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견지 형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알고 싶었다.”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②
나는 자연스럽게 학생부 아이들 속에 섞였다. 계림 언니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나를 봐주다가도 견지, 초우 좀 봐줘, 말하면서 큰방으로 가버리곤 했다. 그럴 때면 견지 형은 인상을 썼지만, 나를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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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그림 그린다 하면 당연히…” - 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①
3
밤 열 시, 끝내지는 못했지만 대강의 형태는 잡혔다. 견지 형은 음, 괜찮다, 라고 짧은 평을 하더니 내일 와서 완성하라고 말했다. 이환은 벌써 다 했다며 놀고 있었는데 견지 형은 이게 뭘 다 한 거냐며 너도 내일까지 완성해, 라고 말했다. 가방을 챙기는데 이환이 성큼 다가와 옆에 섰다.
“초우야, 끝나고 뭐 해? 우리 놀러 갈까?”
깜짝 놀랐다.
“……왜요?”
“이럴 때는 어디로요, 하고 물어보는 거야.”
둘이서요? 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다행히도 입 밖에 내놓기 전에 이환이 답을 주었다.
“묘은이가 같이 가자는데.”
묘은 언니가 문가에 서 있었다. 내 눈과 마주치자, 날카롭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먹으러 가는 거였다. 별로 멀지 않은 골목 어귀의 편의점이 목적지였다.
“내가, 편의점을 되게 좋아하거든!”
이환은 싱글벙글 신이 났다.
“어느 편의점에서 무슨 신제품이 나왔는지 다 알아, 쟤는.”
묘은 언니가 덧붙여 말했다.
“쟤 몸에는 방부제와 화학조미료가 잔뜩 쌓여 있을 거야.”
“너무하다!”
이환이 어리광부리듯 우는 얼굴을 하자 묘은 언니는 피식 웃었다. 이환은 금세 얼굴을 펴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줄게, 초우야. 뭐 먹을래?”
처음 만난 사람이 성을 떼고 이름만 부르는 것은 싫다고 생각했는데, 이환이 부르는 것은 이상하게도 싫지가 않았다.
“매운 게 좋아, 좀 느끼한 게 좋아? 고기, 아님 해산물? 여기 이거 명란젓 맛 있잖아, 이상할 거 같은데 되게 맛있다?”
삼각김밥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더니 이환은 애정을 듬뿍 담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꼭 여기서 일하는 사람 같다. 이환은 삼각김밥에 샌드위치, 컵라면까지 몇 개씩 골라서 계산했다. 돈을 내려는데 이환이 굳이 내 것을 사준다고 했다.
“잘 먹어야 돼. 화실 생활의 오십 퍼센트는 간식이야.”
“나머지 오십 퍼센트로 그리고요?”
먹고 그리고 먹고 그리는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아니. 그리고 사십 퍼센트는 연애지. 나머지 십 퍼센트가 그림.”
“하.”
묘은 언니가 웃었다. 둘이 사귀나 싶었는데, 이환이 대뜸 물었다.
“나 어때, 초우야?”
뭐라고 해야 하지? 이환은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묘은 언니는 뒤에서 여전히 웃는 얼굴로 삼각김밥을 한 입 물었다.
“음……. 제 취향은 아니에요.”
“다행이다. 너도 내 취향은 아니야.”
먼저 아니라고 말해놓고서, 기분이 나빴다.
“어째서?”
“연하는 싫더라.”
“아하. 그럼 오빠랑 언니랑…….”
“거기까지.”
묘은 언니가 말을 잘랐다.
“쟤는 꼭 저래. 재밌나봐, 오해받는 게. 그걸 즐겨. 완전 마조히스트야.”
“뭐가.”
이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며 덮어두었던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묘은 언니가 내게 충고했다.
“얘 실실대는 거에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래. 자기랑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백 퍼센트 친절하니까.”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인데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인간은 원래 그런 거다. 자기와 상관있는 사람에게는 바닥없이 잔인해지듯이.
“너 들어온다고 했을 때, 견지 형이 안 된다고 했던 거지?”
이환이 불쑥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이환은 잠시 웃음을 지우고 김밥을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견지 형은 지금 학생부를 아주 없애려고 하거든. 작년 고3 입시 끝나고부터. 애들 많이 나갔지. 선생님들도 딴 데 가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왜요? 왜 없애는 건데요?”
묘은 언니가 느릿하게 말했다.
“견지 형 마음을 누가 알겠어. 그래도 끝까지 남은 애들한테 나가라고 강요는 안 하던데. 은근히 소심한 사람이니까.”
그 말에 이환이 다시 웃음 지었다. 버튼을 누르면 표정이 툭툭 바뀌는 장난감인형 같았다.
“근데, 전부터도 애들이 다른 화실만큼 많진 않았어. 그나마 중학생들은 태현이랑 싸우고 다 나갔고. 태현이 알지, 중3짜리? 초우야, 너도 걔만 조심하면 돼. 시비 걸면 무작정 피하고. 흐흐.”
이환 말로는 태현이가 작업실 일진회 짱이란다. 묘은 언니가 덧붙였다.
“근데 일진회에 걔 하나밖에 없어.”
그 말을 듣고 이환은 뒤로 넘어가며 웃었다. 말하는 투를 보면 이환도 묘은 언니도 태현이를 꽤 귀여워하는 것 같았다.
“중3 애들도 그랬고 고1 애들 중에서도 몇 명이나 태현이랑 싸우고 그만뒀어. 견지 형은 나갈 애는 나가라 그러고 신경 껐지. 태현이가 버티고 있으니 다른 애들이 나간 거야.”
견지 형은 그림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싸우든 말든, 맞은 애 엄마가 찾아와 난리를 치든 말든, 그림을 그려내기만 하면?그러니까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상관 안 한다는 것이다. 대신 그 그림의 영역에서는 누구도 감히 견지 형에게 대들거나 반항하지 못한다고 했다.
“견지 형, 고집 있어. 카리스마랄까.”
이환은 그놈의 카리스마가 평소엔 숨어 있는데 한번 돌면 장난 아니라며 마치 친구 얘기하듯 말했다. 말투가 무척 다정했다.
“견지 형의 원칙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싶은 방식대로 그린다야. 이게 훨씬 무서운 거라고. 생각해봐, 그리고 싶은 게 없으면 어쩔 건데. 어떻게 그리고 싶은지 모르면 어쩔 건데.”
“음, 그럼 아예 미술 하겠다는 생각을 안 하지 않을까요?”
이환은 금방 감탄하는 표정이 되었다.
“되게 똑똑하구나, 너.”
“그럼 넌 뭘 어떻게 그리고 싶은데?”
묘은 언니가 내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두 사람은 나를 비웃지 않았다. 이환이 말했다.
“그건 해봐야 아는 거더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리고 싶은 게 생기기를 기다리고만 있음 아무것도 안 돼.”
시작하면, 뭐가 되긴 된다. 시작했으니까 뭔가 되길 기대해볼 수 있다. 문득 묻고 싶었다. 혹시 작업실에 이런 사람 다녔던 거 알아요……?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이환이 말했다.
“견지 형은 너무 신경 쓰지 마. 가끔 방황도 하고 그런 거지. 괜찮아질 거야, 금방. 형이 작업실 두고 무슨 딴마음을 먹겠어.”
“너 꼭 남편 바람날까봐 걱정하는 부인 같아, 말하는 게.”
묘은 언니가 말했다. 이환은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여기는 작업실이잖아. 같이 작업하는 곳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서로 도와야 해. 기다려줘야 하고.”
그래서 화실이 아니라 작업실. 마음에 들었다. 이환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 같았다.
“가자.”
캔을 꾹 눌러 납작하게 만들면서 묘은 언니가 말했다. 싫어, 더 놀자, 그런 반응을 기대했는데 이환은 순순히 쓰레기를 집었다.
이환과 묘은 언니는 지하철을 타러 가고,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곧 허물어져버릴 것 같은 집이 작업실의 이미지처럼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림자가 있는 게 어두운 구석 하나 없이 밝기만 한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난 너무 행복해, 하는 얼굴로 웃고만 있는 것보다는 틈이 있고 그늘이 있고 빈 곳이 있는 사람이 대하기 편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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