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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연재] 박영란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⑤

“미키윤수가 진짜 저질인 줄 알았더니 아주 바닥은 아니구나. 하여튼, 내가 언니로서 충고하는데 미키윤수 같은 놈은 절대 사귀면 안 돼,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그렇지만 너무 잘생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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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싼 하숙집은 싼 이유가 있다! 게다가 아이들이란 공동으로 쓰는 물건에 대해서는 낭비가 심하기 때문에 각자 필요한 물품은 각자 사다 쓰도록 한 제임스의 전략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필요한 물건을 각자 사다 쓰게 하다보니 하루에도 몇 명씩 빌리지를 벗어나 파세오 상가에 있는 편의점에 드나드는 일을 감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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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모르지만 갑자기 너무 피곤해져서 나는 데니슨 아줌마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나와버렸다. 예의 없는 아이처럼 보여도 상관없다. 아무튼 빨리 침대에 가서 눕고 싶을 뿐이다.

데니슨 아줌마 앞에서 차마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만약에 내가 서울로 돌아가서 혼자 살게 되거나, 보육원 같은 곳에서 살게 되면, 그렇게 살아서 열여덟 살이 되면 나는 창녀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외할머니와 살게 된다고 해도 외할머니가 내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살아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 더욱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요즘 자주 나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데 내가 아무리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 같은 처지에 빠지면 고슴도치가 되거나 창녀가 되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을 안다. 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직업인 창녀가 된다 해도 겁먹지 않을 수 있도록 미리 마음을 먹어둬야 한다. 창녀라는 직업은 세상에서 아무 보살핌도 받지 못한 여자들이 주로 선택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적어도 창녀들은 세상에 대해 책임이나 의무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래도 세상에 대한 근심걱정이 몰려오면 어쩌지? 그러면 나는 나 같은 처지에 빠진 아이를 열 명쯤 후원해줄 것이다. 절대 입양은 하지 않을 것이다. 창녀가 자기를 입양했다고 생각하면 아이의 장래에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니까 입양은 하지 않고 몰래 후원만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니 내 미래에 대해 두렵지 않다. 하여튼 이 세상에 창녀보다 더 두려운 직업은 없는데, 그 직업을 가졌을 때도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더 이상 나쁠 수는 없는 것이다.

데니슨 아줌마네 집에 다녀온 사이 나는 말썽만 피우는 못된 생활비 체납자가 되어 있었다.
사정은 이렇다. 내가 데니슨 아줌마네 집에 있는 사이 사라인선 언니가 돌아왔다. 그런데 저녁시간에 내가 없자 블랑카에게 내 행방을 물었다. 오직 미키윤수 생각에만 빠져 있던 블랑카는 그때서야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라인선 언니가 내 행동반경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사이 사랑에 빠져 사리분별이 안 되는 블랑카는 벌써 제임스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유니스가 행방불명되었으며, 사라인선 언니가 찾고 있기는 한데, 어쩌면 유니스는 미키윤수라는 아이를 만나러 갔을 수도 있다고 고자질했다. 게다가 그 미키윤수라는 아이는 열여섯 살에 벌써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실 줄 알고, 여러 명의 여자아이와 섹스도 해본 아이라고 엉뚱한 이야기까지 하는 통에 제임스와 사모님이 슬리퍼를 끌고 모넷 가까지 뛰어나와 있던 참이었다.

오! 그래서, 안 그래도 밀린 생활비와 비례해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제임스의 화가 터지는 바람에 나는 모넷 가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체면을 왕창 구기게 되었다. 나는 꼼짝없이 제임스의 설교와 위협과 하소연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 나 같은 아이 때문에 진을 빼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잔소리는 빨리 끝났다. 제임스 말의 요지는 ‘나에 관한 모든 복잡한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안전하게만 있어 달라’는 것이다. 공연히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말고!

제임스와 사모님이 돌아가자 이번에는 사라인선 언니의 차례다. 나로서는 사라인선 언니한테 무슨 소리를 듣건 그것이 다 애정의 발로라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쁘다. 그런데 사라인선 언니의 화는 내가 아니라 블랑카 쪽에 대고 터진다. 이때쯤이면 블랑카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있는 참이다. 공공연하게 자기가 미키윤수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공표해버린 셈이니까.

“너 미키윤수랑 사귀니?”

“아니요!”

“그럼 전에 사귀었었니?”

“몰라요.”

“몰라요, 라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너 혹시 미키윤수랑 키스했어?”

“네.”

“어디서.”

“학교 화장실 뒤에서요.”

거긴 미키윤수의 단골 장소다. 화장실 뒤로 불려나간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다니는 여자아이들도 있다.

“키스만 했어?”

“가슴도 만졌어요.”

“그것도 화장실 뒤에서였어?”

“아니요.”

“그럼 어디서.”

“에디슨 가 빈집에서요.”

“그런데도 사귄 게 아니야?”

“미키윤수가 이런다고 사귀는 것은 아니랬어요. 그냥 연습해보는 거랬어요.”

“연습이라니?”

“나중에 진짜 하고 싶은 여자랑 할 때 잘하려고 연습해보는 거랬어요.”

“뭘 잘하려고 연습해?”

“그거요.”

“그게 뭔데?”

“언니, 정말 그거 몰라요?”

“글쎄 그게 뭔데?”

“언니는 안 해봤어요? 언니도 해봤잖아요. 전에 그 오빠랑도 하고, 요번에 그 오빠랑도 했다는 소문 다 들었어요. 오늘도 그래서 늦은 거 아니에요?”

“휴! 그렇다고 치고, 난 성인이고, 넌 아이야.”

“그게 뭐 어때서요. 미키윤수는 정말 나쁜 새끼예요. 다른 애들하고는 하면서 나랑은 안 하겠대요. 내가 생리도 벌써 터졌다고 거짓말까지 했는데도 못한대요. 나도 미키윤수랑 하고 싶은데, 어른이다, 아니다가 뭐 중요해요? 게다가 미키윤수는 유니스가 좋대요. 유니스가 불쌍하대요. 언젠가 우리 모두 서울로 돌아가면 유니스를 찾아갈 거라고 했어요. 나도 우리 아빠가 나를 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미키윤수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좋아해줄 거잖아요. 어쩌면 오늘 유니스는 미키윤수를 만나고 왔을지도 몰라요. 그래놓고 거짓말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미키윤수가 진짜 저질인 줄 알았더니 아주 바닥은 아니구나. 하여튼, 내가 언니로서 충고하는데 미키윤수 같은 놈은 절대 사귀면 안 돼,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

“그렇지만 너무 잘생겼잖아요.”

“그건 그래. 그게 바로 우리의 딜레마야.”

“딜레마가 뭐예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는 뜻이야. 덫에 걸린 것처럼.”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우리 셋이 무슨 동지라도 된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나마나 나도 미키윤수를 좋아하고 있다. 단지 미키윤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른 누군가가 눈치채면 내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 때문에 숨기고 있는 것뿐이다. 이것이 블랑카와 나의 차이일 뿐 블랑카와 나는 별 차이가 없다. 어쨌든 미키윤수가 블랑카를 떼어낼 목적으로 나를, 내 불우한 처지를 이용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기억해두겠다.

사라인선 언니가 오늘처럼 우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는 처음이다. 내가 깜빡 잊은 것이 있는데 사라인선 언니도 몇 년 전에는 나와 같은 나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나이 역시 데니슨 아줌마나 살라망고 아줌마나 제임스나 사모님에 비하면 무척 어린 나이라는 사실이다.

대단한 어른으로 여겨지던 사라인선 언니 역시 아직 어린 나이이고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디고 있으며, 어쩌면 서울에 좋아하는 남자친구나 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를 두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많은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라인선 언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를 무작정 바람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언니는 사귀는 남자마다 다 진심으로 사귄다. 그렇지 않다면 헤어질 때마다 식빵을 사들고 와서 밤새 뜯어먹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도 며칠씩이나. 누구든 사람의 속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오늘은 나에게 특별히 외로운 날이 될 것 같다. 오늘은 제임스의 하숙집 아이들이 한꺼번에 ‘페스티벌 몰’로 생필품을 사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보호 아래 유학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자질구레한 생활용품들을 각자 알아서 사 쓰게 되어 있다. 샤프심, 공책, 지우개, 초콜릿, 과자, 화장지, 치약, 비누, 생리대 같은 것들이다. 제임스가 아이들 생활을 책임지고 있기는 하지만 마트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다 집에 구비해놓거나 필요할 때마다 사다줄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제임스네 하숙집은 다른 하숙집이나 유학원보다 생활비가 싸다. 그래서 우리 엄마도 제임스네 하숙집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싼 하숙집은 싼 이유가 있다! 게다가 아이들이란 공동으로 쓰는 물건에 대해서는 낭비가 심하기 때문에 각자 필요한 물품은 각자 사다 쓰도록 한 제임스의 전략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필요한 물건을 각자 사다 쓰게 하다보니 하루에도 몇 명씩 빌리지를 벗어나 파세오 상가에 있는 편의점에 드나드는 일을 감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고 마닐라 근처 라구나 지역이기 때문에 서울에서처럼 아이들이 함부로 나다녀서는 안 된다. 어제만 해도 마닐라 근교에서 피살된 한국인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필리핀은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 ‘아부사야프’ ‘신 인민군’ 같은,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반군단체들이 활동하는 지역이다. 확실히 서울과는 다른 환경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한 달에 두 번 모든 식구가 한꺼번에 쇼핑 나가는 규칙을 만든 것이다.

오늘이 바로 그 이 주 치의 물건을 사러 가는 토요일이다. 나는 집에 남아 있어야 한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쇼핑을 가려면 서울에서 생활비 외에 따로 용돈이 송금되어 와야 한다. 그런데 제임스가 가지고 있는 내 계좌에는 몇 달째 엄마 이름이 찍힌 돈이 한 푼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제임스 외에도 사라인선 언니나 블랑카에게 조금씩 갚아야 할 빚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휴지나 치약이나 샴푸가 다 떨어진 지 한참 되어서 매번 블랑카나 사라인선 언니 것을 쓰고 있다. 이를 닦는 일과 머리를 감는 일에도 이렇듯 매번 돈이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활이나 생활비라는 말은 정말 무섭다.

블랑카는 가끔 싫은 내색을 하지만 사라인선 언니는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블랑카는 아직 버려져본 경험도 없고, 생활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 처지를 몽땅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까 블랑카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블랑카는 아직 철없는 어린애에 불과하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사라인선 언니 같은 사람은 국제아동기구 같은 데서 일하면 좋겠다. ‘마더 테레사’처럼 희생하지는 못하겠지만 ‘제인 구달’이 원숭이들을 사랑하듯 아이들을 사랑해줄 것이다. 그런데 사라인선 언니는 치과의사가 되려고 하니 아깝다. 뭐, 그래도 할 수 없다. 인재를 놓치는 쪽은 내가 아니라 국제기구니까. 사라인선 언니가 의사가 된다 해도 돈만 밝히는 치과의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분명하다.

어쨌든 오늘은 혼자 빌리지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학교 가는 날에는 아이들 중에서 혼자 빌리지에 남겨졌는데, 오늘 같은 토요일은 사모님이나 제임스도 없이 정말 혼자 빌리지 안에 남겨진 것이다.

제임스의 가정부들은 모두 여섯 명인데 이런 날은 한집에 모여 수다를 떤다. 아떼들이 수다 떨 때는 따갈로그를 쓰기 때문에 나는 못 알아듣는다. 그러나 분위기는 대충 안다. 아떼들 중 누가 제임스에게 관심이 있는지, 누가 사모님을 좋아하는지, 누가 유학생 오빠를 마음에 들어하는지. 말들은 많지만 제임스에게 잘 보이면 한국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에 모두 제임스 앞에서는 조심한다.

실제로 작년에 제임스가 한국에 나갈 때 아떼 중 한 명을 데리고 나간 적도 있었다. 그 아떼는 그곳에서 제임스의 친척 남자와 결혼해서 산다고 한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아떼들이 한국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떼들이 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한국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돈 때문이다. 한국사람을 좋아해서 한국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세상 누구나 태어나면 생활을 해야 하고 그러자면 생활비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생활비는 중요하다. 필리핀에서만 일해도 생활비가 부족하지 않다면 아떼들은 서울까지 가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사라인선 언니 말에 의하면 서울에서 한 사람 몫의 월급을 여기서는 다섯 사람 이상이 나누어 가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울에 가려는 것뿐이다.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 열네 살 나이에 이렇게 돈 생각만 하다보니 내가 구십 살 넘은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역시 생활비는 사람을 늙게 만든다. 그래서 생활비 문제가 나를 괴롭힐 때마다 생활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나, 궁리하게 된다. 아떼들 수다에 방해나 되지 않게 빌리지나 한 바퀴 돌아야겠다.

생활비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엄마와 나 사이를 갈라놓은 것도 생활비인 셈이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많다. 아저씨가 자고 간 다음 날이면 엄마가 말했었다.

“걱정 마, 나한테 백 명의 남자가 생긴다 해도 너 하나만 못해. 절대 너를 버리지 않을 테니까 불안해할 필요 없어!”

엄마는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을 정도는 되는 여자였다. 그러니까 엄마는 내가 엄마와 아저씨 사이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와 아저씨 사이에서 내가 생존할 틈이 있나 걱정하는 것 때문에 불안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하는 말을 나는 믿었다. 그래서 엄마가 나를 필리핀으로 유학 보내려고 할 때도 아저씨들이 들락거리는 유해환경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려는 것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엄마도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나는 아버지와 엄마가 사이좋게 지내는 행복한 가정이 필요한 아이는 아니었다. 나는 오직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보살펴줄 수 있는 누군가 한 사람이 필요한 아이다. 그 사람이 바로 엄마이고 엄마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나는 엄마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엄마 혼자 몰래 낳은 아이였으니까.


나를 낳았을 때 엄마는 지금 나보다 겨우 일곱 살 많은 나이였다. 아기를 낳기에는 적당한 나이일지 몰라도 잘 키우기에는 적당한 나이가 아니란 것쯤은 나도 안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외할머니 집에서 자란 것을 가지고 엄마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지금 내가 엄마의 처지를 호소해서 동정을 좀 받아보자는 뜻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그냥 우리 엄마 같은 처지의 여자도 자기 딸을 외교관이나 국제변호사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엄마가 미용사라고 해서 세상에 미용사라는 직업만 있는 줄 아는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란 거다. 그러니까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엄마가 다시는 나를 보지 않을 작정으로 연락을 끊었다 하더라도 미워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누구나 잘 키울 욕심을 갖는 것은 아니고, 잘 키울 욕심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유학을 보내주는 것도 아니다. 엄마는 나 때문에 생활비를 몇 배나 더 벌어야 했다. 엄마가 나를 포기한 이유는 오직 하나 생활비 때문이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 그러나 생활비 문제가 엄마를 괴롭히고 나와 엄마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나는 페스티벌 몰에 다녀오지 않았고, 그래서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일 것이다. 사모님이 아이들 몰래 화장지와 치약, 초콜릿, 깐톤, 고소미, 풍선껌이 든 봉투를 챙겨주었다. 그리고 자상하게 물어보았다.

친척들 중에서 연락처 아는 곳 있니?

사모님이 너무 친절해서 하마터면 외할머니 전화번호를 알려줄 뻔했다. 그러나 나는 대견하게도 꾹 참았다. 엄마에게 좀 더 시간을 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참은 것이다. 엄마에게 나를 버리고 그 뒷수습을 외할머니가 했다는 식의 불량한 역사를 만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엄마도 어른이니까 이제 자신이 벌인 일은 자신이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엄마의 남은 인생이 아주 불행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모님이 준 물건들을 받는 순간 아주 기분이 이상했다. 그것은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묘한 기분이었다. 남에게 무엇인가를 동정받는 일은 전에 나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거지나, 아니면 자존심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나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사모님이 챙겨주는 물건을 받고 기뻐한 것을 보면 나는 점점 거지의 정신상태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이러다가는 파세오 상가 앞에서 꽃을 파는 아이처럼 될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구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구걸에 익숙해지면 자존심을 잃어버리게 될 거고, 자존심을 잃어버리고 나면 양심도 잃어버리게 될 거고, 그러다보면 훔치게 될 것이다. 훔치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는 날이 올까봐 두렵다. 그때가 되면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정말 사람이 생활비 때문에 너무 고통을 받다보면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되나보다.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사모님에게 받은 물건값만큼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 나는 아직은 도둑이나 거지가 되고 싶지 않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염치를 차리고 있어야 한다. 밀린 생활비는 나중에 갚으면 되지만 잃어버린 체면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일로 사모님에게 보답해야 할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잊지 않고 있다가 꼭 보답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사모님이 준 초콜릿을 먹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초콜릿을 한 번에 다 먹지 않으려고 두 조각만 잘라먹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사모님이 준 물건들 중에서 고소미 한 봉지는 살라망고 아줌마에게 줄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 산책은 발걸음이 조금 가볍다. 살라망고 아줌마는 오늘도 빨래를 널고 있다. 빨래를 널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보인다. 전에 우리 엄마도 손님이 많았던 날은 수건을 빨래건조대에 빽빽하게 널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나에게 노란색이나 하늘색 수건이 가득 널린 건조대는 ‘행복’과 비슷한 어떤 것이었다. 수건이 많이 널려 있다는 것은 엄마의 수입이 많다는 것이고, 엄마의 수입이 많다는 것은 엄마와 나의 생활이 편하다는 뜻이 되니? 그랬다. 그래서 수건 빨래가 가득 널린 건조대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살라망고 아줌마도 빨래를 널어놓고 나서 나와 비슷한 어떤 기분을 느낄지 궁금하다. 새로 온 우리 모넷 가 아떼 디엠은 빨래를 대충대충 줄 위에 걸어놓는데 살라망고 아줌마 빨래는 어딘지 보살핌을 받는 아이처럼 잘 정돈되어 있다. 엄마가 수건을 널 때면 한 장씩 탁, 탁, 털어서 정확하게 반이 접히도록 한 줄에 세 장씩 널었다. 살라망고 아줌마의 빨래는 우리 엄마 수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넷 가 아떼보다는 훨씬 단정하게 걸려 있다. 그런데 우리 엄마가 수건을 탁탁 터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수학문제를 풀면 이상하게도 답이 쉽게 나왔다. 살라망고 아줌마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아줌마는 미용사가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먼저 말을 걸고 호들갑 떠는 성격이 아니라서 살라망고 아줌마가 나를 알아챌 때까지 가만히 서서 빨래 너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마침내 아줌마가 빨래를 다 널고 돌아서다가 나를 발견했다. 우리는 서로 알아보고 웃었다. 대화할 마땅한 언어는 없지만 마음은 통하는 사이라서 서로가 반가워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이제 아줌마가 마당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지 않아도 아줌마네 마당으로 들어간다.

오늘따라 내 발걸음이 아주 당당하다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오늘은 내가 아줌마에게 줄 것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라망고 아줌마 앞에 고소미 한 봉지를 내민다. 아줌마는 놀라면서 내가 내민 고소미를 받아든다.

살라망고 아줌마는 적어도 누군가 자기에게 뭘 주면 이 사람이 무슨 이유로 나에게 이것을 주는가? 의심하는 바보 같은 어른은 아니라서 내가 준 고소미를 받고 아주 기뻐한다. 역시 살라망고 아줌마에게 무엇이라도 준 것은 잘한 일이다.

나는 언젠가 여기 산타로사 빌리지를 떠날 것이다. 내가 서울로 돌아가게 되어도 아줌마는 한참이나 더 여기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 수도 있다. 여기는 아줌마가 태어난 나라이고, 아줌마는 나처럼 영어를 배우러 유학 갈 필요도 없으니 하는 말이다. 아줌마가 보기에 나 같은 한국 아이들은 흔하고 흔할 테지만, 그래도 살라망고 아줌마와 친구가 되려는 아이는 거의 없을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살라망고 아줌마처럼 엉덩이만 기형적으로 뚱뚱한 데다 까만 피부를 가진 촌스러운 필리피나와는 사귀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걱정이기는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살라망고 아줌마는 내가 떠나고 나서도 계속 여기 남아 있을 것이고, 빨래를 널 때면 가끔 내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바로 그럴 때 오늘 내가 준 고소미를 생각하면서 어떤 한국 아이가 나를 좋아했는데, 그 아이가 참 보고 싶다! 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던지 아줌마가 서울로 돌아가냐고 묻는다. 나는 아직은 아니고 얼마 더 있으면 가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알다시피 살라망고 아줌마와 나는 길고 깊은 대화를 입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는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단어 몇 개로도 이런 말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스 마실래?”

아줌마가 묻기에 나는 오늘은 마시고 싶지 않다고 사양한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자 아줌마가 고소미를 빨래바구니 속에 집어넣더니 내 손을 잡아끌고 두리안나무 허리 밑에 와서는 손으로 두리안 열매들을 죽 가리킨다.
하나 고르라는 말이다. 나는 싫다고 한다. 이럴 생각으로 고소미를 준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러자 아줌마가 나와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보도록 허리를 구부리고는 내 눈을 과녁 보듯이 똑바로 쳐다본다. 그래서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두리안을 고를 줄 모른다. 나는 두리안을 먹을 줄도 모른다. 먹어본 적도 없다. 그러니까 안 줘도 되지만 꼭 주고 싶다면 저기 참외 크기만 한 작은 것으로 하나 달라고 한다. 그러자 살라망고 아줌마가 덩치에 어울리게 큰 손을 양쪽 허리에 척 올리고 나무 여기저기를 한참 둘러보더니 정말이지 커다란 두리안 하나를 가리킨다. 예전에 외할머니가 먹기 아깝다고 하던 늙은 호박만 한 두리안이다. 아줌마 얼굴을 보니 내가 고른 것은 아직 익지 않은 것이고, 자기가 고른 것이 잘 익었다는 것 같다.

갑자기 아줌마가 집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집 안으로 들어갔던 아줌마가 직사각형 모양으로 생긴 부엌칼을 들고 나온다. 들고 나온 부엌칼로 매달려 있던 두리안 꼭지를 칼로 툭, 툭, 쳐서 떨어뜨린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보기에 아줌마네 마당에 열린 두리안 중에서 가장 큰 것 한 개가 떨어진 것 같다. 아줌마는 억센 가시 같은 껍질로 뒤덮인 두리안을 빨래바구니 속에 담더니 가자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 곳까지 두리안을 갖다주겠으니 앞서라는 소리다. 하긴 아줌마가 딴 두리안은 너무 커서 내가 들고 갈 수도 없다.


태양은 아주 뜨거워서 모자를 쓰지 않고 거리를 걷는 것이 달군 오븐 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만큼 위험하다. 그렇지만 아줌마와 나와 두리안이 함께 걷고 있으니 뜨거운 것도 모르겠다.

살라망고 아줌마가 커다란 두리안을 거실 탁자 위에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턴다. 그러고는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모넷 가 전용 아떼 디엠과 따갈로그로 몇 마디를 나눈 후에 돌아간다.

목이 유난히 짧고 어깨가 넓어서 아이들 사이에 거북이로 통하는 아떼 디엠은 셰익스피어 가의 주방 아떼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셀리의 친동생이다. 아직 열일곱 살밖에 안 됐는데 돈을 벌려고 산타로사 빌리지에 온 것이다. 디엠은 기회만 되면 자기가 살던 시골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디엠은 공부도 싫고, 돈도 싫고, 오직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자기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어한다. 아주 단순한 소원인데 그 소원 때문에 셀리가 골치를 썩는다. 기껏 일자리를 구해서 데리고 왔더니 매일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어서 그렇다.

우리도 아떼 디엠에게 불만이 많다. 디엠이 빤 빨래는 여기저기 얼룩이 지고 세탁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락스와 세제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관심도 없고 가르쳐줘도 배우려 들지 않는다고 사모님한테 잔소리를 듣기까지 한다. 표백제를 써야 할 곳에 세제를 쓰고 세제를 써야 할 곳에 락스를 들이부어서 옷을 망쳐놓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제는 안나 언니의 검정색 바지에다 락스를 뿌려서 호피무늬를 만들어놓았다. 그 바지는 안나 언니가 특별히 아끼는 바지였다. 그 바지는 뚱뚱한 안나 언니의 하체를 날씬해 보이게 만들어주는 디자인이라서 그렇다. 화가 난 안나 언니가 비싼 바지라고 하니까, 그럼 물어주겠다고 디엠이 큰소리를 탕 쳤다. 아직 첫 월급도 안 받은 주제치고는 정말 배짱은 좋은 편이다.

다행히 디엠의 언니 셀리가 디엠 대신 미안하게 되었다고 사과하고 사모님도 거들어주어서 바지는 물어주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빨래뿐 아니라 청소는 정말 대충 해치운다. 소파나 침대 밑으로 먼지를 쓸어 넣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사모님이 디엠의 언니 셀리를 데리고 와서 침대 밑과 소파 밑을 다시 청소시킨다.

셀리가 바쁘면 데니슨 가 아떼가 불려온다. 그래서 데니슨 가 아떼 사라는 디엠을 아주 싫어한다. 그런데도 디엠은 자기 언니 셀리나 다른 아떼들에게 대들면 대들었지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디엠을 해고하자는 소리가 아떼들 사이에서 나올 지경이 되었다.

오늘도 청소는 대강 해치우고 자기가 살던 시골로 도망갈 궁리만 하던 디엠이 살라망고 아줌마가 두고 간 두리안 열매를 아주 잘 아는 동네사람을 만난 듯이 반가워한다. 나도 디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식탁에 올려진 두리안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디엠을 보니 그동안 내 양말이나 티셔츠를 망쳐놓은 일 정도는 용서할 마음이 생긴다.

나는 내 친구 살라망고 아줌마가 두고 간 선물 때문에 순식간에 관심의 초점이 되고 말았다. 셰익스피어 가에 사는 아이들과 데니슨 가의 남자아이들까지 모두 두리안을 구경하러 왔다.

살라망고 아줌마가 남편인 에스파냐 시인의 허락도 없이 따준 두리안 맛은 참 별로다. 냄새는 파인애플과 발 고린내 중간쯤이다. 이렇게 낯선 냄새를 풍기는 과일을 맛있게 먹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모님은 이런 두리안을 두고 처음 먹어보는 사람은 이 맛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번 맛이 들면 중독되는 것이 바로 두리안이라고 설명해준다. 우리 엄마가 썩은 냄새를 풍기는 홍어회를 돈 주고 사 먹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 두리안 맛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아무튼, 여기 필리핀에서는 사랑받는 과일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 두리안 자신을 위해서 다행이다.

맹세를 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지만, 살라망고 아줌마를 평생 동안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속으로 혼자 조용히 맹세한다. 또, 아줌마의 이름이 ‘훼 살라망고’이며 ‘칼람바’ 근처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잊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서울로 돌아가고, 엄마를 영영 만나지 못하고 보육원이나 고아원에서 자라서, 주유소 알바나 미용실 보조로 살아가거나, 그것도 안 돼서 창녀로 살아간다 해도, 이 세상 어느 구석에 살라망고 아줌마가 살고 있으며, 그 아줌마도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사모님이 준 물건들 중에서 블랑카에게는 깐톤 한 개를 주고 사라인선 언니한테는 치약을 주었다. 그러자 블랑카가,

“생활비 왔어?”

라고 묻는다. 사라인선 언니는 내 눈치를 살핀다. 블랑카의 질문에 나는,

“아니.”

라고 한다.

“그럼 이건 어디서 난 거야?”

“사모님이 준 거야.”

“그런데 왜 이걸 날 줘?”

“내 선물이야.”

“이런 선물 받고 싶지 않아!”

블랑카가 다시 칸톤을 내 책상 쪽으로 쭉 밀어보낸다. 사라인선 언니가 거든다.

“그냥 받아둬. 선물이라잖아!”

“언니는 지금 유니스한테 선물 받을 마음이 생겨요?”

“그럼! 이런 선물이 더 좋은 거지.”

“그런데 엄마한테는 진짜 연락이 없는 거야? 거짓말 같아.”

블랑카가 너무도 천진무구하게 말하는 바람에 내 이야기를 물어본 것이 아니고 신문기사에 나온 다른 어떤 아이 이야기인 것만 같다.

“안됐다. 뭐 그런 엄마가 다 있니!”

블랑카의 이 말은 전적으로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반박할 생각이 없다. 게다가 오늘은 엄마를 변호해줄 마음도 없다. 블랑카 말대로 엄마는 아주 나쁜 년이다.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그렇지 자기 딸을 버리다니, 그것도 이렇게 먼 나라에,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에게 진짜 말 못할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세상에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가 너 하나뿐인 것도 아니니까 속상해할 필요는 없어.”

사라인선 언니가 내 마음을 달래준다.

“그래도 이런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에요.”

블랑카가 또 사라인선 언니에게 대든다.

“물론 흔하지 않지. 하지만 가끔 일어나는 일이야.”

“난 처음 봤어요. 이런 일.”

블랑카가 사라인선 언니에게 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마 미키윤수 일이 아직도 블랑카의 속마음을 꽁꽁 얼려두고 있는 모양이다.

“경우만 다를 뿐, 나 역시 그런 경우에 속해.”

“유니스랑은 다르죠. 생활비가 끊긴 건 아니잖아요.”

“그놈의 생활비, 그게 문제지. 하지만 생활비가 온다고 해서 안 버려진 거라고는 말 못하지. 나만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지면서 서로 안 키우겠다고 싸우던 자식이었는걸. 그러다가 나를 떠맡게 된 아버지가 재혼한 여자에 대한 예의로 나를 유학 보낸 거니까. 차라리 생활비가 없어서 버린 게 훨씬 인간적인 거 아닐까?”

“그래서 언니는 방학에도 서울에 안 가는 거였어요?”

말해놓고 나서 블랑카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제 알았다는 듯이 입을 다문다. 나는 이제 철없는 블랑카를 미워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해할 수 없어서 힘들지도 않을 것 같다. 철이 없다는 것은 아직 인생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블랑카가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건 사라인선 언니도 마찬가지인가보다. 블랑카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보니.

“나는 지금 생활에 만족해. 나는 나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서로 불편하게 엉기지 않는 지금이 좋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엄마가 일찌감치 자기 역할을 포기해주는 것도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니란 거야. 물론 유니스가 좀 더 크면 알겠지만. 아무튼 앞으로 몇 년간이 문제이긴 하다. 네가 아직은 혼자 살기에 너무 어리다는 게 문제야. 하지만 사람이 아주 죽으란 법은 없는 거니까.”

사라인선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내 사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버려진 아이다. 엄마한테서 다시 연락이 올 때까지는 변하지 않는 내 사정이다. 어쩌면 엄마에게서 연락이 온 후에도 나는 버려졌던 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시시껄렁한 고민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엄마가 언제쯤 연락할 것이냐! 다.


내 입장에서 보면 엄마는 나쁜 년이 분명하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나는 더 걱정이다. 엄마는 어쩌면 철없는 블랑카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엄뚸도 자라면서 고생을 했다지만 외할머니에게 버려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외할머니에게 들은 말들을 종합해보면 엄마의 아버지는 마음속에 바람이 든 사람이거나, 애초에 아버지 역할을 할 마음이 없었던 남자인 것 같다. 그런 남자의 유전자를 이어받았으니까 엄마가 철이 안 들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철이 없는 사람에게 책임감을 기대할 수는 없다.

만일 이런 내 추측이 틀린 것이라면 엄마가 믿고 의지하던 여성잡지 속의 유명인사들 인생관을 엄마가 본받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엄마는 내가 집을 나가버린 외할아버지를 유독 많이 닮았다는 외할머니의 말에 엉뚱한 영향을 받아서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나를 버린 것일 수도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틀린 추측 같다. 외할머니는 내가 외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점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내가 다리를 접고 앉는 방식까지 외할아버지를 닮아서 아주 곱다고 했었다. 집 나간 외할아버지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면 외할아버지가 친절한 남자였거나 아니면 외할머니에게 남자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갖게 할 만큼 근사한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외할아버지를 좋게 기억하는 외할머니를 보면 엄마에게도 외할아버지는 나쁜 아버지로만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외할아버지가 집 나간 일에 대한 복수로 나를 버렸다는 말은 취소다.

뭐! 어쨌든 좋다. 그 누구의 어떤 영향이든 엄마가 벌써 육 개월째 나에게 전화 한 통 안 하고 생활비조차 보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닐 테니까!

어쩌면, 엄마가 하던 미용실을 인계받은 아줌마는 내가 모르는 엄마의 친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엄마의 부탁을 받고 일부러 엄마를 모른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언젠가 엄마가 미용사들끼리는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오늘은 그 점을 좀 알아봐야겠다.

사라인선 언니는 내가 몰래 미용실에 전화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저쪽에서 받지도 않는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횟수만큼 상처를 받게 될까봐서이다. 나는 이미 나이에 비해 상처를 너무 크게 안고 있는데 거기다 더 많은 상처를 받게 되면 내가 견디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사라인선 언니는 서울에 절대로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먼저 전화가 와도 아주 냉정하게 받는다. 이런 걸 보면 사라인선 언니도 아직 철이 덜 든 구석이 있다.

오후가 되어도 할 일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나는 빌리지나 한 바퀴 돌려고 집 밖으로 나왔다. 생활비가 제 날짜에 오던 때 같으면 오후에도 할 일이 많았을 것이다. 개인영어 가정교사와 두 시간씩 영어회화 수업도 해야 하고, 사모님이 짜준 시간표에 맞춰 국어, 사회, 수학, 과학 문제집도 풀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빈둥거려도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예전의 나처럼 바쁘다. 하지만 지금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문제집을 풀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사모님만 간혹 문제집을 뒤적거려보는 눈치지만 공부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나는 몇 개월 전의 내가 어떤 아이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오늘이라도 엄마한테서 연락이 오고 다시 생활비가 오기 시작한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나를 잊고 완전히 다른 내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의 내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그때의 나 역시 지금의 나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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