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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존재에 대한 물음들

『시지프 신화』,『우연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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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세계에 던져진 인간, 인간은 왜 사는가?

시지프 신화

 

삶과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 대략 사춘기를 지날 무렵부터가 아니었던가 싶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의문스러웠고, 그 의문에 답을 찾을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학교에서는 인간 세포는 미토콘드리아니 리보솜이니 하는 것들로 이루어졌고,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니 호모에렉투스니 하는 진화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는 따위들을 배웠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지식이 아니었다. 내가 왜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으며 삶에는 무슨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 따위였는데 학교에선 이런 의문에 아무런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렇게 삶과 존재에 대한 의문이 생길 경우, 사람들은 종교나 책을 통해 답을 찾으려 하기 마련이다. 나도 두 가지 다 해보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종교에서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종교를 믿을 ‘신(信)’에 우러를 ‘앙(仰)’을 써서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믿음과 받듦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단 믿어야 답을 찾을텐데, 나는 ‘답을 찾아야 믿는다’ 쪽에 가까웠으니 애당초 접근방식이 잘못됐던 것이다. 일 년 남짓 교회에 다녔으나, 내 눈에는 교인들의 이런저런 추태들만 보이고 삶에 대한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만일 창조주가 있다면 아주 무능하거나 무관심한 존재이리란 생각까지 들었다. 아마 나는 종교를 마음으로 믿지 않고 머리로 믿으려 했던 모양이다.

사실 삶과 존재에 대한 의문을 나 혼자만 느꼈을 턱이 없다. 그건 까마득히 오랜 옛날 우리 조상들도 느낀 의문이었으며, 까마득히 먼 미래에 우리 후손들도 느낄 의문일 것이다. 누구나 자기 고민은 크고 심각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그와 비슷한 고민을 너도 나도 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고, 남들 다 하는 고민을 자기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좀 싱거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누대에 걸쳐 인간들의 온갖 잡다한 고민들을 기록해놓은 것이 바로 책이다. 친구가 꿔간 돈을 갚지 않을 때는 어찌 대처해야 할 것인가부터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과연 어찌 전개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삶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적은 책들은 정말이지 ‘입 달린 사람이면 누구나 한마디씩 하고 갔다’해도 좋을 만큼 많은데, 다만 내가 현재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책 내용이 마음에 와 닿기도 하고 안 와 닿기도 할 뿐이다. 내 경우에는,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가 마음에 확 와 닿은 책이었다. 그 책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물론 자살을 권하는 책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모순과 부조리인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하라는 얘기이다. 가령, 어떤 사람은 재벌 2세로 태어나 평생 떵떵거리고 살며,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 난민촌에서 태어나 허기와 질병 속에 죽어간다. 왜? 여기엔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는 사실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다. 운명이니 전생의 업보니 신의 뜻이니 하며 억지로 해명하려 해봐야, 모순만 더 느껴질 뿐이다. 사실 존재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 토끼는 왜 토끼이며, 여우는 왜 여우일까? 무척 궁금하기는 해도 정답이 있을 턱이 없다. 그냥! 그냥 존재하는 거니까.

『시지프 신화』는 내가 인생에 던지는 질문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삶이 힘들 때마다 종종 인생에 대해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곤 한다. 왜 살지? 왜 나는 이런 부모한테서 태어났지? 왜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났지? 왜 나는 키가 작?? 왜 나는 머리가 나쁘지? 등등. 이런 질문을 던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던져봐야 뾰족한 해결책도 없이 속만 상할 뿐이다. 우리가 정작 던져야 할 질문은 태어난 조건을 안고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어떻게? 아마 요즘 초등학생들한테 물으면 “잘!”하고 대답할 것이다. 맞다. 잘 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거지? 나는 『시지프 신화』에 매료된 나머지 니체나 사르트르 등의 다른 실존주의 사상서들도 열심히 탐독했지만, 내 독해력이 워낙 부족했던 탓인지 ‘잘 살라’는 말 말고는 딱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존재에 대해서는 잘 피력했으나, 그래서 뭘 어쩌란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뭐, 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리란 법은 없겠지만.

참고로, 시지프는 커다란 돌덩이를 언덕 위에 올려야 하는 지옥의 형벌을 받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언덕 꼭대기에 닿으면 돌덩이는 다시 밑으로 굴러떨어지므로 그는 이 일을 끝없이 반복해야 했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이런 의문이 생긴다. 시지프가 돌덩이를 결코 언덕 꼭대기에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수없이 반복한 일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빤히 알면서도 한 것이다. 삶의 부조리함을 빤히 알면서도 하고 또 하는 것, 그리고 신의 형벌을 인간의 기쁨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우리가 부조리한 삶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까뮈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까뮈는 소설 『이방인』에서 낯설고 부조리한 삶의 모습을 그린 반면, 『페스트』에서는 부조리한 삶에 맞서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페스트가 발생하여 도시는 고립되고 시민들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이런 재앙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 일이며 불가항력적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대책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자살을 꾀하는 사람, 신의 뜻으로 여기는 사람, 죽음을 앞두고도 제 이익만을 챙기는 사람…… 까뮈는 재앙과 묵묵히 싸우는 사람에게 손을 들어준다. 설령 달걀로 바위를 치는 식일지라도 삶의 부조리함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사람.

나는 까뮈와 실존주의 사상에 매료되어 대학도 불문학과를 선택했지만, 정작 대학에 들어가서는 관심이 시들해지고 말았다. 아마 그 시절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한국사회에 엄청난 격변이 일어났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18년 동안 장기집권 하던 대통령이 부하가 쏜 총에 맞아죽고, 그 혼란한 틈을 이용해 또 다른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10?26사건과 12?12사태였다. 그리고 이듬해 봄,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이 광주를 비롯한 전남 일대에서 시민들을 수백 명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여러 상황을 고려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지만, 사건의 본질은 ‘광주시민학살’이다. 무장군인들이 맨손인 시민들을 총과 곤봉으로 죽였으니 일방적인 학살인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이듬해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때 대학과 사회 분위기는 어색한 침묵뿐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 서먹서먹한 분위기. 오직 방송과 신문들만 떠들어댔는데, 그 소리는 모두 전두환 찬양 일색이었다. 그래서 이 해 봄을 우리는 ‘침묵의 봄’이라고 불렀다.

나는 개인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실존주의적 설명이 여전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냥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그래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구속 없이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사회가 존재하는 방식은개인과 자연이 존재하는 방식과는 좀 다르다. 가령, 페스트 같은 자연 재앙은 불가항력적일지라도 군사 쿠데타나 시민 학살 같은 사회재앙은 얼마든지 막고 피할 수 있는 일이라는 얘기이다.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실업 문제나 환경파괴 문제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회문제들은 그저 우연히 주어진 재앙이 아니며, 우리 스스로 선택한 재앙이다. 우리는 자기가 껴안고 태어난 자연 조건들(가령 부모, 민족, 유전자 따위의)은 바꿀 수 없지만, 우리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사회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나는 개인의 존재 문제보다 사회의 존재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 결과로 F학점으로 가득 찬 성적표만 받게 되었지만 학과 공부와 상관없는 다른 공부들은 많이 했다. 결국 학과를 잘못 선택한 셈이었다. 존재 문제에 관심이 있었으면 철학과로 갈 일이지 왜 불문학과로 갔는지 모르겠다. 사실 순전히 까뮈 때문에 갔지만, 돌이켜보면 학과는 그런 식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었다. 까뮈가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는 이유로 불문학과를 선택하는 건 마치 까뮈가 빵을 주식으로 삼는다는 이유로 제과제빵학과를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 꼴이니까.


우연의 음악

우리는 매순간 이런저런 선택들을 하며 살아가지만 내가 한 선택이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가 없다. 진학, 취업, 결혼처럼 삶의 중대 고비가 될 선택뿐 아니라, 퇴근길에 버스를 탔느냐 지하철을 탔느냐 같은 사소한 문제로도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가령, 버스에서 우연히 눈이 마주친 남녀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는, 영화장면 같은 일들이 실제로도 흔히 일어난다.

결국 우리는 그 결과를 전혀 알 수 없는 채로 매순간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다 따지며 살 수는 없으며, 설령 그 일이 가능하다 해도 우리가 선택한 인생 가운데 어떤 인생이 더 좋은 인생인지 장담할 수도 없다. 이런 삶의 난해함이 늘 우리의 선택을 어렵게 한다. 자기감정에 충실하게 살아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라. 사람들은 하기 쉬운 말로 흔히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감정과 기호도 쉽게 바뀌기 마련이다. 가령, 우리는 오늘은 가수가 되고 싶어해도, 내일은 요리사가 되고 싶어할지 모른다. 로맨스영화를 보면 영원한 사랑이니 불변의 사랑이니 너스레를 떨지만, 실제론 사랑의 감정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로맨스가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은 현실에선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때그때 감정과 기호에 따라 삶을 선택한다면, 그건 ‘충동구매’나 다를 바 없다. 충동구매를 해도 상품이라면 반품이 가능하지만, 인생은 반품도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 경험으론, 인생은 자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우연들이 선택한다. 내 경우를 예로 든다면, 나는 원래 작가가 되려고 했던 게 아니다. 정말이지 그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우연들이 거듭 일어나 어느 순간 작가가 되어 있었다. 마치 친구가 잠깐 옷가게 좀 봐달라고 해서 점원 노릇하다가 옷장사가 천직이 돼버린, 그런 꼴이랄까? 내가 그리 유별난 경우는 아니다. 내 생각엔 인류의 90%쯤은 이런 식으로 인생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자기가 꿈꿨던 대로 인생을 선택한 사람은 10%쯤 될까 말까 하고, 그 선택이 대단히 옳았다고 믿는 사람은 그 가운데 또 10%쯤 될까 말까 할 것이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주위 사람들한테 직접 조사를 해봐도 좋을 것이다. 가령 “아버지는 어릴 적 꿈이 부동산 임대업자였나요?” 등등.

꿈은 이루어진다? 무척 달콤한 말이지만, 실제로는 인생은 꿈꾼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꿈이 쉽게 이루어지는 거라면, 그런 말이 세상에 떠돌 턱이 없다. 하나 마나 한 말일 테니까. 말하자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 자체가 꿈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말들이 세상을 떠도는 이유는, 환상이 현실보다 더 잘 팔리기 때문이다. 현대의 장사꾼들은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욕망을 팔고, 대개 그 욕망은 환상으로 포장되어 있기 마련이다. 광고나 영화, TV방송 따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TV보다는 책을, 그것도 정직하게 쓴 책을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냉정히 말하면, 우리는 인생을 선택할 수 없고, 우연이 선택해준 인생을 충실하게 사느냐 허술하게 사느냐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말이 꿈 많은 젊은이들한테는 다분히 허무주의적으로 들리겠지만, 실제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이게 그리 맥 빠지는 얘기는 아니다. 헛된 기대를 품고 이 일 저 일 기웃거리기보다 자기 앞에 무슨 일이 주어지든 열심히 하는 게 더 현명하고 현실적일 수도 있으니까.

 

소설은 대개 인생의 축약판이기 마련인데, 여러 현대소설들은 우연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령 코맥 맥카시의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등장하는 시거는 다분히 철학적인 살인마여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그저 우연의 결과일 뿐이라고 믿는다. 그동안 ‘우연히’ 살인자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있었고, 이제 ‘우연히’ 살인자를 만났기 때문에 죽는 것일 뿐이라는 논리다. 그래서 그는 희생자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동전을 던져 앞면인지 뒷면인지 맞추면 살려주고, 못 맞추면 죽이는 것이다. 결국 희생자의 죽음은 살인자의 선택이 아닌 우연의 선택일 뿐인 셈이다. 자, 우리는 이 논리를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에 등장하는 소방관 나쉬는 ‘우연히’ 아내를 잃고 혼자 살다가, ‘우연히’ 거액의 재산을 상속받고, ‘우연히’ 도박판에 끼게 되어, ‘우연히’ 로또에 당첨되어 거부가 된 백만장자에게, ‘우연히’ 전 재산을 몽땅 잃는다. 백만장자는 그에게 노름빚을 갚는 대신 돌덩이로 돌담 쌓는 일을 시킨다. 나쉬는 이 모든 우연들이 빚어낸 현실 앞에 묵묵히 돌덩이 나르는 일을 한다. 시지프의 현대판 모습인 셈이다. 자, 우리에겐 이 우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두 소설 모두 실존주의 사상을 담고 있지만, 사실 실존주의는 애당초 ‘신의 부재’를 전재로 탄생한 철학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세상과 인생을 ‘신의 섭리’로 해석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해답은 사실상 우연밖에 없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곳에 현재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며, 심지어 왜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그냥’과 ‘우연히’ 말고 다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 ‘신의 부재’는 곧바로 ‘가치 판단의 부재’를 불러일으킨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무슨 기준으로 판별할 것인가. 살인마 시거의 논리가 바로 그런 것이다. 사실 종교 교리의 영향 없이 ‘살인은 왜 나쁜가’를 정확히 논증해내기는 쉽지 않다. 기껏해야 ‘살인죄’ 같은 법률을 들 수 있겠지만, 이것도 시거처럼 법을 겁내지 않는 ‘무법자’한테는 통하지 않는 논리이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책 제목이 암시하는 바가 그렇다. ‘노인’으로 상징되는 전통 가치가 무너졌을 때, 남는 것은 혼란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비극은 꼭 신의 부재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니다. 신이 외출한 자리에 돈이 들어와 우상 노릇을 하고 있는 게 더 큰 비극이다. 인간이 원래 탐욕스런 동물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삶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알 수 없으니, 돈을 목표로 삼는 것뿐이다. 그런데 돈을 많이 갖게 되면, 그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까?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할까? 『우연의 음악』에서 내쉬가 그런 경우이다. 우연히 거액의 돈을 상속받았지만, 그 돈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그가 한 일이라곤 자동차를 타고 목적 없이 아무 도로나 달리는 일뿐이었다. 도박으로 돈을 몽땅날리고 난 뒤, 그는 도리어 돌담 쌓는 일에서 위안을 찾는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지만, 뭐라도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삶과 존재에 대한 물음은 사춘기 시절부터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히 마땅한 답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여기엔 의문만 있을 뿐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자기 앞에 놓인 삶에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고민하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돌이켜보면 어떤 삶을 살아도 후회스럽긴 다 마찬가지이다. 우연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선택해주든, 열심히 남김없이 산 사람만이 그나마 덜 후회할 뿐. 이 책 저 책 읽으며 내가 얻은 결론은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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