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고통을 모르는 인간이 어딨어? 사는 게 고통인데.”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⑦
몰입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것과 얼마나 다른가. 그런 것을 가지고 계절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점점 짙어지는 초록도 예전과는 달랐다. 비 오는 날 젖은 보도블록의 잿빛도 달랐다. 더위조차도 다르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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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것과 얼마나 다른가. 그런 것을 가지고 계절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점점 짙어지는 초록도 예전과는 달랐다. 비 오는 날 젖은 보도블록의 잿빛도 달랐다. 더위조차도 다르게 느껴졌다.
오월 중순부터 덥더니 유월이 되자 여름이었다. 교복 조끼도 마저 벗어들고 계단을 올라왔더니 웬일로 작업실이 비었고 딱 한 명, 낯선 남자애가 그림을 걸어놓은 벽 앞에 서 있었다.
모르는 애였다. 누구지? 설마 새로 들어온 걸까? 마시던 콜라캔을 구기기에 나름 친절해지려고,
“아, 그건 저기 버리면 돼요.”
“알아요.”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 돌아오더니 내가 할 말을 걔가 했다.
“여기, 신입이에요?”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음료수며 아이스크림을 든 것을 보니 견지 형이 애들을 데리고 나가 사준 모양이었다. 초우 넌 늦었으니까 없어, 에이 너무해요, 그런 말이 오가길 기다리고 있는데,
“강강아!”
“어, 규성 오빠 언제 왔어?”
강강이가 반갑게 달려들어왔다. 둘이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언제 왔냐느니 키가 컸다느니 시끄럽다. 뒤이어 들어온 아운이와 경하를 보고서도 아운이 누나, 경하 형! 난리 났다. 태현이랑은 친하지 않은 듯 서로 인사를 안 했다.
나는 멀찌감치 서 있다가 사물함에서 주섬주섬 그림도구를 꺼냈다. 왠지 모르게 좀 기분 나빴다. 계림 언니 말을 들어보니 작업실 다니다가 작년에 유학 간 앤데 방학 때마다 꼬박꼬박 작업실에 온다고 했다. 이름은 조규성,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다.
“견지 형, 이거, 보여주려고 가져왔어요.”
조규성이가 커다란 검은 포트폴리오를 낑낑대며 탁자 위로 올렸다.
“무겁게 이런 건 왜 가져왔냐?”
“형 보여주려고 가져왔다니까요?”
규성이는 겉표지부터 심상치 않은 포트폴리오를 펼쳤다. 다들 몰려들었다.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보지 않을 걸 그랬다. 너무…… 너무 잘했다. 입을 꼭 다물게 될 정도로.
규성이는 그날부터 거의 매일 작업실에 나왔다. 쟤는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왔음 좀 놀고 그래야 될 거 아니야. 친구가 그렇게 없나? 투덜대다가도 규성이가 그리는 그림을 보면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갔다. 나도 더 빨리 시작했다면 저 정도 했을지도 몰라. 비교할 이유 따윈 없는데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지난달에 치른 모의수능 결과가 나왔다.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막상 받아보니까 할 말이 없었다. 1학년 때보다 확 떨어졌다.
“어쩔래, 너.”
담임은 내 성적표를 팔랑팔랑 흔들며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렇게 눈에 보이게 떨어지면 어떻게 해. 요즘 공부 안 해?”
“……화실 다니느라요.”
“예체능이라고 생각하니까 널널해졌어? 공부 더 안 해도 될 거 같아?”
“그게 아니라요…….”
“미술 할 거라고 확실하게 마음 굳힌 것도 아니라며. 너 이러다간 죽도 밥도 못 된다. 알 거 아니야, 네가 생각 없는 애도 아니고.”
“…….”
“두 마리 토끼 다 잡을 거면 진짜 각오하고 해야지. 지금 너 분위기는 그냥 설렁설렁 놀자 같은데?”
나 나름대로 진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노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아니라고 말도 못했다.
작업실에 와서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아서 대충 정물을 그리고 있는데 규성이가 내 옆에 와서 섰다. 픽 웃는 걸 보자 속이 긁혔다.
“미술 전공할 거예요?”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규성이는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그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죠? 몇 학년인데요? 이학년? 너무 늦은 거 아닌가?”
그걸 왜 네가 걱정하니, 말투가 왜 그 모양이니? 틀린 말이 아니어서 더 속이 뒤집혔다. 그리기 싫다. 어떻게든 연필을 움직이고는 있는데 지겹다. 지겨울 때는 그만두는 게 아니랬지. 계속 그려야 한다고 했지. 말은 참 쉽다.
견지 형이 내가 그려놓은 정물 소묘를 보고 하는 말도 곱게 안 들렸다.
“초우 너, 자꾸 네가 좋아하는 식으로만 하잖아. 잘할 수 있는 식으로. 아직 그럴 때가 아닌데.”
평소라면 알았다고 귀담아들었을 텐데 오늘은 섭섭했다. 내 표정이 구겨진 것을 미처 못 본 것일까, 견지 형이 말했다.
“너 이래가지곤 나중에 미술로 대학 가고 싶어도 못 간다.”
“대학이 뭐 ?거예요?”
견지 형 입에서 대학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이 서운해서 큰소리쳤다.
“대학이 별게 아니면, 이백만 고등학생들은 다 뭘 몰라서 그러고 있니? 네가 걔네들과 다른 게 뭔데.”
기분이 더 나빠졌다. 견지 형이 농담을 하고 있는 건지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스케치북을 덮었다. 좀 거칠게 팔이 나갔다. 제풀에 놀라 흠칫 했는데 견지 형은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종이를 가져다가 선긋기를 했다. 쓱, 쓰윽, 연필심이 종이를 가르는 소리. 적당히 힘이 주어진 팔. 지나치지 않은 긴장. 반복. 조금 차분해졌다. 쓰윽, 쓱. 흑연 빛으로 메워지는 종이가 예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반짝반짝 은빛 나는 검은색. 비린 철 내음 같은 것이 났다. 이렇게 무겁고 차가운 색깔인데 사실은 겨우 얇은 종이 한 겹이라는 것이 이상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인체 드로잉 시간이었다. 오늘은 전문모델 없이 애들이 돌아가면서 모델을 서는 날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정샘이 나를 꼽았다.
“초우야, 네가 모델을 서자. 여기서 모델 안 해본 사람 초우 너밖에 없네.”
싫다고 모르는 척하려다가 그냥 하겠다고 일어섰다. 지금은 도저히 그림 그릴 기분이 아니니까 차라리 모델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샘이 방 가운데 의자를 놓아주었다. 이십 분짜리 포즈니까 되도록 편하게 있으라고 해서 등받이에 기대고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십 분, 뭐 별로 길지도 않은데.
앉고 보니 정면에 경하와 태현이가 있다. 어쩐지 불편해서 의자를 돌릴까, 한 오 초 고민했지만 벌써 애들은 그리기 시작했다. 몰라, 눈만 안 마주치면 되지 뭐. 경하와 태현이 사이의 빈 공간을 바라보면서 견지 형이 틀어준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이환이 얼굴 굳었다며 긴장 풀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모델로 서는 것은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모두들 나를 보고 있는데, 또 나를 보는 게 아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야? 무엇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있어? 꼭 태풍의 눈이 된 것 같았다. 바쁜 손과 눈, 긴장된 어깨들이 보였다. 소용돌이치고 있는 힘이 내게 닿았다가 멀어지기도 해, 잠깐 넋을 잃고 보았다. 아니, 느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건데도 곧 허리가 뻐근해지고 어깨가 간지러워서 꼼질꼼질 움직였더니 움직이지 마! 소리가 바로 나왔다. 간질간질. 머리가 간지럽다. 귀도 간지럽고 다리도 저린다. 괜히 다리를 꼬았다, 그냥 똑바로 앉을 것을. 간지러운 것을 잊으려고 속으로 노래도 부르고 숫자도 세고, 속으로만 소리도 질렀다.
몇 시간 같은 이십 분이 지나고,
“여기까지. 수고했다, 초우야.”
저린 다리로 절뚝절뚝 일어나서 애들 그린 걸 죽 보았다. 그 종이 위의 여자애는 나이기도 하고 또 아니었다. 거울 속의 나, 사진 속의 나와는 아주 달랐다. 그건, 나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운이고, 강강이고, 이환이고…… 나를 그린 사람의 모습. 정말 잘 그렸다, 신기해했다가 쑥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그렸다면 절대로 저렇게는 못 그렸을 것이다. 나 자신조차, 나는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
일진이 정말 안 좋기로 작정이라도 한 날이었는지 크로키 다음은 윤샘이었다. 어제부터 한 정물 수채화를 다 했다고 내놓았더니,
“초우 너는 너무 조급해. 구도와 기초를 잡는 데 오십, 진행에 삼십, 마무리에 이십을 들여야 하는데 너는 지금 십만에 기본을 막 해버리고 나머지 시간에 그걸 그럴듯하게 꾸미고 있다고. 기본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데 거기다 더해봤자 뭐가 나오니? 좀 지그시 보고, 지그시 그려보란 말이야.”
윤샘은 처음부터 다시 차분하게 하나하나 밟으면서 그리라고 했다. 이십 분마다 사진 찍어두라며 총무실에서 카메라까지 가져왔다. 언제 다시 하지. 빈 종이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견지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환 너, 그거 오늘 중에 완성 못 하면 집에 가지도 마.”
“정말요?”
이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묘은이 오라 그래야겠다 하는 걸 보니 아예 처음부터 밤샐 생각인가보다. 견지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어, 집에 가.”
“아, 이거 다 그리고 갈 거예요.”
이환의 말에 견지 형은 네 명 이상 남지 않으면 못 남는다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작업실은 열 시 반에 문을 닫는 것이 규칙이고, 그 뒤로 남으려면 네 명을 모아야 했다. 이환은 애들을 설득하느라 있는 애교 없는 애교를 다 떨기 시작했다.
“승목아, 승목아아…… 어?”
목상은 굉장히 귀찮아하는 얼굴로 알았다고 말했다.
“좋았어, 한 명 더! 초우야!”
“저요?”
넋 놓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이거 다시 하기는 해야 하뾽데, 그럼 오늘 밤에 맘 잡고 해볼까. 그러고 보니 성적표도 있다. 그렇구나, 남아버려야겠다.
결국은 지금 없는 묘은 언니도 오기로 하고 네 명이 채워졌다. 이환이 부탁도 안 한 경하까지 남는다고 하자 견지 형은 한숨을 쉬더니 새벽 두 시에 문 닫으러 오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내가 집에 아예 안 들어가겠다고 한 것마냥 뭐어,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총무님이 데려다준댔어요. 어, 여기 아는 언니도 남아요. 나까지 다섯 명. 엄마한테는 아빠가 좀…….”
“전화 줘봐.”
견지 형은 전화를 받아들더니 나긋나긋한 ‘총무’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예, 아버지. 가끔 이렇게 늦게까지 작업을 할 때가 있어요. 제가 두 시에 다들 집까지 태워다줄 거예요. 네, 그렇죠. 그럼요. 그런 일은 없죠, 제가 있는데요.”
그렇게 말해놓고 전화를 끊은 견지 형은 시계를 보더니 자기는 한 시간 뒤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 방금은 있을 거라고 해놓고! 불량 선생.”
이환이 실실 웃으며 말하자 견지 형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이잖아! 앞으론 남을 거면 미리 말해.”
강강이는 못내 남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견지 형한테 내쫓기듯 집에 돌아가고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나갔다.
열한 시쯤, 견지 형이 나가기 직전에 묘은 언니가 들어왔다.
“두 시에 올 거야.”
견지 형은 다짐하듯 말했다.
“너만 믿고 간다.”
“알았어요.”
묘은 언니는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며 대답했다. 이환이 억울해했다.
“형은 왜 나는 못 믿어요.”
“시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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