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의 강국답게 이탈리아에서는 예전부터 먹는 것으로 놀리길 좋아했나 보다. 폴렌타(Polenta, 옥수수 가루에 물을 부어 오랫동안 끓인 죽)를 많이 먹는 이탈리아 북부 사람들은 폴렌타 식충이(Mangia Polenta), 파스타를 많이 먹는 시칠리아 사람들은 마케로니 식충이(예전에는 파스타를 마케로니라 불렀다)란 뜻의 만자마케로니(Mangiamaccheroni), 나폴리 사람들은 야채 식충이, 만자폴리아(Mangiafoglia)라고 불렀다. 그럼 피렌체 사람들은 뭐라고 불렸을까? 바로 콩 식충이(Mangia Fagioli)다.
콩이 최고의 웰빙 식품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 이 말은 그리 칭찬이 아니었을 것이다. 매일같이 반찬으로 된장과 밭에서 난 푸성귀만 드셨다는 할머니들의 한탄처럼 말이다. 이탈리아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의 1585년 작 <콩을 먹는 남자>만 봐도 그렇다. 고생기 그득한 사람이 나무 숟가락 가득 콩을 떠서 입에 털어 넣는 그림인데, 그림 속 그가 참 안쓰럽기만 하다. 어쨌든 시대를 불문하고 콩은 항상 그래 왔다. 먹기 편하다. 요리하기 까다롭지 않다. 어떻게 요리해도 그 심심한 맛은 변함이 없다. 영양가도 높고 비싸지도 않다. 그래서 거칠지만 정직한 토스카나 요리와 잘 어울린다.
콩은 주요리에 곁들여 먹는 콘토르니(Contorni, 우리 식의 야채 반찬)로 데쳐 먹어도 좋고, 수프에도 자주 들어간다. 피렌체의 된장찌개라 불러도 좋을 리볼리타(Ribollita 빵, 콩, 토마토, 검은 양배추 등이 들어간 토스카나 수프)에도, 겨울철 단골 요리인 파스타 콩 수프(Pasta e Fagioli)에도 하얀 강낭콩, 토스카나 콩(Toscanelli)은 빠지지 않는다. 토스카나 사람들은 콩 요리를 무척 좋아해서 삶은 콩에 질 좋은 올리브유만을 쳐서 담백하게 먹기도 한다. 신선한 올리브유에 담백하면서 심심한 콩이 어우러지면 토스카나의 진짜 향토 맛이 난다.
피렌체에서 흥겨운 토스카나 만찬을 즐기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나온 음식은 파졸리 알 올리오(Fagioli all‘Olio)였다. 처음에는 그냥 맑은 국물의 콩 수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가득 담긴 국물이 올리브 오일일 줄은……. 에메랄드빛 신선한 올리브 오일 한 대접에 하얀 토스카나 강낭콩이 가득하다. 멀쩡한 요리에 올리브 오일을 반병씩 들이붓는 사람들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그런데 세이지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그 수프를 몇 스푼 떠먹고는 알게 되었다. 풋내 날 정도로 신선한 올리브유와 담백한 콩은 썩 잘 어울렸다.
제철의 올리브유와 토스카나 콩, 그리고 세이지 잎 몇 개를 넣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음식. 피렌체에서는 고기 요리를 먹을 때 이것을 종종 곁들인다. 우리와 도저히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맛이지만 굳이 예를 들자면 고깃집의 ‘동치미’ 정도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시원한 국물 대신 올리브유, 무 대신 토스카나 하얀 강낭콩이다. 분명 이쯤에서 속이 느글느글하여 얼굴을 찌푸리는 분도 있을 것 같아 올리브유에 대해서 조금 더 소개해 본다.
10월 말은 토스카나 지방에 올리브 수확이 시작되는 철이다. 토스카나 지방은 이탈리아에서 올리브 수확량의 20프로 정도를 차지하는 곳. 수확된 올리브는 압착기로 짜는데, 그 일을 하는 곳을 프란토이오(Frantoio)라고 한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참기름 짜는 방앗간 정도가 되겠다. 그곳에서 짠 신선한 올리브기름을 듬뿍 넣은 파졸리 알 올리오. 갓 짠 신선한 올리브유는 풋내가 날 정도로 담백하다. 콩의 무덤덤한 매력과 썩 잘 어울린다.
사실 콩이 두 눈 번쩍 뜨일 정도로 특별한 맛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우리가 매일 먹는 두부나 된장, 콩밥처럼 콩은 참 믿음직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