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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 “그따위로 하려면 밥 로스 비디오나 봐.”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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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펜, 잉크, 색연필, 팔레트와 붓, 물통까지 챙겨놓고, 본다.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손 놓고 앉아 있었더니 견지 형이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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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그림 그린다 하면 당연히…” -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①
“견지 형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알고 싶었다.” -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②
“누드크로키는 매주 넘어야 할 고비였다.” -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③

5

어린이날에는 다 같이 그림소풍을 갔다. 그림소풍, 간질간질한 단어였다.

“여기서 시작하자.”

산동네 가파른 골목길 위 놀이터에서 견지 형은 말했다.

“한 시간 반 뒤에…… 지금 열 시 십 분 전이니까 열한 시 이십 분까지 여기로 다시 모이도록 해. 되도록이면 두 장 이상 그리고, 다섯 장은 넘기지 마라. 무슨 일 있거나 길을 모르겠거나 내가 필요하면 전화하고. 너무 멀리는 가지 마. 알았지?”

다들 흩어졌다. 이환과 묘은 언니는 함께 움직일 줄 알았는데 미련 없이 각자 걸어갔다. 나는 일단 걸어가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필, 펜, 잉크, 색연필, 팔레트와 붓, 물통까지 챙겨놓고, 본다.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손 놓고 앉아 있었더니 견지 형이 걸어왔다.

“초우, 그럼 먼저 말로 해봐. 저 계단 위에 있는 게 뭐니.”

“화분이요.”

“어떤 화분? 묘사해봐.”

“하나는 좀 크고…… 그러니까 무릎까지 오는 크기? 색깔은 까맣고, 잎이 얇고 가는 나무가 심겨져 있어요. 옆에 두 개, 아니 세 개는 그거 반만 한데 주황색이고, 테라코타 같은 것이고 하나는 선인장이 심겼고, 그 옆에 작은 나무, 그 옆에…… 파?”

“그 말을 종이에 옮기는 거야.”

견지 형이 말했다. 곧 견지 형은 떠나고 나는 보고 말하기 시작했다. 계단 옆 골목. 파란색 티셔츠를 입고 담배를 피우는 남자. 바람. 나무. 흔들림. 하얀 치마를 입은 꼬마 여자애가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그림자도 같이 뛴다. 치맛자락이 다리에 감겨. 그런 움직임까지, 그릴 수 있을까. 순간을 담을 수 있을까.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있을까.

노란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가다가 허리를 펴고 콩콩 두드리는 아주머니. 전봇대에 붙은 스티커들. 그런 게 보였다. 보이는 것들, 읽히는 것들을 그렸다. 한 장을 그리고 걷다가 강강이를 발견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보았더니 강강이는 조그만 놀이터와 그 옆의 작은 집을 그리고 있었다. 얇은 펜으로 머뭇거리지도 않고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그려나갔다. 강강이의 스케치북에 풍경이 담기는 광경은 두근거릴 정도였다.

“좋다.”

진심이었다. 강강이는 놀란 기색도 없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활짝 웃었다.

“언니 그린 거도 보여줘.”

“나…… 별로 못 그렸는데.”

보여주려니 부끄러웠다. 내 그림을 보고 강강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앉으라며 바닥을 툭툭 쳤다. 강강이 근처에 앉아서 연필과 수성펜으로 골목 안을 그렸다. 전봇대, 늘어진 검은 전선들. 강강이처럼 망설이지도 않고 급해지지도 않으려고 애썼다. 어차피 똑같이 그릴 수도 없고, 그렇게 그릴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자리를 옮겨 한 장을 더 그리니 모일 시간이 되었다. 견지 형은 모두 스케치북을 펴서 바닥에 내려놓으라고 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기인 스케치북에 너무나 다른 풍경들. 저마다의 작은 세상이 빼곡히 내려앉은 모습에 설렜다. 견지 형은 하나하나 스케치북을 짚으면서 충고를 해주었다. 나에게는 이번엔 보이는 것을 다 그리려 하지 말고 몇 가지만 골라서, 여백을 남기며 해보라고 했다.

“자, 한 번 더 가자. 똑같이 한 시간 반.”

걷다보니 낡은 슈퍼마켓이 눈에 띄었다. 바랜 차양은 노랑과 연두. 예뻤다. 물병에 담아온 물을 물통에 붓고 팔레트를 꺼냈다. 한 장 그리는데,

“조금 더 세게 나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깜짝이야. 견지 형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색깔을 잘 봐, 초우야. 바로 오늘,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색깔들이 있어. 이 날씨에 이 습도에 이 시간에만 이 색들이 나타난다고. 색깔에 이렇게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지. 몇 월 며칠 몇 시, 어디의 노란색.”

다시 그렸다. 견지 형은 옆에 앉아서 딴청이었다. 다 되었다 싶어 붓을 놓았더니 흘깃 보고 좋은데, 그랬다.

“그 말 말고요.”

“어디 보자…… 색깔을 보이는 대로 다 칠하려고 하지 말고 몇 개만 써. 어떤 화가가 그랬어, 그림은 완성되는 게 아니라 흥미로운 지점에서 멈추는 것이라고. 너무 많이 그리지 말고, 재미있을 때 딱 멈춰봐.”


들은 대로 할 수 있다면 못 그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겠지. 그래도 들은 말을 품고, 그리려고 한다. 배우려 한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어리광부리면서 뒤로 빼지 말고.
견지 형이 다른 아이들을 찾아간 후에 한 장 더 그리고, 성에 안 차서 구도만 조금 바꾸어 다시 그렸다. 아 정말, 이 색깔이 아닌데. 훨씬 더 예쁜데. 선도 이런 느낌이 아닌데 왜 이렇지. 속상해서 스케치북을 확 덮었다가 도로 폈다. 어쨌든 내가 그린 거니까 책임을 져야 한다. 그냥 덮고 잊어버릴 수는 없다.

다음 장소를 찾아 내키는 대로 걷다가 이환이 골목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반가워서 손을 휘휘 저으며 다가갔는데, 이환은 내가 바로 옆에 설 때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눈앞의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 초우야.”

“뭘 보는 거예요?”

이환은 손을 내밀어 골목 건너편의 벽을 가리키며 조금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예뻐서.”

그냥, 벽이었다. 하얀 페인트가 비바람에 바래고 군데군데 떨어져 거친 잿빛 바탕을 드러낸 회벽. 갈라진 틈으로는 작은 초록잎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걸…… 이렇게 잘라서 갤러리에 가져다 놓으면 그게 작품일 거야.”

이환은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어 벽 쪽으로 내밀었다. 벽은 벽일 뿐이지만, 이환의 말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 만들지 않은 것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저 벽도 사람이 만든 건데요?”

“처음엔 저렇게 예쁘지 않았을 거야, 막 만들었을 때는. 근데 비에 젖고, 낡고 해지니까 예뻐지잖아. 그건 인간이 만든 게 아니지. 사람이 만든 것들도 사람 손에서 벗어나면 아름다워질 수 있어.”

사람은 만들 수 없는 아름다움. 사람 손이 닿은 흔적을 벗어야 아름다워지는 것들. 그럼 인간은? 하고 묻고 싶기도 했다. 잠시 이환과 함께 그 벽을 바라보았다. 그려볼까 했는데 덜컥 겁이 났다.

“왜 앞에 흰 종이만 놓으면 겁이 날까요.”

“나도 하얀 종이를 눈앞에 둘 때면 겁이 나.”

이환이 고백하듯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노란 종이를 쓰지.”

“그게 뭐야!”

진지하게 듣고 있던 나만 바보가 되었나 싶었는데 이환이 말했다.

“갱지 같은 거 있잖아. 아니면 구겨진 종이나 신문지. 그런 데다 그리면 마음이 훨씬 편하다? 손도 더 빨리 나가고. 정 안 되면 종이에다 종이를 막 붙여.”

이환은 종이를 담아온 파일을 열어 보였다. 신문지부터 포장지, 잡지 뜯은 것까지 갖가지 종이를 모아둔 것이었다.

“너 쓰고 싶은 거 맘대로 가져가도 돼.”

이환은 어차피 자기 혼자선 다 못 쓴다며 너그럽게 파일을 넘겨주었다. 뭘 쓸까 고민하고 있노라니 종이 고르다가 시간 다 가겠다고, 눈에 띄는 걸로 빨랑 시작해, 라며 잔소리도 해주었다. 닥지 같은 종이를 찢어 붙이고 그걸 벽이라 생각하고 주변을 그렸다. 콜라주 했던 생각이 나서 다른 종이들도 더 붙였다가 아니다 싶어 떼어냈다. 그래, 떼는 게 낫다. 와, 그 감각이라는 거, 나한테도 생기고 있나봐.

“알아서 점심들 먹고, 두 시 반까지 저쪽 은행 앞으로 다시 모입니다. 알겠지?”

견지 형은 휘적휘적 걸어가버리고, 이환 쪽에 붙을까 했는데 강강이가 손을 끌어당겨서, 아운이까지 셋이서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햄버거와 콜라를 앞에 두고 셋이 앉아 있으려니 조금 낯간지러웠다. 학교 얘기나 작업실 얘기, 견지 형 얘기도 하는데,

“난 견지 형이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어.”

강강이는 빨대를 아랫입술로 누르며 웅얼웅얼 말?다.

“결혼? 왜?”

“그럼 나한텐 엄마가 생기는 거잖아.”

마시던 콜라를 내뿜을 뻔했다. 콜록대는 나를 보며 강강이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농담이야.”

“그래…… 농담이라니 마음이 좀 놓인다, 야.”

아운이가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강강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물었다.

“언니야, 언니는 왜 그림을 그리냐?”

“동생아, 이 언니는 네 말투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구나.”

“그러냐아?”

강강이는 일부러 말끝을 길게 끌면서 웃었다.

“너는 왜 그리는데에?”

물어놓고 아차 싶었다. 그림 그리기 싫어서 가출했던 애라는데. 물어봐도 되나.

“나는 말이지이? 이렇게 보면, 세상이 그림으로 보인다?”

강강이는 끝을 올리며 말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나는 강강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대답했다.

“그럼 그걸 그리지 않을 수 없는 거야.”

강강이는 결론을 내듯 말했다. 그게 뭐야, 웃으려다가 응, 하고 말았다. 정말로 진지한 거구나.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이렇게 진지하게들 하고 있구나 싶어서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언니는, 언니는? 하고 재촉하기에,

“나는, 계속하고 싶었는데. 예전부터.”

“근데 왜 안 했어?”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왜 안 했냐면, 왜 진작 시작하지 못했냐면…….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강강이는 답을 재촉하지 않고 물었다.

“언니 일반부야?”

“그렇대.”

“미술 쪽으로 전공 안 할 거구?”

“음. 모르겠어. 그렇게까지 생각 안 해봤어.”

미술을 전공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그건 그냥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다를까? 강강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예중 시험 보기 전에, 미술은 계속하고 싶었는데 예중 시험은 보기 싫었어. 그때 다닌 화실은, 여기 오기 전에 다닌 덴데, 거기서는 막 맞으면서 그림을 그렸어.”

“맞아? 왜?”

“시간 정해놓고 그때까지 다 못 그리면 맞고…… 말해준 대로 안 그리면 맞고.”

“어딜 맞는데?”

“여자애들은 손바닥, 주로. 남자애들은 막 뺨도 맞고 그랬어. 나도 뺨 맞은 적 있어. 근데 되게 억울했어. 나는 그린다고 그렸거든?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엄마가 뭐라 안 그러셨어?”

“다 때리는 덴 줄 알고 애들 보내는 건데 뭐. 그리고 뭐, 많이 배웠어. 실력은 늘었던 거 같아.”

맞으면서 공부하는 것은 봤어도 맞으면서 그림 그리는 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다. 강강이가 말을 이었다.

“근데 나는 견지 형이 더 무서웠어. 때리는 것보다.”

“왜 무서웠는데?”

“그리기 싫으면 그리지 말라고 했는데, 진짜로 하는 말 같아서. 정말로 그리지 말라고 할까봐서.”

알 것 같다. 견지 형이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면 진짜 무서웠을 거다. 옆에서 아운이는 조용히 우리 얘기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그럼 예고 갈 마음은 있어?”

“글쎄, 아직은 몰라. 엄마는 그러라는데. 아, 아운이 언니, 예고 다녀.”

그럼 분위기 같은 거 알려줄 수 있겠네 했더니 아운이는 난처한 얼굴이 되어서 잘 몰라, 라고 말했다.

“원래는 무용으로 들어갔는데, 작년 말에 전공을 바꾼 거라서.”

아운이는 무용을 하다가 무릎을 다쳤다고 했다. 처음엔 빨리 나아서 밀린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다시는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럼 이제 다른 걸 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남 이야기하듯 담담했다.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하기 위해 엄청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은 이야기였다.

“예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거든. 그래서 미술반으로 옮기긴 했는데, 기초도 부족하고…… 거기 애들은 다 미술로 시험 보고 들어온 건데, 내가 가 있으니까 별로 안 좋아하고.”

“언니가 잘하니까 옮기게 해준 거지, 뭐.”

강강이 말에 아운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아운이는 그 부족한 기초를 쌓으려고 작업실에 다닌다는 말이었다. 예고생은 받지 않겠다는 견지 형을 설득해서 올해까지만 다닌다는 조건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무용을 하다가 미술로 바꿨다, 라는 건 내겐 상상이 안 되는 얘기였다.
아운이는 중학교는 무용으로 예중을 다녔다고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그림을 그리고 무용을 하는 아이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짐작할 수도 없어서 그냥 콜라를 벌컥 들이켰다. 아, 차가워!


오후에 다시 모였을 때 견지 형은 장소를 옮겼다. 큰길가 재래시장이었다. 견지 형은 두 시간, 말하고서 그 시장통에 우리를 버려두고 사라졌다.

생선비린내에 깨 볶는 고소한 냄새, 정신없도록 활기차고 선명했다. 이렇게 복작복작한 옛날 분위기의 시장은 참 오랜만이었다. 강강이랑 아운이랑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노는 기분이었는데, 곧 강강이는 생선가게에 꽂혀 거기에 두고 와야 했고 아운이는 그릇가게 앞에서 멈췄다. 혼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보았다. 빗자루며 양철 냄비에 호스, 밧줄까지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파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만물상이라고 붙여놓은 간판까지도 제멋대로면서도 나름 질서가 있다. 물건을 하나라도 잘못 빼면 우르르 무너질 것 같은, 아슬아슬하면서도 꽉 잡힌 균형. 그걸 그리기 시작했다.

“어머나, 학생, 잘 그리네?”

“네? 네? 아니요.”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이 말을 걸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걸 왜 그린대?”

하하. 저도 몰라요. 그리라네요. 그런데, 저도 막 그리고 싶어요.

아유, 이 좁은 데서 뭐 하는 거야, 학생, 비켜! 아니면 말도 없이 어깨를 밀치며 지나가는 아주머니들도 있다. 부대끼면서, 계속 그렸다. 사람들에 밀려 점점 길 가장자리로 몰려서, 종이를 휙휙 넘기며 보이는 것들을 그렸다. 눈치볼 것도 없고 망설일 것도 없다. 눈앞에 뭔가 그릴 것이 보였다. 나는 뒤처져 있는 게 분명하지만 이런 순간에는 그런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도 할 수 있다. 그릴 수 있다. 날개를 얻은 기분이었다.

두 시간 뒤에 다시 모였을 때는 스케치북도 너덜너덜하고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했다. 그리고 무척 뿌듯했다. 근처 건물주차장에서 다시 스케치북을 펴놓고 평가를 했다. 다들 잘했는데, 다들 좋았는데 내 그림도 좋았다.
이환은 그림을 그리다가 지나가는 아주머니한테서 귤을 받았대고, 태현이는 동네꼬마와 싸울 뻔했다지 않나, 모두 들뜬 기분으로 한마디씩 했다.


벌써 해질 때가 된 건지 하늘이 알록달록해지는데, 다들 하나만 더 그리자고 했다. 나도 저 하늘을 그리고 싶었다. 견지 형은 딱 십오 분만 주었다. 멀리 가지는 못하고 주차장 가장자리 시멘트 턱에 앉았다. 수채물감으로 색깔을 확확 칠하고 기다렸다. 적당히 마르고 나면, 수채색연필로 번지도록 그려봐야지……. 뭘 할지를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신났다.

기분이 좋아서, 방심했다. 가방에 넣어온 건우 오빠의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 문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앞부분 어딘가에,

─거리로 나서자, 구원이 왔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잠시 그리는 것도 잊고 건우 오빠의 스케치북을 보았다. 길과 나무와 하늘과 건물과 사람들. 이미 보았던 그림들이 다르게 보였다. 이 년 전 봄의 날짜. 그렇구나, 오빠도 여기 이렇게 길에서 거리를 그렸구나. 이 탁 트이는 느낌을 느껴보았던 거구나. 한 장 더 넘겼다. 글이 나왔다.

─오늘의 견지 형 어록. 그따위로 하려면 밥 로스 비디오나 봐.

쿡, 웃는데,

“초우야.”

견지 형이었다. 화들짝 놀라 스케치북을 덮었다. 견지 형의 시선이 스케치북으로 향했다.

“이건…….”

견지 형은 알아보았다. 스티커와 잡지에서 뜯어낸 사진들과 물감으로 꽁꽁 표지를 덮어놓은 건우 오빠의 스케치북을.

“이걸, 이걸 네가 어떻게?”

견지 형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 그 목소리.

“건우를 어떻게…….”

목이 메어왔다.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동생이에요……. 사촌동생이요.”

아주 오래,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침내 견지 형이 입을 열었을 때는 하늘이 어둑해진 기분이 들었다. 멀리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와 차소리, 경적소리가 들렸다. 아득했다.

“그래서, 온 거니?”

말이 안 나왔다. 그게 아니라, 나는……. 견지 형은 내 스케치북으로 눈을 돌렸다.

“색깔 예쁘다.”

견지 형 목소리의 색깔을 구별해낼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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