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통속, 신파, 지독한 사랑(1/2)

‘우울증 환자’를 읽다 _ 조안 윈 Joanna Wynne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조안에게는 집 밖으로 나서는 것조차 너무나 큰 두려움인데 우리들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니 우리들로서는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우울증 환자’를 읽다 _ 조안 윈 Joanna Wynne

“혹시 우리는 결혼이란 걸 너무 빨리하는 건 아닐까요? 도대체 왜 이삼십 대 철부지 시절을 결혼 적령기라고 부르는 걸까요? 겪어보니 진짜 사랑은 오십 대는 돼야 할 수 있는 거 같은데 ……. 오십 대에 첫사랑에 빠졌다는 게 어떻게 들릴지 알아요. 나도 어렸을 땐 늙은이들이 사랑한다, 어쩐다, 그러면 우습고 징그러웠으니까. 솔직히 저는 연애를 꽤 여러 번 해봤고 결혼도 해봤지만, 오십 대 중반에 만난 이 남자가 진짜 첫사랑이에요.”

“나도 가끔 이게 꾀병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요. 이렇게 살아가기는 나도 정말 싫으니까. 산다는 것 자체가 빡빡하고 어렵고 힘드니까.” 그러고 보니, 조안을 만나기까지 쉽지 않았다. 〈리빙 라이브러리〉에서 처음 만난 조안과 보다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따로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내긴 했는데, 약속을 잡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끊임없이 전화를 해도 안 받기 일쑤였고, 이메일은 서너 번을 보내야 겨우 회신이 왔다. 게다가 조안은 그렇게 겨우 잡은 약속을 세 번이나 취소했다. 비싸도 너무 비싸게 군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도 바람을 맞으면 아예 만남을 포기할 각오까지 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우울증이라는 병이었다니.

말을 마친 조안은 한숨을 푹 쉬었다. 우울증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증상인데. 그러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어봤다. “혹시 집 현관문을 여는데 어려움을 느껴본 적 있어요?” 그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현관문 이야기를 갑자기 왜 하는 걸까? 왜 문을 못 연다는 걸까? 멍하니 있는 나에게 그녀가 다시 말을 건넨다.

“현관문을 여는 행위 자체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세요?” 옷을 잘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외출을 준비를 다 했는데, 막상 그 현관문을 열지 못해서, 문지방을 넘지 못해서 한 시간 이상을 망설이고 또 망설인다는 그녀. 그렇게 서성이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숨어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이거나 너무 변덕스럽다고 생각하거나, 꾀병이라고 비웃었다. 조안에게는 집 밖으로 나서는 것조차 너무나 큰 두려움인데 우리들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니 우리들로서는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영국에 처음 왔을 때 유독 내 눈에 자주 띄었던 것 중 하나가 정신병원이었다. 영국에는 종합병원에도 정신 질환 병동이 꼭 딸려 있을 정도로 이상하리만큼 정신병원이 많다는 것. 참 신기했다. 거기에다 특수한 심리치료와 상담 치료를 담당하는 사설 기관이나 자선단체까지 합하면 과장을 보태어 영국은 방방곡곡 정신 질환 환자를 위한 시설로 가득했다. 영국에만 정신병이 돌림병처럼 돌았을 리도 없고 다른 나라에 비해 유별나게 사회적, 구조적인 문제점으로 가득한 나라도 아닌데 왜 이리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많은지 정말 궁금했다. 궁금증 덕분이었을까. 영국에 사는 몇 년 동안 나는 ‘치료’나 ‘상담’이란 걸 받으러 정신병원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취재원으로서 만났다. 그러면서 영국에 정신병원이 많은 이유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영국에 정신병원이나 시설이 흔한 이유는 그곳에 드나드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국에서는 정신 질환이 창피하고 숨겨야 할 큰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나에겐 정신이상인 막내 삼촌을 가진 동네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늘 삼촌을 부끄러워했다. 부모나 형제도 아니고, 삼촌인데도 그 이야기를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했으며, 그 어린 나이에도 삼촌 병원비 때문에 엄마 아빠가 돈을 많이 쓴다고 걱정했다. ‘집안에 정신병자가 있으면 3대가 망한다.’라는 엄마의 한숨 섞인 걱정을 나에게만 살짝 털어놓기도 했었다. 그에 비해 영국에서의 정신 질환은 크게 부끄럽거나 감춰야 할 치부가 아니다. 오히려 기관과 시스템이 잘 돼 있어, 정신적으로 문제를 못 느끼는 사람들조차 혹시 모르니 정기검진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은 고민이나 문제에 부딪히면 도와줄 카운슬러를 찾아가고, 실제로 정신 질환이나 우울증, 공황 장애가 생기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히 정신병원을 찾는다.

물론 ‘왜 영국에 정신병동이 많은지’에 대한 유머와 낭설도 많다. 비가 많이 내리고 안개가 가득한 날씨 때문이라는 탓을 하기도 하고, 영국 신사로 대변되는 억압적인 교육제도를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는 중세에 근친상간이 많아서 유전인자가 어떻다느니, 계급사회, 지역감정, 심지어 종교나 축구, 펍으로 대변되는 선술집 문화 때문이라는 진단까지 나온다. 이렇게 누가 어떤 이론을 내놓든 간에, 실제로 영국의 정신 질환 환자는 유럽의 이웃 국가들에 비해서도 다소 높은 게 사실이다. 영국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영국 인구 네 명 중 한 명은 살면서 정신병에 관련된 질환을 경험한다는 것과 스트레스를 비롯한 정신적 문제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이 심각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통계 몇 개만 보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건 옳지 않다. 신체에 나타나는 이상과 달리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증세는 얼마나 자신이 엄살을 떠는지, 다른 말로 하면 얼마나 티를 내고 야단법석을 떠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환자 자신이 스스로의 질환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강도로 호소하느냐에 따라 다른 수치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상대적으로 복지가 잘 갖춰지지 않은 나라일수록 정신 질환자가 적은 이유는 먹고살기도 힘들고 팍팍한데 환자들이 자신의 정신적 건강 상태를 일일이 체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란 분석도 가능하다. 따라서 삐딱하게 보면 영국과 같이 사회복지 제도가 잘 돼 있는 나라의 경우, 정신 질환은 일을 때려치우고 먹고 놀기에 가장 편리한 핑계일 수 있으며, 나라에서 주는 보조금을 갖고 백수로 살기에 가장 적당한 ‘훈장’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동안 술자리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영국 친구들을 꽤 여럿 지켜보며, 많은 영국 사람들이 ‘우울증 환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지니게 된 우울증 환자에 대한 그 삐딱한 편견의 지점은 이런 것이었다. 과연 그들은 정부에게 어떤 보조를 받고 있는지, 정말 소문과 같이 그 보조라는 것이 쏠쏠한지. 나는 영국식으로 빙빙 돌려 묻지 않기로 했다. ‘리빙 라이브러리’는 이래서 좋다. 예의를 차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날릴 수 있으니. 조안도 아무렇지 않은 눈치다.

“집세는 전부 나오고, 공과금 보조되고, 병원 검진, 상담 치료를 다 국가에서 해주죠. 이 정도면 뭐 나쁘지 않죠?”

조안은 작지만 아담한 방 하나짜리 개인 플랫Flat을 빌려 살고 있다. 사실 정신병원에 다니는 여자, 그것도 정부 보조금에만 의지해 생활한다고 하면 보통은 집주인이 싫어하기 마련인데 운이 좋아서 좋은 집을 구했다. 월세 930파운드(약 200만 원)를 정부에서 100퍼센트 지급해주고, 전기세나 수도세 같은 공과금은 일부가 보조된다. 병원비는 100퍼센트 면제다.

내가 보기에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게 즉각적인 감상이다. 한 달에 930파운드나 정부에서 대주는 게 어디야? 아무리 영국이 물가가 비싸다고 해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동네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정도 집세면 혼자 살 만한 공간을 충분히 구하고도 남을 비용이다. 이렇게 넉넉하게 정부 보조금을 받는 조안 같은 사람들에게 고되게 일을 해야만 돈을 벌 수 있는 일반인들이 다소 삐딱한 시선을 갖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 삐딱함을 넘어서 배가 슬슬 아플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들을 사회의 기생충이라고 아니꼽게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을 조안은 알고나 있을까.

“만날 듣는 이야기예요. 신체적으로 문제를 가진 장애인들이 정부 보조금을 받는 건 당연한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정부의 돈을 야금야금 받는 거, 웃기고 얄밉다고 생각하죠. 알아요. 겉으로는 말짱하니깐 우울증 정도는 날라리 병이고, 꾀병으로 보인다는 것.”

문득,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에 걸려 고생했던 친구가 생각났다. 우울증도 엄청난 병인데, 그것과 싸우기도 벅찬데 ‘먹고살 만하니까, 배부르니까 그런다.’라는 말을 듣는 게 제일 두렵고 큰 상처라고. 어쩔 수 없어서 하게 되는 행동을 자기 기준으로 받아들여서 생기는 오해와 갈등이 가장 힘들다고.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여러 가지 사건을 두고 자신을 예의가 없거나, 까다로운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에 지친다고. 그런 친구를 만난 적이 있어서 우울증을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나는 건방지게도 우울증이라는 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러니 조금만 기분이 나쁘거나 컨디션이 다운되면 ‘어? 나 우울증인가?’라고 쉽게 생각하고,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나 패닉 상태에 빠졌어.”라고 쉽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 조안을 만나고 보니 우울증과 패닉이란 일개 증상이 아니라 자살이나 살인과 같은 무시무시한 결과를 부를 수 있는 병이었다.

조안의 병은 우울증을 바탕으로 대인 공포증과 광장 공포증까지 폭이 넓었다. 많이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본인과 주변 사람을 지치게 했다.

“지난 몇 주 동안은 바깥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지 못해 욕실의 욕조에 쓰레기봉투를 차곡차곡 볏단 쌓듯 쌓아놓고 지냈어요. 음식물 쓰레기 때문에 악취가 진동하고, 파리 떼가 우르르 몰려왔지만, 욕실을 사용할 일이 생기면 그쪽은 애써 무시하며 재빨리 이빨을 닦고, 세수를 했어요.”

조안은 일부러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킬 수 없는 ‘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그로 인해 누구보다 본인이 괴로웠다. 지금 이 자리에 나오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결심을 하고 현관문을 열었을까. 약속이 쉽게 잡히질 않아 그녀에게 불만을 가졌던 것조차 마음속 깊이 미안해졌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김수정> 저12,420원(10% + 5%)

도서관에서 사람을 빌려 대화하며 한 사람의 인생을 읽는다 런던에서 열린 Living Library 이야기 덴마크 출신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창안한 『리빙 라이브러리』는 유럽에서 시작되어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신개념의 ‘이벤트성 도서관’으로, 도서관에서 ‘책’ 대신 ‘사람’을 빌려준다...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산업의 흐름으로 반도체 읽기!

『현명한 반도체 투자』 우황제 저자의 신간. 반도체 산업 전문가이며 실전 투자가인 저자의 풍부한 산업 지식을 담아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반도체를 각 산업들의 흐름 속에서 읽어낸다. 성공적인 투자를 위한 산업별 분석과 기업의 투자 포인트로 기회를 만들어 보자.

가장 알맞은 시절에 전하는 행복 안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작가 김신지의 에세이. 지금 이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들, ‘제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1년을 24절기에 맞추며 눈앞의 행복을 마주해보자. 그리고 행복의 순간을 하나씩 늘려보자. 제철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2024년 런던국제도서전 화제작

실존하는 편지 가게 ‘글월’을 배경으로 한 힐링 소설. 사기를 당한 언니 때문에 꿈을 포기한 주인공. 편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모르는 이와 편지를 교환하는 펜팔 서비스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나간다. 진실한 마음으로 쓴 편지가 주는 힘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

나를 지키는 건 결국 나 자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물질적 부나 명예는 두 번째다. 첫째는 나 자신. 불확실한 세상에서 심리학은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무기다. 요즘 대세 심리학자 신고은이 돈, 일, 관계, 사랑에서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을 위해 따뜻한 책 한 권을 펴냈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