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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남을 통해 유지되는 글쓰기

미로에서 길찾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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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어디에도 지속되는 확실성이란 없다. 앞서 말한 레나 크론의“우리가 현실(reality)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유된 꿈(shared dream)에 불과하다”는 푸코식 인식이나 이민주(19, 부산 장안 제일고등학교)의 ‘질문이 없는 세계’는 매우 흡사하다.

어긋남을 통해 유지되는 글쓰기

이번에 필자가 받아본 작품들은 한국작가회의가 해마다 개최하는 전국 백일장의 수상작들이다. 16회 백일장에서 뽑힌 장원 작품(시: 홍선영, 「기포의 방」, 산문: 이민주, 「신성모독」)을 포함한 5편의 산문(홍성훈, 「치유할 수 있는 것」 / 김하은, 「고물상으로 오세요」 / 송민선, 「글라이더」 / 김혜영, 「고문(Go Moon)」 / 장산, 「내 머리에 총을 겨눈, 이름 모를 강도에게」)과 5편의 시(반진영, 「거꾸로」 / 김희정, 「개막 전 무대」 / 김주혜, 「어머니라는 화석」 / 박은지, 「주무르다」 / 박예솜, 「폼페이, 2010」)가 그것들이었다. 신뢰할 만한 문학단체가 주관한 백일장에서 뽑힌 예비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즐겁기보다 작품들이 이룬 성취와 관계없이 짜증스럽다. 백일장이라니.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는 자리가 너무 진부하고 형식적이어서 그렇다.

제도권 교육의 데이터베이스를 통째로 박차고 나올 대범한 정신들을 마중하기에 백일장이라는 콘테스트는 지나치게 상투화되었다. 신춘문예가 그러하듯이.

연중 내내 아무 제약 없이 작품을 받아 깊고 공정하게 읽는 노력은 선배 세대의 몫이다. 한창 각광을 받는 일선의 젊은 작가들이 텍스트를 통해 위, 아래 세대를 아우르는 일은 상업화에 포위되어 한없이 초라해져가는 문학 공동체의 체력을 강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시절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명천 이문구 선생은 작가의 역할은, “작품을 잘 쓰는 일과 좋은 작가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했다. 자본을 매개로 현실의 상업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열화된 불건강한 문학생산의 지형을 바꾸는 일은 비상업적인 헌신성과 자기 존엄성을 회복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신성모독」은 원고지 10여 매 내외의 짧은 이야기다(아마 제한된 시간을 주고 현장에서 글을 완성하게 하는 백일장의 조건 때문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보고 듣고 만져지는 현실, 즉 감각과 지각으로 체험된 세계를 충실히 재현하는 전통적인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 〈아바타〉 돌풍을 비롯해 각종 게임의 스토리와 캐릭터들이 무제한으로 소비되는 현실에서 이를 ‘재현’하는 글쓰기란 대중들의 욕망을 거스르는 불편한 방식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발명하고, 자신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놓은 대상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환유’의 글쓰기 역시 대량으로 ‘소비’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대중들과 상업미디어들은 좀 더 쉽고 직접적으로 대중들이 개입하고 주체로 참여하는 기술적인 제품들을 요구한다(생각하게 하기보다 생각보다 빠르게 기능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물화). 문학은 어떤 경향성과 관계없이 대중들의 이런 키치적 요구를 문자형식으로 수용하기 어렵다. 대중들의 욕망에 편승하기보다 불편하게 도발함으로써 겨우 존재증명을 해가는 것이 현대소설이다.

대중을 욕망하면서 동시에 거부하는 분열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상상하는 이같은 서사의 전략에 대해 핀란드의 작가 레나 크론은 “예술은 결국 놀이(play)와 논리(logic)의 교차점이다”(「중앙일보」 2010. 6. 1, 신준봉 기자와의 인터뷰 ‘세계 문학은 지금 ④ 핀란드 소설가 레나 크론’ 중에서)라고 말한다.

분명 내가 알던 그 사람의 얼굴이 맞는데 하룻밤 사이에 이름이 바뀌거나, 가족관계가 달라지거나 했다. (……) 누구도 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들이나,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 모든 기억은 나에게만 존재했다.

(……)

다음부터는 꼭 유성잉크를 준비해둬야지. 혀를 끌끌 차며, 자신이 엎지른 물에 이미 손쓸 도리 없이 푹 젖은 원고지를 응시한다. 창조주는 미련이라도 남은 것인지, 마음에 들지 않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제거했던 지우개와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투입시켰던 펜을 쓰다듬어본다.

-이민주, 「신성모독」 중에서


현실의 어디에도 지속되는 확실성이란 없다. 앞서 말한 레나 크론의 “우리가 현실(reality)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유된 꿈(shared dream)에 불과하다”는 푸코식 인식이나 이민주(19, 부산 장안 제일고등학교)의 ‘질문이 없는 세계’는 매우 흡?하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했던 일들도 알고 보면 타의였는지도 모르지.” (이민주, 「신성모독」 중에서)관리되는 ‘현실(reality)’은 나의 주체성이 발휘된 나만의 세계조차 실은 나의 것은 아니라고 깨닫게 한다. 결국 이민주의 세계는 자신의 몸마저 지워버린다.

이민주의 서사정신은 자신이 만든 서사(유토피아)와도 관계 맺을 수 없는 극단적인 ‘어긋남’을 통해, 즉 발칙한 신성모독의 장난(play)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다. 미로에서 길을 찾기 위해 길을 잃어버리는 방식을 택하는 이민주가 이런 인식 속에 어떤 캐릭터를 살게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끝없이 강화된 주체의 외부는 없다. 한없이 주체가 확장되다보면 세계는 곧 나 자신이 되어버린다. 나는 누구와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럴 때 나란 나일 수 있을까. 환유와 현학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의 몸을 놓쳤을 때 아무것도 모독할 수 없다. 모든 딜레마는 곧 출구다.

장산(17, 고양 예술고등학교)의 「내 머리에 총을 겨눈, 이름 모를 강도에게」는 변화도 실감도 없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총구를 머리에 겨누던─강도를 찾아나서는 인물의 독백이다. 전형적인 마조히즘(masochism)의 경로를 보여주는 발상이 돋보인다. 하지만 장산이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수치와 모욕을 통해 확인되는 존재감이 일방적인 자기연민이나 감상에서 비롯된다면 너무 빤한 아이디어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억압의 실체에 접근하는 일이 “카운터기의 버튼을 누르면 서랍이 불쑥 튀어나오”(장산, 「내 머리에 총을 겨눈, 이름 모를 강도에게」 중에서)는 정도의 묘사만으로 얻어지지는 않는다. 고통을 자초할 만큼 자신의 삶을 사랑했을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숨겨진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예정된 상황 속의 고통만 있고(닫힌 공간=일상) 그것들과 부대끼는 구체적이고 사소한 순간과 그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인물들의 어찌할 수 없는 움직임이 없다. 이같은 요소들을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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