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예스 책꽂이 > 김진경의 ‘신화로 읽는 세상’
1. 한국의 미는 곡선의 미일까?
80년대 필화 사건으로 서대문 구치소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지은 감방의 다다미도 없는 마룻바닥에 앉아 있노라면 몹시 춥다. 그래서 겨울엔 솜을 두툼하게 둔 간편 한복을 차입해 입는다.
이 겨울 한복을 대개 옥창 밖으로 보이는 뒷산에 진달래꽃이 지고 복숭아꽃이 피는 4월 말까지는 입는다. 봄에는 내복까지 입고 겨울 한복을 입으면 더우니까 대개 러닝, 팬티만 입고 그 위에 겨울 한복을 입는다. 그러면 봄바람이 소매 끝의 열린 틈으로 들어와 생선의 배처럼 불룩한 팔 부분에서 체온과 뒤섞여 휘돌며 곰실거리는데 그 느낌이 참 대단하다. 어느 봄날 옷 속으로 들어와 체온과 뒤섞이는 봄바람을 음미하며 창밖 산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를 바 라보다가 문득 참 한가한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국의 미는 과연 곡선의 미일까?’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한국의 미는 곡선의 미 운운하는 수필이 있었다. 멋들어지게 적당히 구부러진 기와집의 추녀, 한복의 맵시 등을 예로 들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그 글을 배울 때는 제법 그럴듯하게 여겼는데 한복을 입고 생활하다보니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복의 곡선이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복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복의 곡선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다.
한복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복의 아름다움은 바람의 아름다움이다. 한복은 바람 주머니로 되어 있는 옷이다. 저고리의 팔 부분이며 불룩한 바지, 양장처럼 짧거나 밑이 퍼지지 않고 오므라드는 한복의 치마가 그렇다. 한복의 보온방식은 바람을 차단해서 보온하는 방식이 아니다. 저고리 소매는 바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조금 열려 있다. 조금씩 들어오는 바람은 체온과 섞여 따뜻해지고, 따뜻해진 바람은 불룩한 바람 주머니에서 곰실거리면서 뒤에 들어오는 바람과 끊임없이 섞이며 체온과의 온도 차를 줄인다. 그럴 때 따뜻해진 바람의 잔가닥들과 덜 데워져 찬 느낌을 주는 바람의 잔가닥들이 뒤섞이며 살갗에 닿는 느낌이 참 대단하다. 한복의 곡선은 바람 주머니 옷을 만들다보니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복만이 아니다. 음식문화도 그렇다. 한국의 음식문화는 발효가 특징이다. 발효에는 바람이 결정적이다. 조기는 영광 법성포의 바람 속에서 말려야 맛있는 굴비가 되고, 홍어는 나주 영산포의 바람 속에서 삭혀야 제맛이 나고, 과메기는 영일만 바닷가의 겨울바람 속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말려야 제맛이 난다. 김치, 간장, 된장, 고추장, 젓갈들이 제맛을 내려면 각자에 맞는 적절한 바람을 만나야 한다. 한옥도 마찬가지다. 한옥은 바람을 완전히 차단해서 보온하는 집이 아니다. 한옥은 숨을 쉬는 집이다. 흙벽은 바람을 다 막지 않고 조금씩 드나들게 한다. 창호지 문도 마찬가지다. 창호지 문은 바람을 완전히 막는 문이 아니다. 바람을 부분적으로 통과시킨다. 그래서 겨울에는 문풍지를 달아 통과하는 바람의 양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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