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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맛보기 김보연 글,사진 | 시공사 |
유럽의‘진짜’음식들이 보여준 특별한 맛 이야기 세계적인 스타 셰프의 감동적인 코스 요리부터 소박한 보통 사람들의 손맛 담긴 음식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진짜배기 음식을 찾아 유럽 곳곳을 누빈 고군분투 미식 여행의 기록. 겉보기엔 우아하지만, 실제로는 고생바가지였던 저자 김보연의 유럽 맛 기행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찾아 떠난 여행이 아니었다. 유럽 땅에서 자라고 그곳의 물, 바람, 시간이 만들어낸 그곳의 음식들, 그곳 사람들의 장인 정신이 담겨 있는 소울 푸드에는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감동, 이야기가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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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로 복닥거리는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 여기서 한 블록만 들어가면 작은 샛길 하나가 나온다. 건물 새 빈틈처럼 지나치기 쉽지만 우연히 그 속에 발길이 닿는다면 예상치 못한 모습에 조금은 놀라게 된다. 한 줄기 햇빛이 겨우 드는 좁은 골목에 무채색의 화랑들과 소박한 카페테리아들이 멈춰 있다. 세련된 분위기라기보다는 왠지 세월의 넉넉함이 느껴지는 소박한 뒷골목, 페트릭솔.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 다녀도 좋지만, 자연스레 발길이 멈추는 곳이 있다. 바로 그란하 라 파야레사(Granja La Pallaresa). 쇼윈도의 먹음직스러운 추로스 때문에 누구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본다. 열리고 닫히는 문을 통해 초콜릿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온다. 1947년에 문을 연 소박한 카페. 예전에는 신선한 젖소의 젖을 직접 짜서 팔았던 밀크 바이자 간식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스페인의 공식 낮잠 시에스타가 거의 사라진 바르셀로나. 그러나 이 거리만큼은 그 오랜 역사를 지켜 온다. 한낮에 이곳의 진득한 초콜라테 한 잔에 추로스를 먹고, 엔사이마다(Ensaimada, 반죽에 돼지기름이 들어가는 둥근 모양의 흰색 빵)도 하나 베어 물고 싶었는데 낮잠 시간이 끝나려면 기다려야 한다. 나 같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지만, 문을 열기로 한 시간이 한참을 지나서야 꾸물꾸물 셔터가 올라간다.
유리 안 수북이 쌓여 있는 추로스가 눈에 들어온다. 나무틀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빛바랜 타일 장식에 닳고 닳은 바닥과 바닥을 직직 긁는 낡은 의자들. 테이블마다 놓여 있는 촌스러운 책받침 메뉴는 맛탕 소스 묻은 우리네 분식집 메뉴판처럼 끈적끈적하다. 모든 메뉴에 번호가 적혀 있는데 역시 1번 메뉴는 소콜라타 에스파뇰라(Xocolata Espanyola). 추로스도 그렇고 엔사이마다, 멘하르 ?랑크(Menjar Blanc, 아몬드 크림 푸딩)에 이르기까지 카탈루냐 사람들의 출출한 배를 책임질 간식거리들이다.
주문을 마치자 재빨리 나오는 그것. 기름에 튀긴 바삭바삭한 추로스 한 접시와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될 묵직한 초콜라테. 컵이 넘쳐라 얼마나 많이 퍼 주는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땟자국처럼 컵 가장자리에 묻어 있는 데도 싫지만은 않다. 바삭한 추로스를 거기에 푹 담가 찍어 먹는데, 들큼하고 고소한 맛. 그러다 폭신폭신한 엔사이마다를 하나 베어 무니 얼굴에는 가루분과 함께 행복감이 폴폴 날린다. 소박한 촌스러움은 편안하다. 그리고 그것이 오랜 역사 때문이라면 왠지 정겹다.
이곳에 올 때마다 이상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 70년대에는 동네 빵집에서 빵 한 접시와 우유를 시켜 놓고 미팅을 했단다. 난 그 세대는 아니어도 테이블 몇 개 놓고 장사했던 동네 빵집을 기억한다. 고소한 크로켓, 두툼한 크림빵과 튼실한 단팥빵이 있던 곳. 가끔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다 그곳에 들러 우유 한 잔과 곰보빵을 먹으면 얼마나 신이 났는지. 지금은 대부분 흔적조차 사라진 곳들. 이곳이 왠지 편안하다. 좋다.
그란하 라 파야레사 Granja La Pallaresa주소: Petritxol 11, Barcelona
전화: 93 302 2036
오픈: 09:00~13:00, 16:00~21:00
교통: Liceu역에서 도보 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