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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같은 라인업에도 침묵한 관객들

어느 음악팬의 유럽록페스티벌 정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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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의 입장권은 팔찌다. 대부분은 페스티벌이 끝난 후 팔찌를 떼어버리지만 그의 손목에는 한 주 한 주가 지나갈 때마다 팔찌가 늘어갔다.

(본 내용은 “여자 관객에 맥주 투척해도 환호하는 축제?” 와 이어집니다.)


페스티벌의 입장권은 팔찌다. 천이나 플라스틱, 비닐로 만들어진 팔찌가 페스티벌 행사장 안에서의 신분증이다. 대부분은 페스티벌이 끝난 후 팔찌를 떼어버리지만 그의 손목에는 한 주 한 주가 지나갈 때마다 팔찌가 늘어갔다.

락암링을 시작으로 블루스 페스티벌을 거쳐, 그다음 주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하드록콜링 공연에서 폴 매카트니의 무대를 봤다. 음악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소망할 수밖에 없는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말이다.

자신의 솔로곡뿐 아니라 비틀즈의 명곡들을 폴 매카트니는 불렀다. 마지막 곡으로는 당연하게도〈Hey Jude〉를 불렀다.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그 노래를 합창한 건 당연한 일. 아무리 비틀즈라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그 옛날의 뮤지션이 모든 세대에게 지금껏 사랑받는 경우가 있었던가. 그만큼 훌륭한 뮤지션이 없었기 때문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지나간 것의 가치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또한 자국의 과거문화에서 계속 새로운 뭔가를 창출해나가는 영국의 문화 때문이다. 그 안에서 혁신과 갱생이 이뤄지고 또한 옛것과 새것이 하나로 연결된다. 그렇게 권위를 획득한 예술인은 기꺼이 까마득한 후배들과 함께 공연하며 영국의 대중음악에 창작자의 깃발을 세워왔다. 불과 10년 전의 유명가수가 한 세대만 지나면 이름조차 낯선 이 땅의 문화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말로만 전통이 있는 곳과 전통이 실재하는 곳의 차이다.

물론 여행 내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희로애락의 축소판이 여행일진데,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안 좋은 순간들이 있는 게 인지상정. 잉글랜드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찾아간 벨기에가 바로 그랬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근처에서는 록 베르히터(Rock Werhiter)라는 페스티벌이 열린다. 보통 유럽 페스티벌은 금?토?일, 3일간 열리지만 이 페스티벌은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만 개최된다. 그런데 라인업이 최강이다. 올해는 그린데이, 뱀파이어 위크엔드 등이 출연했고 록 베르히터의 이름이 전 세계 음악팬들에게 알려진 2008년의 경우는 라디오헤드, 시규어 로스, 벡, 메탈리카…… 세계 최강의 라인업을 자랑했다.

인구도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적고 딱히 록의 강국도 아닌 벨기에에서 이런 괴물 같은 라인업이 가능한 건 두 가지 이유다.
첫째, 벨기에가 차지하는 지형적 요인이다. 서유럽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벨기에의 특성상 이런저런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뮤지션들이 중간 기착지로 왔다갔다거리는 데 불편함이 없어서다. 또 하나는 록 베르히터가 벨기에 정부의 국책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페스티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티켓값만 받고도 세계적인 뮤지션들을 부르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전통이 없기 때문일까. 록 베르히터는 그에게 가장 실망스러운 페스티벌이었다. 앞서 말한 ‘페스티벌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관객들은 침묵했다. 밴드들이 애써 호응을 유도해도 객석에서의 반응은 1분을 채 가지 않았다.

조용하기로 소문난 일본관객들조차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으니, 뱀파이어 위크엔드가 결국 “이건 페스티벌이야! 제발 좀 놀라고!”라고 노골적으로 외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르히터에서는 도둑도 맞았다. 누가 그의 자전거 가방을 훔쳐간 것이다. 벨기에 경찰의 불친절함과 나 몰라라 하는 분위기가 여행 최악의 상황에 불을 지폈다.

이런 불유쾌한 기분은 그러나 불과 다음 주, 즉 7월 초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린 T 인 더 파크(T In The Park)에서의 감동이 싹 쓸어갔다. 글래스톤베리, 레딩 페스티벌과 함께 영국의 3대 페스티벌이자 스코틀랜드 최대의 페스티벌인 T 인 더 파크는 그에게 ‘지역공동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재정의에 다름아니었다. 철저히 스코틀랜드 사람들 위주로 집객이 됐고, 그 어느 페스티벌보다 활기찬 페스티벌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벅차게 했던 건 마지막 날 헤드라이너였던 카사비안의 공연이 끝난 다음이었다. 앙코르를 요청하는 10만 관객 앞에 나타난 건 밴드가 아닌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백파이프 연주자였다. 그는 말없이 스코틀랜드의 국가를 연주했다. 여느 나라의 페스티벌이었다면 야유가 쏟아지거나 잘해야 냉담한 반응이 나왔을 테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오히려 더 큰 함성과 함께 모두가 국가를 합창했다.

한편으로는 전체주의로 볼 수도 있겠지만 스코틀랜드인의 긍지를 상징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 긍지가 월드컵에 ‘영국팀’이 아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즈로 나뉜 팀들이 출전하게 하는 힘이 아닐까. 국가라는 이름에 앞서는 지역공동체 의식 말이다. 그가 그전, 그리고 그후에도 이어진 록페스티벌 투어에서도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장면이다.


그후에도 이런저런 페스티벌을 거쳤다. 유럽으로도 모자라 일본으로 건너와 한국에도 잘 알려진 후지 록페스티벌과 일본 뮤지션들만이 출전하는, 그러나 일본 최대규모의 페스티벌이기도 한 록 인 저팬까지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근 석 달에 이르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귀국한 그날, 그를 만났다. 지금까지 쓴 내용은 모두 그날 밤 그의 입에서 멈춤 없이 쏟아진 이야기들이다. 팔뚝에는 팔찌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머리는 석 달 사이 산발이 됐으며 수염도 텁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로큰롤 야만인의 외모로 돌아온 그에게 무엇을 얻었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의 눈빛과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거로 도시와 도시를 이용하며 나눴을 육체와의 대화, 그리고 수많은 페스티벌을 거치며 쏟아졌을 아드레날린이 거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피곤함도 모르고 그는 연신 소주를 털어넣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 여행을 끝마친 후, 그는 본래 귀농을 할 생각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유기농 및 공동체 농업을 배우고 돌아와 한국에 씨를 뿌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여행은 그런 생각을 싹 날려버렸다. 일찍이 일본의 공연문화를 체험할 때부터 가졌던 한국 공연산업의 미흡함을 기초부터 고쳐보겠다는 욕심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귀농이 막연한 동경에서 파생된 소박한 계획이었다면, 그의 새로운 욕심은 여행의 아드레날린과 사색이 만들어낸 구체적인 계획인 셈이다.

여름의 유럽에서 한국 관광객을 만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대학생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왜 여행을 하는가를 물어보면 선뜻 대답을 못 한다. 많은 여행자들이 유명한 관광지를 후딱 돌아다니며 최대한 짧은 기간 안에 최대한 많은 곳을 다니겠다는 목표뿐이다. 그래서 “20대가 여행을 가면 사진을 남긴다”라는 말이 나오나보다.

육체의 힘이 유일한 동력원인 자전거를 타고, 록페스티벌이라는 자신만의 목표로 유럽과 일본을 일주한 그의 여행은 그래서 특별하다. 하물며, 멀쩡히 10여 년간 잘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출발한 40대의 그것이니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른 여행을 통해 다른 삶의 기로를 마련한 그의 삶은 벌써부터 달라졌다. 비가 와도 기꺼이 홍대에서 잠실을 자전거로 주파하고, 회사생활을 할 때도 여느 40대와 달랐던 여유는 더욱 넘쳐흐른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인생의 최우선 과제였다면 애당초 그런 무모한 여행을 떠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 라는 낙관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태도가 그를 떠나게 했고 포기 없이 끝까지 일정을 완주하게 했다.

묻고 싶다. 10대 때는 대학을 목표로 공부를, 20대 때는 취업을 목표로 스펙을, 30대 때는 내 집 마련을 목표로 재테크를, 40대 때는 은퇴 이후를 목표로…….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매뉴얼대로의 삶과 자신이 쓴 매뉴얼로 살아가는 삶. 무엇이 더 행복한 삶일까. 특별한 자의 영역이라고? 천만에. 그 또한 명문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유별난 존재도 아니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다만, 삶에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했을 뿐이다. 삶, 이라고 쉽게 쓰고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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