다. “입었던 팬티를 비비고 있는 어머니의 손” 같은 실감은 마지막 연의 “걷은 소매까지 밀려드는 우울의 바다 / 대야에 차가운 물처럼 채워진 허전함 / 어머니는 팬티를 비틀어봅니다 / 제 몸을 비트는 폐경기 / 오후가 지나갑니다”와 같은 맥 빠진 결론에 이르고 만다. 시는 ‘묘사되기보다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어긋남 혹은 불협화는 질서를 전복시킴으로써 알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칠레의 파블루 네루다는 시는 보이지 않는 등 뒤 “저 너머”에서 온다고 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만져지지도 않는 곳에서 찾아오는 시는 그래서 현실을 돌파해 그것들을 우리의 감각과 지각 앞에 펼쳐놓는다.

엉엉 울음 끝
먼 마다가스카르 수평선을 본다

어느새
시뻘건 일몰
어서어서 앞과 뒤 캄캄하거라

-고은, 「인도양」 중에서


고은 특유의 구어와 문어가 뒤섞인 어조에 “엉엉 울음 끝”과 같은 통사의 질서가 깨어진 시구가 일견 당혹스럽다. 무엇보다 마지막 연까지 다 읽어도 도통 형상화된 분명한 이미지가 포착되지 않아 공허해진다.

칠천 톤 급 참치잡이 원양어선을 타고 인도양을 가로지르며 고은이 마주친 세계는 이미 언어가 아닌 광막함과 텅 빔이다. 풍경 그 자체로 탈형상화된 공간에서 무슨 내용이 가능하겠는가.

텅 빈 긴장의 극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엉엉” 우는 일이며 더 깊은 미지로 들어서기 위해 “어서어서 앞과 뒤 캄캄하”라고 외치는 일뿐이다.

그러나 고은의 즉시성을 넘어서는 폭발적인 욕구는 관능적인 네루다의 리듬감이나 보들레르의 축조된 이미지(地圖와 版畵를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 宇宙의 넓이는 그의 廣大한 食慾과 같으니, / 아, 램프 빛 밑에서 世界는 얼마나 큰가!─보들레르, 「航海」 중에서)와는 크게 다르다. 고은은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세계) 그 너머로 ‘뛰어 들어간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쾴라 다 지워버리기(寂滅을) 위해서.

하지만 이런 적멸은 그저 지향 그 자체일 뿐 그 너머에는 초월도 적멸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달 불가능을 인지하게 하는 ‘혼돈의 표지’만 있을 뿐이다. 지배적인 문명(과학과 기술 정치와 경제)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기 위한 상상의 독트린이 ‘인간’에 대한 통념에 이르기까지 확산되고 있다. 국가나 민족, 트렌스젠더나 동식물과의 만신론적 교환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의 무한질주가 계속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존재 보편의 근원에 대한 자유는 미세하고 국지적인 ‘지금, 이곳의’ 크고 작은 온갖 상처와 딜레마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전선이 없이는 그 역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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