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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은 믿고 국가는 믿지 못하는’ 아이러니

[박권일의 if] 국가가 침몰한 곳에서 인양된 낯선 아이러니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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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새로운 애국주의의 출현에는 명백한 물적 배경이 존재한다. 세계경제와 동아시아 대중문화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지위의 상승이다. 국내적으로 한창 경제성장에 매진하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이란 국가는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조차 없었다.

적대vs경쟁: 새로운 애국주의의 탄생

국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대중문화적 차원에서 처음 드러난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광장에 모여 “대한민국”을 외치는 거대한 군중의 출현은 단순히 국가주의라거나 민족주의의 표출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이질적인 현상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문화비평가 이택광은 그 현상을 “월드컵 주체의 탄생”이라 명명하기도 했는데, 그는 월드컵 주체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유학시절의 흥미로운 경험을 소개한다.

“유학시절 나는 한국에서 온 어린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386 주체한테서 흔하게 발견되는, 선진국에 한수 배우러 온 분위기를 전혀 풍기지 않았다. 당시 이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던 나를 비롯한 여러 386 주체에게 이것은 분명 놀라운 징후였다.”

여기서 이택광이 묘사하고 있는 건 바로 ‘콤플렉스가 없는 세대’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예를 들어, 일제식민지 세대에게 일본은 평생 극복하기 어려운 굴욕감과 열등감을 안겨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1945년 무렵에서 1960년대 말 사이에 태어난 세대들,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세대에게 콤플렉스를 안겨준 나라는 미국이었다. 이들은 일본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고 반면에 미국에 대해서는 반감과 두려움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가졌다. 소위 ‘386세대’의 격렬한 반미주의의 반대편에는 그에 못지않게 격렬한 선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세대들의 일본과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는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구선진국에 대한 공통적인 열등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 세대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세계최강대국이며 남한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콤플렉스를 안겨줄 정도로 심각하고 무거운 존재는 아니다. 다른 선진국가들에 대한 시각도 대체로 이런 수준에 머무른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다른 나라나 다른 사람, 다시 말해 외부를 바라보는 프레임(frame)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여기서 말하는 프레임이란 쉽게 말해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을 특정하게 틀 지우는, 일종의 ‘생각의 거푸집’이다). 그것을 ‘적대의 프레임’과 ‘경쟁의 프레임’으로 도식화해볼 수 있다.


과거 세대는 타자를 바라볼 때 ‘친구’와 ‘적’의 이분법을 적용한다. 그래서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이고, 적의 적 또한 나의 적이다. 이 ‘친구/적’의 구분은 독일의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을 논할 때 언급했던 유명한 이분법을 연상시킨다. 반면 그 이후 세대들은 ‘친구/적’의 이분법보다 ‘협력자/경쟁자’의 이분법에 더 익숙하다. 이 두 가지 사고는 얼핏 비슷할 것 같지만 실은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다. ‘친구/적’의 이분법은 기본적으로 ‘적대의 정치’이며 자기가 속한 집단이 지향하는 정의를 관철시키려는 투쟁이다. 이 싸움은 가치를 둘러싼 전면전이며 그것은 ‘싸움의 룰을 만드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이 투쟁에서 ‘룰’을 준수하느냐 아니냐는 부차적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누가 룰을 만드냐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의 고유한 차원이 열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적대의 정치가 극단으로 흐를 경우, 그것은 상대를 절멸시키는 잔혹성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한편, ‘협력자/경쟁자’의 이분법은 달리 표현하자면 ‘경쟁의 경제’이고, 이 프레임이 전제하고 있는 주체는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개인이지 집단이 아니다. 개별적인 사람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협력하거나 치열하게 경쟁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룰(rule)’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는 신성불가침의 권리이기 때문에 그것이 서로 충돌했을 때 판단을 내려줄 심판의 존재가 필수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프레임이 바라보는 ‘사회’라는 것은, 월드컵 축구경기와 같이 명백한 규칙이 있는 스포츠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래서 이런 프레임으로는 집단끼리의 정치적 갈등이라는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고, 룰 자체를 바꾸는 싸움을 벌이거나 정당화하기도 어렵다.

양쪽 프레임 중 어느 것이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세대가 다르다고 해서 어느 한쪽 프레임에 일방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기존의 애국주의 혹은 국가주의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관이 현실에 출몰했다는 점이다. 그 새로운 국가관은 2002년 월드컵 때와는 다소 다른 모습으로 2005년 황우석 사태, 2007년 인터넷을 달군 심형래 감독의 <디워> 논란 등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과거처럼 공동체의 생존이나 명예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엄숙하고 낡은 애국주의’가 아니었다. 악랄한 북괴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반공주의적 애국주의도 아니다. 새로운 애국주의는 앞서 말한 경쟁의 프레임에 기반한, ‘국가경쟁력 담론’으로서의 애국주의다. 그렇다고 이 애국주의가 단순히 자기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경쟁력이 강하다는 자부심의 표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나라를 사랑하는 데는 명백하고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태도에 가깝다. 요컨대 공동체 그 자체나 공동체의 어떤 숭고한 가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국가경쟁력이 개인과 기업의 경쟁력과 이윤축적에 도움을 줄 거라는 믿음을 근거로 삼는 애국주의인 것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국익주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새로운 애국주의의 출현에는 명백한 물적 배경이 존재한다. 세계경제와 동아시아 대중문화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지위의 상승이다. 국내적으로 한창 경제성장에 매진하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이란 국가는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조차 없었다. 1987년 3,364달러였던 1인당 GDP는 2002년 11,485달러에 이르렀고,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경제규모는 계속 세계 10위권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또한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은 아시아 대중문화 시장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어서 ‘한류 문화제국주의’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불과 20년 전인 1990년의 한국 상황과 비교해보아도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한편으로 이것은 남북한 간의 엄청난 경제적 격차로 인해 ‘체제경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의 남한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북한을 ‘체제의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반드시 통일해서 같이 살아야 할 한민족으로 북한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보다는 통일 과정에서 치러야 할 천문학적 비용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 이들에게 북한은 굶어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 집에 데려올 생각은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먼 친척’일 뿐이다.

‘국익은 믿고 국가는 믿지 못하는’ 아이러니

2005년 ‘황우석 사태’가 한창이던 당시 일간지에 실린 글 하나가 많은 시민들의, 특히 황우석 교수에게 우호적이던 사람들의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중앙일보」의 의학전문기자 홍혜걸이 쓴,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지난해 기자는 영국 학술잡지 『네이처』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황우석 교수의 업적보다 난자의 출처가 궁금했던 것이다. 겉으론 생명윤리를 내세우지만 속으론 연구진에 대한 흠집내기 의도가 역력해 보였다. (……) 우리가 뿌린 씨앗인데 남들에게 열매를 빼앗길 수 없다. 먼저 분열된 국론을 통일해야 한다.”

홍혜걸의 글은 얼핏 낡은 애국주의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줄 신기술의 개발과 이에 대한 선진국의 ‘질투’를 자의적으로 설정한 뒤에 세계시장의 이 치열한 경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1등 강박증’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설명한 새로운 애국주의, 즉 국익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논리들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었는데, 2007년 심형래 감독의 SF영화인 <디워> 개봉 당시 이 영화의 완성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던 네티즌들의 논리 역시 정확히 홍혜걸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앞서 젊은 세대의 특징으로 들었던 선진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옅어지는 현상과, 황우석 사태 등에서 보이는 국익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현상은 얼핏 서로 상충하는 현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 현상은 모두 국가라는 ‘초월적 권력’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이 보여준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들 중에서 그나마 건강하고 긍정적이라 평가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이제 사람들은 정부와 군의 공식 조사발표조차도 덮어놓고 믿기보다는 이상한 점을 캐묻고, 맥락을 따지고, 국가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추궁한다. 국가를 물신화하거나 신비화하지 않고 언제든 잘못을 저지르고 시민들을 기만할 수 있는 하나의 행위주체로 평가한다는 면에서, 분명 이러한 태도는 진일보한 것임이 틀림없다. 절대주의 시대나 군사독재 시기처럼 국가의 명령에 의문조차 제기하지 못하던 시절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태도가 내장하고 있는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그것은 이것이 은폐하고 있는 어떤 진실 때문이다. ‘시장권력이 국가권력보다 위에 있다’는 진실.

이에 대해 세상을 떠난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을 포함해서, 소위 ‘민주화세력’이 이해한 민주주의는 이랬다. 시민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억압했던 국가권력이라는 괴물을 해체하고, 그 괴물의 힘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 그들은 이 목표를 위해 국가라는 괴물과 치열하게 싸우다 죽거나, 다치거나, 멀리 도망쳤다. 어쩌면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크고 작은 희생에 경의를 표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국가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과 국가권력을 시장으로 넘겨주는 것을 동일시했다는 점이었다. 민주화세력뿐만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 또한 그것이 민주주의라 생각했다. 민주화 10년은 곧 ‘민영화 10년’이었다. 그 결과는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비극적이다. 국가와 재벌의 살림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데 정작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빈곤해졌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워킹 푸어(working poor)의 나라, 불안정노동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가 됐다. “국가는 못 믿겠지만, 국익은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가장 서글픈 코미디가 된다. 국부(國富)가 개인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국익’이란 건 결국, 실질적 내용이 없는 하나의 물신(fetish)에 불과한 까닭이다. 새로이 출현한 ‘국익주의’는 그래서 낡은 애국주의만큼이나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런 태도는 천안함 사건을 바라볼 때도 예외가 아니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로 고조되는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전쟁에 반대했다. “전쟁만은 안 된다!” “한반도의 평화가 최우선이다!” 옳고 당연하다.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로 꼽은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경제가 파탄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얼마든지 다음과 같이 바뀔 수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해야.’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활력을 잃어가던 경제를 살린 전쟁은 얼마나 많았던가. 오늘날 한국사람들이 계몽된 시민의 모습으로 “국가권력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할 때,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이 은밀히 의지하고 있는 건 시장권력에 대한 확신이다. 한편, 시장권력에 대한 믿음이 근거하고 있는 건 국가권력의 악덕 또는 무능이다. 무한히 빙글빙글 도는 일종의 순환논리인 셈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국가에 대한 불신이라는 현상을 ‘깨어 있는 시민들의 이성’이라 일방적으로 미화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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