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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에서 먹은 오리고기

라르페주 L‘Arp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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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레스토랑에서 웬 고기 요리? 이게 무슨 제안이지? 난 여기 단골이 아니다. 아니, 다림질도 안 된 면바지를 입은 동양 여자. 그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손님은 아닐 테다. 그냥 주는 걸까? 아니면 돈을 내야 하는 걸까? 요리 하나 잘못 시키면 한 달 방세가 날아가는 곳.

 
유럽 맛보기
김보연 글,사진 | 시공사
유럽의‘진짜’음식들이 보여준 특별한 맛 이야기 세계적인 스타 셰프의 감동적인 코스 요리부터 소박한 보통 사람들의 손맛 담긴 음식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진짜배기 음식을 찾아 유럽 곳곳을 누빈 고군분투 미식 여행의 기록. 겉보기엔 우아하지만, 실제로는 고생바가지였던 저자 김보연의 유럽 맛 기행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찾아 떠난 여행이 아니었다. 유럽 땅에서 자라고 그곳의 물, 바람, 시간이 만들어낸 그곳의 음식들, 그곳 사람들의 장인 정신이 담겨 있는 소울 푸드에는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감동, 이야기가 있었다.
앵발리드 근처, 고급 슈트의 옷자락 소리가 삭막하게 스치는 조용한 동네를 가로지른다. 이곳에는 육고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파리에서 가장 호사스런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 라르페주(L‘Arpege)가 있다. 아는 사람만 찾아오라는 것인지, 도무지 드러나지 않는 그 입구를 어렵사리 찾아내어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총 8가지의 코스를 맛보았는데 순무, 샐러리와 같은 제철 채소에 가리비, 굴과 같은 해산물을 응용한 싱그러운 음식들이 나왔다. 그중 비트 뿌리를 게랑드 소금으로 간을 해 통째로 익힌 요리와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샐러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명성에 비해서 ‘이것이다’ 싶은 것은 없었다. 요리의 맛보다는 자연에서 그대로 건져 낸 빛깔들에 감탄했을 뿐이다.

두어 시간이 지나고 이제 치즈와 디저트가 나와야 할 때쯤이었다. 백설 공주처럼 유난히 창백한 얼굴의 남자 종업원이 다가와서 내 귀에 소곤댄다.

“혹시 오리고기를 좀 드시겠어요?”

채식 레스토랑에서 웬 고기 요리? 이게 무슨 제안이지? 난 여기 단골이 아니다. 아니, 다림질도 안 된 면바지를 입은 동양 여자. 그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손님은 아닐 테다. 그냥 주는 걸까? 아니면 돈을 내야 하는 걸까? 요리 하나 잘못 시키면 한 달 방세가 날아가는 곳. 그러나 대놓고 ‘그거 공짜예요?’라고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이미 나의 얼굴에는 ‘나 정말 배불러요’라고 쓰여 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은밀한(?) 제안에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괜히 욕심부리지 말고 웃으면서 정중히 사양해야지. 배도 부르니 명분이 있다.

“괜찮습니다. 배도 부르고요.”

그런데 평생 부탁 같은 건 안 할 것처럼 보이는 그 백설 왕자 종업원이 다시 귀에 대고 속삭인다.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이에요. 꼭 먹어 보아요.”

큰 키에 허리를 구부리고, 아주 조금이라고 손가락 두 개로 ‘요만큼’이라는 모양까지 지어 주며 다정히 속삭인다. 이제는 더 이상 거부할 재간이 없다.
그래, 포기다.

“네, 주세요.”

배가 부르면 미뢰는 게을러진다. 웬만한 자극에는 꿈틀대지 않는다. 꼬박 두 시간 동안 그렇게 먹었는데 이제 천상의 요리가 내 코를 간질이고, 입안에 들어온다 해도 별 느낌이 없을 것이다.


잠시 후 보랏빛 같기도, 적색 같기도 한 소스에 잘 구워진 고기 한 토막이 나왔다. 배불러 남긴 떡볶이 깨작대듯,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아주 조금 잘라 보았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간다.

그런데 입안에서 달달한 꽃향기가 피어난다. 어릴 적 쪽쪽 뽑아 먹었던 샐비어(사루비아) 꼭지의 맛 같기도 하다. 아니, 이건 좀 더 황홀하다. 이국적이다. 원시적이다. 남태평양 어딘가 고갱의 그림 속 타히티 여인들이 머리에 꽂고 있는 꽃. 바로 그 노골적이리만큼 찬란한 꽃밭에 코를 묻고 맛을 본다.
궁금해 참을 수 없다. 은밀한 제안(?)에 왠지 가까워진 것 같은 그 웨이터에게 물어본다.

“이게 뭐예요?”
“이비스퀴스*예요.”
“이비스퀴스요?”

그런 건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게 뭔가요?”
“꽃이에요.”

머릿속에서 더듬어 본다. 어떤 꽃일지……. 그러고 나서도 호기심을 멈출 수 없어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유난히도 잎이 크고 농염한 이국적인 꽃. 하와이의 여인들이 머리에 꽂고 춤을 추는 꽃이기도 하단다. 그걸 바라보며 코를 푹 박고 냄새를 맡는다. 입안에서 켜켜이 피어난다.


*이비스퀴스 히비스커스(Hibiscus)의 프랑스식 발음. 꽃이 크고 색깔이 분홍, 빨강, 노랑의 진한 색을 띠는 열대성 식물. 200여 가지도 넘는 종류가 있으며 우리나라의 무궁화도 그 일종이다.

라르페주 L‘Arpege
프랑스 유명 셰프 알랭 파사르(Alain Passard)가 이끌어 나가는 곳으로, 1996년 이후 꾸준히 미슐랭 3스타를 유지하고 있다. 생선, 해산물 요리도 선보이지만 특히 야채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서 직접 재배하는 다양한 야채들로 창의적인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파리에서 음식과 와인이 가장 비싼 레스토랑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의외로 인테리어는 소박한 편이다.

주소 84 Rue de Varenne, 7e
전화 01 47 05 09 06
오픈 월~금요일 12:30~14:30, 20:00~22:30
예산 점심 코스 요리 120유로, 저녁 코스 요리 250유로 이상
교통 지하철 Varenne역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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