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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②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③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④
누가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나는, 절대 유명인사가 되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이런 걸 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꿈은 그렇다. 꼭 뭐가 되겠다는 꿈만 꿈이 아니라, 절대로 뭐가 되지 않겠다는 꿈도 꿈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사라인선 언니는 지금처럼 유명인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 오히려 시시한 일이라고 했다. 사라인선 언니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지만 꿈에 대해서만큼은 약간 사치스러운 견해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나는 시시해지지 않기 위해 유명인사가 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유명인사가 되겠다는 말은 시시하다기보다는 너무 단순해서 제도샤프나, 컴퓨터용 지우개나, 손톱깎이가 되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싫다는 것이다.
무니가 울기 시작한다. 무니는 자명종 닭이다. 구별 없이 시계로 불리는 것이 불쌍해서 내가 생각나는 대로 붙여준 이름이지 별다른 뜻은 없다. 아침밥을 굶지 않으려면 무니가 울어줄 때 일어나는 게 좋다. 몇 달 전 같으면 마실 우유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우유도 끊겼기 때문에 아침밥을 꼭 먹으려고 노력한다.
사라인선 언니가 깨우기 전에 일어나서 유리도 녹슬게 할 만큼 시큼한 수돗물에 세수하고 이도 닦아두는 게 낫겠다. 나와 침대를 같이 쓰는, 정확히 말하면 두 칸 침대에서 이층을 쓰는 연서블랑카는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를 닦고 나서 깨울 생각이다. 내가 연서블랑카를 깨운다거나, 아떼 디엠이 거실 한가운데 던져놓은 거대한 빨래바구니에서 사라인선 언니의 옷을 골라내 옷장에 정리해둔다거나 하는 나의 행동은 사라인선 언니를 도와주는 셈이 되는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 방은 사라인선 언니가 대장이니까. 그래서인지 사라인선 언니는 가끔 학교에서 돌아올 때 이스트 냄새가 풍기는 식빵이나 필리핀 라면 ‘깐톤’을 사다준다. 아니면 파세오 상가로 생리대를 사러 나갈 때 나를 데리고 나가주는 것으로 보답해준다. 나는 빌리지 밖으로 혼자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라도 외출하는 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한쪽 귀퉁이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멜라민 식판에 깍두기처럼 썰린 노란 파파야를 두 국자 퍼올리는 시간이면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잠깐 잊을 수 있어서 좋다. 삼십 명이 넘는 유학생들과, 하숙집 주인 제임스와, 제임스의 부인인 사모님과, 다섯 명이나 되는 아떼들과, 필리피노 운전기사 두 명까지 우글거리는 사이에서 외롭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영혼에 관련된 문제라서 트집을 잡으면 안 된다. 아무튼 본인이 외롭다면 외로운 것이다.
사모님이 초콜릿 우유 일 리터짜리 한 병을 내 식판 옆에 갖다놓는다.
“지난번에 우윳값 계산하다 보니까 한 병이 빠졌더라. 네 계산에서 빠진 거니까, 이건 네가 마실 수밖에 없네?”
이곳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남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함부로 동정하는 일은 금기다. 친절이나 동정을 남용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만일 사모님이 오늘 나에게 준 초콜릿 우유가 친절이나 동정이라면 좋지 않은 예를 만들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여기 유학생들에게 만만하게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면 당장 다음 식사시간부터 자기도 공짜우유를 달라고 요구하는 아이들이 생겨날 테니까. 아무리 사모님이 제임스와는 달리 인심이 좋은 사람이라도 삼십 명이 넘는 아이들 우유를 다 동정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동정이나 친절에도 명분이 필요한 곳이 여기 ‘산타로사 빌리지’다. 오늘 나에게 우유를 동정해주는 사모님의 명분은 계산착오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사모님이 제임스보다 똑똑하고 부지런하다는 사실이 이런 작은 일에서 드러난다. 사모님은 자신의 명분도 세우고 내가 거리낌 없이 초콜릿 우유를 받아도 될 이유를 잘 찾아낸 것이다. 아마 제임스 같았으면 이런 귀찮은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키도 작고, 엉덩이는 뚱뚱하고, 영어는 잘 안 되고, 어떤 옷을 입어도 촌스럽지만, 사모님이 나만 알아보도록 찡긋 눈인사를 하고 가는 모습은 정말 근사하다. 예쁘다는 이차원적인 범위를 넘어서 거의 사차원에 가까운 입체적인 모습이 순간적으로 발현된다. 우리 엄마가 선망하는 국제변호사나 외교관보다는 사모님 같은 사람이 더 근사해 보이는 순간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 마음속은 사모님의 배려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어쨌든 동정을 받고 있는 ‘버려진 아이’ ‘생활비가 안 오는 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처지를 생각하면 나는 더 외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도 과식하게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열세 살 나이에 버려진다는 것은 좀 웃긴다. 세 살이나 일곱 살도 아니고 곧 열네 살이 될 나이에 말이다. 열셋과 사분의 삼이라는 나이는 어디에 버려지든 집을 찾아갈 수 있는 나이라서 버려졌다는 말이 더욱 우습다. 그런데 찾아갈 집이 사라져버리고 나면 열세 살 사분의 삼 나이도 집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만다.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일이다.
미용실을 몰래 팔아넘기고 튀어버린 엄마를 사람들은 ‘나쁜 년’ ‘사기꾼’쯤으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직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엄마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겨서 잠시 연락을 끊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잘 키우고 싶어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 마닐라까지 유학 와 있는 것이다. 그런 엄마가 연락을 끊고 생활비도 보내주지 않을 때에는 틀림없이 말 못 할 사정이 생겼다는 뜻이다. 엄마와 나는 모녀관계이기 때문에 남들은 알지 못하는 어떤 느낌이라는 게 있다.
제임스도 의리가 아주 없는 사람은 아니다. 생활비 송금이 끊기고 나서도 두 달 동안 나를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으니까. 여기 라구나 마닐라에서 제임스는 내 보호자이기 때문에 나를 먹이고, 교육시키고, 안전하게 생활하도록 돌봐줄 책임이 있다.
하지만 생활비도 오지 않는 아이를, 게다가 보호자와 연락도 되지 않는 아이를 두 달 동안이나 더 학교에 보내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다니던 ‘라구나 벨 에어’는 사립이라서 학비가 꽤 비싸다는 것을 알아두길 바란다. 제임스가 의리를 지킨다고는 하지만 두 달이 지나도록 생활비가 안 오고 엄마와 연락도 되질 않자 드디어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점은 약간 아쉽다. 하지만, 유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집을 운영해서 먹고사는 제임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다.
제임스가 내 생활비 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을 쯤에는 나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임스가 어떤 말을 하든 절대 반감을 드러내지 않을 준비 말이다. 원래 제임스의 말투는 빨라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말꼬리를 놓치기 쉽다. 하지만 나는 제임스의 목소리를 부드럽고 친절한 인터넷 영어강사의 강의 소리로 해석해 들었다. 이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마음먹기 나름이니까! 나를 불러놓고는(그때 나는 아주 당당하게 서 있었다) 뒤틀린 창틀과 창문을 제대로 맞추어보겠다고 억지를 부리던 제임스의 모습이 우울한 달마시안 같아서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더욱 반감 같은 것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생활비 때문에 고통당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제임스라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 그, 저, 로 끌고 나가던 제임스의 화법에서 그의 난처한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제임스 같은 어른이 나 같은 열세 살짜리 아이에게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것을 통보하려 했을 때 이를 두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제임스는 오래 참은 셈이다.
작년에도 산타로사 빌리지에 있는 다른 하숙집에 나처럼 생활비 송금이 갑자기 끊긴 아이가 있었다. 그때 그 하숙집 주인은 그애를 당장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것은 물론 밥 먹는 양까지 간섭하다가 나중에는 필리핀 가정부가 하던 집안일까지 시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데 제임스는 학교에 그만 다녀야 한다는 말을 내게 죄를 고백하듯 겨우 하였다. 오히려 내 쪽에서 제임스의 곤란한 처지를 이해해줄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물론 오후에 오는 개인영어 가정교사도 끊기고 일주일에 한 병씩 마시던 고단백 초콜릿 우유도 끊겼지만 다 수용했다.
내가 제임스의 사정을 이해해주자 제임스도 생활비 송금 문제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눈빛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전화번호를 추궁한다거나 친척들 연락처까지 대라고 하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얼마나 살 만한지 모른다. 대신 나는 하루에 세 번 식사시간에 제임스 앞에 나타나서 얌전히 지내? 있다는 표시만 보여주면 된다. 생활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쫓아내거나 굶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미성년자보호법 같은 것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나이라고 사라인선 언니가 말해줘서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잘못되면 제임스 인생도 별수 없이 꼬이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지 제임스는 내 보호자가 되어줄 사람을 찾아내어 밀린 생활비를 받고 나를 돌려보내려 할 것이다. 그날까지 나는 얌전하게 지내면 된다. 내 항공티켓은 돌아갈 날짜가 정해진 왕복티켓이라서 어차피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때까지 나는 내 마음대로 시간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단, 여기 산타로사 빌리지를 벗어나지만 않으면 된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제임스와 엄마의 사정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이들을 태우고 지나가는 ‘라구나 벨 에어’ 스쿨버스를 보는 일은 쉽지 않다. 두 달 전까지는 나도 아침마다 풍뎅이 같은 저 노란 줄무늬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었다. 내가 라구나 벨 에어라는 사립학교를 저 언덕 위에 있는 싸구려 공립학교 ‘AUP’보다 더 사랑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거냐면 그건 아니다! 라구나 벨 에어가 쓸모 있는 경우는 사립학교에 다닌다는 체면을 세워줄 때가 전부다. 라구나 벨 에어는 싸구려 공립학교 AUP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한 가지, 비싼 사립학교라는 명성만 가지고 있다.
언덕 위의 AUP처럼 거대한 망고나무숲도 없고, 지평선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도 갖지 못한 라구나 벨 에어에 다니는 것이 왜 더 자부심을 갖게 하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라구나 벨 에어를 마음에서 우러나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노란색 스쿨버스를 보면서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나는 이제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 한 가지뿐이다. 절대 라구나 벨 에어 때문이 아니다! 만일 제임스가 다시 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저 언덕 위에 있는 AUP에 보내달라고 할 것이다. 절대 라구나 벨 에어로 보내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 문제는 엄마라도 마찬가지다. 당장 오늘이라도 엄마가 전화를 해오고 서울에서 생활비가 송금되어 올 수도 있다. 그러면 엄마는 나를 매연에 찌든 저지대의 빌리지들 틈에 끼여 답답하기만 한 사립학교, 라구나 벨 에어에 보내달라고 제임스에게 요청할 것이 분명하다.
엄마는 내 교육에 아주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성인이 되면 엄마처럼 미용사가 아니라, 외교관이나 국제변호사 같은 폼 나는 직업을 가지길 바라는 사람이다. 엄마는 내가 『여성중앙』이나 『우먼센스』 같은 월간지 인터뷰 기사에 나오는 유명인사처럼 근사하게 성공해서 이런 잡지에 한 번 나오게 하는 게 일생의 꿈인 사람이다.
‘미용사가 키운 딸, 국제변호사로 성공하기까지!’
이런 제목을 달고 엄마와 나, 둘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린 잡지를 미용실 손님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바로 내 엄마다. 그런 엄마가 언덕 위의 공립학교 AUP는 안 되고 저지대의 사립학교 라구나 벨 에어로 가야 한다고 우기는 경우에만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엄마 의견에 따를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우리 엄마가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엄마 의견에 반항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애쓸 줄도 안다. 라구나 벨 에어는 그런 경우에만 선택할 것이다. 결코 내가 마음으로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거대한 망고나무숲이 우거진 언덕 위의 AUP를 담아둘 것이다.
망고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쓸려
싸, 싸, 싸,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엄마도 한번 봐야 할 텐데!
허리에 붉은 상처가 깊게 파인 망고나무들이 얼마나 멋지게 버티고 서서 바람을 날려보내는지 엄마도 한번 봐야 할 텐데!
싸, 싸, 싸.
싸, 싸, 싸아.
망고나무 잎사귀들이 일제히 바람에 몰려나가는 소리를 엄마도 한번 들어봐야 할 텐데.
AUP 언덕의 망고나무숲에 엄마도 한번 가봐야 할 텐데!
그러면 엄마도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휴대폰 번호를 바꿔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텐데. 그까짓 전화번호 하나 바꾼다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텐데.
나 혼자! 학교는 가지 않고 커다란 초콜릿 우유병이나 들고 할 일도 없는 모넷 가로 돌아가자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데니슨 가 12번지에 한번 가봐야겠다. 그 집 마당에 서 있는 두리안나무를 구경하다보면 눅눅한 기분이 좀 파삭해질지도 모른다.
두리안나무 세 그루가 마당을 가득 채운 데니슨 가 12번지에는 필리피나 아줌마와 에스파냐 쎽인아저씨가 산다. 검은 테 안경을 쓰고 흰 셔츠를 입고 천식 걸린 노인처럼 쿨쿨거리는 자주색 차를 끌고 다니는 에스파냐 아저씨를 왜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시인처럼 생기지 않았다. 하여튼 미닫이 격자창으로 들여다보이는 그 집 일층 거실이 온통 책으로 가득찬 것을 보면 책과 관련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사람들이 에스파냐 아저씨를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선 그 아저씨의 부인인 아줌마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줌마의 엉덩이 크기를 한번 보면 누구든 시인이 아니고서는 함께 살 만한 엉덩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줌마의 피부는 낙타색에 가깝다. 여기 필리피나들은 흰 피부를 선망한다. 그런데 시인의 부인인 데니슨 가 12번지 아줌마는 필리피나가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는 피부 중 가장 검은색을 받아가지고 태어난 운 없는 사람이다. 커다란 엉덩이에 황인종으로는 가장 검은 피부를 가진 아줌마와 살려면 시인이 아니면 힘들기는 할 것이다.
다음 이유는 그 집 마당이다. 산타로사 빌리지의 집들은 거의 모두 정원을 가졌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 정원을 빼고는 모든 집의 정원들이 잔디와 키 낮은 꽃나무와 걸개 덩굴 식물로 장식되어 있고, 여러 색의 장미와 스네이크 트리와 야자수와 파파야나무와 철제 장식으로 울타리를 둘렀다. 그런데 이 아줌마네 집은 울타리가 아예 없다. 정원이랄 수도 없는 마당에 두리안나무 세 주가 아무렇게나 버티고 서 있다. 그 두리안나무가 마당을 온통 뒤덮어버린 통에 정원은 잡초도 자라지 않는 맨땅이다. 다른 집 정원처럼 아름답게 보이려고 꾸민 흔적이 전혀 없다. 아줌마는 이 두리안나무 허리와 허리 사이를 주황색 빨랫줄로 길게 묶어놓고 거기에다 시인의 트렁크 팬티며 자기의 낡은 꽃무늬 원피스와 자주색 브래지어까지 죽 널어놓는 것이다. 아무리 산타로사 빌리지를 둘러보아도 이렇게 막무가내식 정원은 이 집뿐이다. 그래서 아마 사람들이 시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하지 못할 짓을 서슴없이 하는 에스파냐 아저씨를 시인으로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이 집 마당에는 성질 고약한 닭 한 쌍이 병아리들을 몰고 다닌다. 누군가 뛰어가기라도 하면 병아리를 잡으려는 줄 아는 모양인지 날지 못하는 독수리처럼 달려온다. 구석에 처박힌 녹슨 세탁기 위는 줄무늬 고양이 차지다. 많던 병아리 수가 한두 마리씩 줄어드는 것을 보면 고양이가 의심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 고양이가 병아리를 잡아먹는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나는 무턱대고 고양이를 의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저 고양이가 한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닭 부부의 성질이 점점 더 고약해지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하여튼 다른 집 정원에는 없는 것들이 이 집 마당에는 있고, 다른 집 정원에는 필수인 것들이 이 집 마당에서는 완전히 무시된다. 이렇게 성의 없는 이 집 마당에 서 있는 두리안나무 여기저기에는 아줌마의 한쪽 엉덩이만 한 두리안에서부터 고양이 머리통만 한 두리안까지 다양하게 혹처럼 매달려 있다. 이 집 마당가에 서면 우스우면서도 근사한 개그맨을 밀림 한가운데서 만난 것처럼 마음이 풀린다. 그래서 나는 데니슨 가 12번지 마당을 ‘나의 고독한 두리안나무숲’으로 정해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둘러보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이 시간이면 내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서울에서 엄마와 살 때는 생활비가 떨어져도 학교는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지가 않다. 돈이 송금되어 오지 않으면 모든 것이 정지다. 나의 연약한 인생이 정지해버리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일 정도로 학교, 가정교사, 간식, 친구, 휴지, 치약, 그 모든 것이 끊겼다. 내가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것은 수돗물이 전부인 것 같지만, 실은 수돗물도 돈을 내야 하기에 제임스의 눈을 피해가며 써야 한다. 바로 이러한 사정을 등에 짊어진 내가 두리안나무숲을 보러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두고 싶다.
내가 특히 마음을 주고 있는 두리안은, 나뭇가지가 아니고 나무둥치에 매달려 있다. 땅에서 일 미터쯤 올라간 나무허리에 불쑥 매달려 있는 모양이 장식용 가짜열매 같다. 하지만 나는 저 두리안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지금은 저렇게 수박만큼 크지만 맨 처음에는 참외만 했다. 아직 두리안을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맛이 예의가 없다는 말은 들었다. 발 고린내가 난다는 것을 보면 친절한 과일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마냥 달콤하기만 한 과일을 보면 시시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나는 뭔가 성격을 드러내는 과일들이 좋다. 씁쓸하다거나, 떫거나, 시큼하거나 해서 쉽게 친해질 수 없는 과일들 말이다. 하지만 저 두리안을 먹어볼 욕심뫀 없다. 아주 순수하게 말하자면 못생긴 저 과일을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좋아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빵빵하게 부풀어오르는 초콜릿 우유통을 들고 자기 뒤통수를 바라보는 나를 두리안이 의식하고 있다. 두리안과 나는 지금 서로 속을 떠보는 중이다. 나는 슬며시 우유통을 뒤로 숨길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초콜릿 우유 한 병에 울고 웃는 사람이라는 것을 두리안에게 들키기 싫어서다.
파란색 큼지막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줌마가 나온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하이!”
한다.
나는 따갈로그를 모르고, 아줌마는 영어를 잘 모르고, 한국어는 아예 모르니, 우리는 말로 하는 대화를 나눌 수 없다. 내가 아는 따갈로그라고는 라구나 벨 에어에서 배운
‘뿌땅이나무’
정도다.
‘뿌땅이나무’라는 말은 ‘네 엄마 창녀’라는 욕이다. 그래서 아무리 서로 할 말이 없어도 이런 말은 할 수 없다. 아줌마 엉덩이가 크긴 하지만 단지 엉덩이가 크다고 해서 아줌마에게 네 엄마 창녀라는 욕을 해서는 안 된다. 나와 아줌마는 둘 다 여자이기 때문에 창녀라는 욕이 여자에게 어떤 기분이 들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나도 이제 열네 살이 될 것이고 몇 달 후면 중학교에 가야 한다. 그리고 생리도 할 것이다. 그러면 창녀라는 욕이 인간에게, 그것도 인간 중에서 여자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더욱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아줌마처럼 저렇게 큰 엉덩이를 가진 다른 여자들도 생리를 하는 건지 정말 궁금하다.
아줌마는 빨래를 널 모양이다. 빨랫줄을 걸레로 죽 닦아낸다. 아줌마가 키우는 사나운 닭 두 마리와 병아리들이 이웃집 정원 생나무 울타리 틈새로 한 마리씩 빠져나오는 것이 보인다. 에스파냐 시인아저씨는 지금 집에 없는 모양이다. 나는 아줌마가 빨래 너는 일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조용히 그냥 내 갈 길을 계속 걷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