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시골집엔 수많은 신들이 살고 있었다
어릴 적 동지 무렵이 되면 어머니는 꼭 작은 사발에 엿 만드는 조청을 담아 부뚜막에 놓아두었다. 늘 입이 궁금한 터라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려다가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머니는 그게 부엌신인 조왕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했다. 그때는 바퀴벌레란 말이 없었던 것 같은데 조왕신은 흔히 바퀴벌레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고 했다. 바퀴벌레는 엿이나 조청같이 단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조청을 담아 부뚜막에 놓아두는 것이다.
조왕신은 원래 천제의 증손자였다. 조왕신이 맡은 임무는 일종의 천제의 스파이 역할이다. 그 집에서 일 년 동안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히 기억해두었다가 일 년에 한 번씩 천제에게 가서 일러바친다. 그 일러바치러 가는 날이 바로 동지이다.
아마도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세히 파악하는 데 바퀴벌레만큼 유리한 놈도 없을 것이다. 집 안의 구석구석을 숨어 돌아다니며 모든 말을 엿듣고 모든 일을 다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놈이 보고 들은 걸 다 천제에게 일러바치면 인간들은 여간 곤란하지가 않다. 그래서 동지 무렵이 되면 일종의 뇌물처럼 끈적끈적한 조청을 조왕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바퀴벌레는 단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조청을 마음껏 먹는다. 그러다 끈적끈적한 조청 때문에 입이 쩍 달라붙는다. 그래서 막상 천제에게 갔을 땐 입이 붙어 일러바칠 수가 없게 된다. 동지 무렵엔 일종의 스파이 전쟁이 인간과 천제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지는 셈이다.
어릴 적 시골집엔 신들이 참 많이도 살고 있었다. 그 신들의 이름을 재미있게 죽 열거하고 있는 시가 있다. 백석의 시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이다.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 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통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밖앝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망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 가나 묻어 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 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수 없다
- 백석,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전문
위 시의 말하는 이는 어린아이이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집과 가족을 보호하는 신이든 해코지를 하는 신이든 상관없이 무섭기 마련이다.
위 시에서 맨 먼저 등장하는 게 성주신이다. 성주신은 위 시에서 집의 가장 중심공간인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성주신은 집에서 가장 높은 신이다. 대청이나 안방의 대들보에 흰 봉투에 쌀을 넣어 걸어두거나 단지에 쌀을 넣어 얹어두는데 그게 성주신의 몸체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혼자 있으면 그 성주신의 몸체가 무섭게 느껴질 만하다. 그래서 얼른 토방으로 건너왔는데 거기에도 “디운구신”이 있다.
백석은 함경도 사투리와 풍속을 시로 잘 살려낸 일제 때 시인이다. 그러니까 “디운구신”은 함경도 사투리일 건데 함경도 풍속과 방언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아이는 또 그 디운구신이 무서워 얼른 부엌으로 간다. 그런데 부엌에는 또 조왕님이 있다. 앞에서 말한 조왕신이다.
아이는 또 조왕신이 무서워 고방, 즉 곡식이나 물건을 넣어두는 광으로 간다. 그런데 광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이 모셔져 있다. 데석님은 아마 집의 재물을 지켜주는 업을 이르는 사투리일 것이다. 우리 어릴 적에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즐겨 해주던 이야기 중 하나가 ‘업’에 대한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감골 할머니는 열여섯 처녀 때 고개 몇 개 너머 동네에서 시집왔다. 그런데 꽃가?를 타고 고개를 넘고 넘는데 커다란 족제비 한 마리가 줄기차게 따라오더란다. 가마꾼이 아무리 쫓아도 또 따라오고 또 따라오고 했다. 그렇게 누런 털이 탐스러운 족제비가 시집까지 쫓아왔는데 그 뒤부터 친정집은 이유 없이 점점 망하고 어렵던 시집은 점점 흥해 큰 부자가 되었다. 그 누런 털이 탐스러운 족제비가 바로 업이었던 것이다. 친정집의 재물을 지키던 업이 시집으로 따라와서 친정집은 망하고 시집은 부자가 된 것이다.
업은 집에 깃들어 사는 재물을 지키는 신이다. 족제비가 업인 경우는 드물고 대개 집에 깃들어 사는 구렁이가 업인 경우가 많다.
아이는 이 ‘업’이 무서워 이번엔 집 뒤의 굴뚝 있는 곳으로 도망간다. 그런데 굴뚝에는 또 굴대장군이라는 굴뚝의 신이 있다. 아이는 엄마야 하고 도망 나온다. 그러다가 이번엔 뒤꼍의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과 마주친다. 이것은 집터의 신인 터줏대감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어릴 적의 집 뒤꼍에 가면 조그만 단지를 짚으로 엮어 씌워둔 것이 있었는데 그게 터주의 몸체이다. 성주신과 터주신은 집의 주된 신이다. 성주신이 하늘신에 해당한다면 터주신은 땅의 신에 해당한다.
아이는 이 터주신이 무서워 이제 아예 집 밖으로 도망을 가려는데 대문에는 또 대문의 신인 수문장이 지키고 있다. 이 수문장 신은 ‘신도’와 ‘울루’라는 대단히 무서운 신이다.
동양의 신화에서 해는 동해 끝에 있는 거대한 뽕나무인 부상수에 산다. 이 부상수에서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면 부상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옥계가 운다. 옥계가 울면 동해의 도도산 복숭아나무 꼭대기의 금계가 따라 울고 세상의 모든 닭이 따라 울어 아침이 오는 것이다. 도도산 위에 자라는 복숭아나무는 가지가 수천 리를 덮고 있는 거대한 나무다. 그 복숭아 나무의 동북쪽에 귀신들이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는 귀문이 있다. 신도와 울루 형제는 이 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귀신들은 밤에 사람세상으로 나갔다가 도도산 복숭아나무 꼭대기의 금계가 울 때까지 귀문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신도와 울루는 돌아온 귀신들을 일일이 검사하여 나쁜 짓을 한 귀신은 갈대로 묶어 커다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한다. 신도와 울루는 세상의 모든 귀신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신이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운 신인가?
아이는 이 무서운 수문장 신도와 울루를 피해 집 밖으로 달아난다.
앞서 봤던 백석의 시에는 등장을 하지 않지만 집에 깃들어 사는 신들 중 아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신은 뭐니뭐니 해도 변소에 사는 각시귀신이다.
이 신은 앙칼진 여성신이어서 잘 달래지 않으면 해코지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밤에 마당 구석에 뚝 떨어져 있는 변소에 가는 걸 제일 무서워했다. 대개 누나나 형을 깨워서 같이 가지 않으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옛날의 집들은 말하자면 우주의 축소판이었다. 지붕은 집이라는 소우주의 하늘에 해당하는데 성주신이 이곳을 관장한다. 집터는 땅에 해당하며 터주신이 이곳을 관장한다. 기둥은 지상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잇는 하늘 사다리이다. 이 하늘과 땅 사이에 조왕신, 업, 변소의 신, 수문장 그리고 인간이 깃들어 산다. 그 집의 할머니나 어머니는 이 소우주의 신들을 모시는 제사장이었다. 늘 부엌이나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신들에게 빌었다.
물론 여자어른들만 제사장이었던 건 아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도 제사장이었다. 남자어른들은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장이다. 명절 때나 제삿날이 되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제사장이 되어 조상신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집 안이나 사당에 모신 조상의 위패가 조상신들의 몸체이다.
이와 같이 전통시대에 집은 우주의 축소판으로서 만신이 깃들어 사는 성화된 장소였으며, 인간은 그 안에 거주함으로써 보호되고 성화되었다. 전통시대의 집은 집 밖의 카오스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성화하는 코스모스였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