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이는 것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새로움도 낡은 것이 있다. 교육은 제도를 통해 특정한 범주를 이루는 탓에 공급하는 자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기 어렵다.
분노도 연민도 없고 실천적인 행위도 없는 자아에게 세계는 그저 버석이거나 서성이는 그림자이며 존재의 밖에 떠 있는 달은 쪼아 먹혀서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연상으로 이어지는 참신한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새롭거나 치열하지 않다. 자기 몫의 상처가 아니라 어디선가 가불해온 상처들처럼 ‘질감’이 없다. 과인한 재능에서 비롯된 언어감각도 좋지만 나르시시즘 밖의 세계를 향한 모험 또한 필요하다.
스캔들도 이야기도 없이 출렁이는 이미지
새로움도 낡은 것이 있다. 교육은 제도를 통해 특정한 범주를 이루는 탓에 공급하는 자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시 쓰기는 이런 제도화된 구조에 저항하는 엉뚱한 상상력과 발칙한 사고, 자신만이 창조할 수 있는 독특함 그리고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는 패기를 필요로 한다. 선행의 모범에 의해 학습되고 훈련된 규격품들보다 덜 완성되었더라도 개성적이고 파괴적인 힘을 보여주는 야성의 정신이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김태형(19, ‘문장 글teen 사이버 문학광장’ ID 실마리) 의 「서성이는 것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는 화자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대화를 희곡처럼 구성하고 있다.
#새
벽을 서성이는 그림자에 대고 아버지, 부른다 서성이는 것은 새와 아버지들뿐이란다 달이 뭉근히 끓던 밤의 기억을 베어 문다 버석버석 웃는 아버지가 여태껏 서랍 속 잠든 어린 날의 도수 높은 안경 렌즈에 새겨져 있다 새파란 잔금 탓인지 그림자가 초췌하다 아버지, 부른다 나는 새란다 아들아 아버지는 서랍 속에 있잖니 그림자는 새만이 가질 수 있는 거야 서성이는 것들은 그림자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할 수 있단다
#아버지
그림자가 날아오른다 펴든 날개에서 박피된 빛깔이 벽과 눈동자에 교대로 서식한다 쪼아 먹히기 시작한 달의 구멍이 먼 곳에서도 숭숭 보이는데, 아버지는 여태껏 서랍 속에서 버석이고 있다 좁지 않으세요 아버지 괜찮아 아버지의 아버지는 가방에서 한평생을 사셨는걸 띄어쓰기를 솜씨 좋게 응용한다면 못 들어갈 곳이 없지 렌즈가 하나 없는 안경에 아버지가 버석버석 안겨 있다 웃을 때의 질감을 기억해낼 수 없다 문득 달이 흔적 없이 쪼아 먹혀진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버석이는 것이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 김태형, 「서성이는 것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전문
산문형의 전개와 운문의 형식이 아닌 극적 구성의 실험에서 오는 긴장과 패기를 읽을 수 있다. 더구나 확실한 행위가 아닌 징후적이고 불확실한 상태를 포착하는 ‘서성이는’ ‘버석이는’과 같은 단어들이 사물과 사실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일차적으로 정보와 의미를 전달하는 문장의 인과율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아들과 아버지로 나뉜 화자들의 어디에서도 인간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감상이 배어나오지 않는다. 즉, 주체를 번갈아가며 대화하지만 어떤 목적과 이해를 위한 소통을 위해 주고받는 말들은 아니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문 앞에서 서성이거나 서랍에 갇혀 버석거리는 그림자 같은 존재일 뿐 실체가 없다. 아버지가 금기에 대한 상징적 법의 대리자이거나 금제(禁制)를 주제하는 강력한 장애이기는커녕 실체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신경증적 환상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존재감은 ‘벽에 서성이는 그림자’이거나 날아가는 ‘새’의 흔적 정도일 뿐이다. 애초에 오이디푸스적인 압박을 노정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좁은 서랍 속에 갇혀 버석거리는 정도로 자신을 알리는 ‘초췌한’ 존재다. 그런데 단지 문‘밖에서’만 서성이는 존재일 뿐인 아버지가 왜 문제적일까. 아버지의 실체가 없는 공간 속에 배치된 달과 안경 렌즈와 부리로 달을 쪼아 먹는 새의 관계는 결코 화해로운 관계들이 아니다. 가학적이지도 피학적일 수도 없는 지점에 서 있는 초자아는 그래서 이렇게 분열적인 질문을 낳을 수밖에 없다.
분노도 연민도 없고 실천적인 행위도 없는 자아에게 세계는 그저 버석이거나 서성이는 그림자이며 존재의 밖에 떠 있는 달은 쪼아 먹혀서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연상으로 이어지는 참신한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새롭거나 치열하지 않다. 자기 몫의 상처가 아니라 어디선가 가불해온 상처들처럼 ‘질감’이 없다. 과인한 재능에서 비롯된 언어감각도 좋지만 나르시시즘 밖의 세계를 향한 모험 또한 필요하다. 자신을 지불할 때만 가능한 모험, 그 모험을 모르는 아버지가 서성이듯이 어느덧 아들 역시 서성이는 것은 아닌지. 새, 그림자, 달 등등 상투화된 오브제들의 운용과 운율이 결여된 산문화된 세계의 강박증 역시 생각해보아야 할 대목이다. 가상의 발명보다 발견하는 세계에 대한 정직성도 매혹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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