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고, 어쨌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났고, 어떤 사람은 물 위를 걸었다. 가톨릭교회에 따르면 루드르에서는 지금까지 67차례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믿어왔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믿는다. 그러나 기적이란 무엇인가? 때때로 사람들은 매우 놀랍고 다행스러운 사건이 일어날 때에만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수백 명이 사망한 지진의 잔해에서 자식이 살아나면 어머니는 그것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어머니는 자식의 행운에 대해 신에게 또는 신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본다면 그녀는 감사와 함께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비난을 병행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기적’―어려운 수술이 잘 끝났거나 힘든 시험에 합격했을 때와 같은 기적―은 보통 이 세계의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방식과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부터 잠시 우리의 초점을 신이 일으킨 사건으로서의 기적에 맞춰보자. 이것은 하나의 조건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모든 일이 신에 의해 일어난다고 믿는다. 따라서 모든 것이 기적이 되는 경우를 피하려면, 그 사건들이 평범하거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들과 다르다는 조건을 추가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기적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다. 물은 포도주로 바뀔 수 있는 물질이 아니고, 알려진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시체는 벌떡 일어나 앉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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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기적을 인정하는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어떤 사건들을, 자연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임에도,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앙을 유지한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을 거부하고, 기적의 가능성마저 거부한다. 우리가 자연의 법칙으로 인정하는 것을 위반하는 사건들은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줄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그 법칙이 우리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 거부 역시 자기고양적이고, 기적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 백조를 하얗다고 정의함으로써 검은 백조 흑고니를 제외시키는 경우처럼, 그것은 기적을 사실상 ‘정의 자체에 의해’ 배제한다.
이 질문이 당혹스러운 것은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확신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기적을 단호히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한 가장 유명한 철학자는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지만, 그보다 조금 먼저 저술 활동을 했던 토머스 울스턴이란 사람은 기적에 대한 성경 구절들이 부조리하고 불가능하다고 맹비난했다. 울스턴은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흄은 ‘위대한 이단’이란 낙인이 찍혔음에도 그보다 훨씬 운이 좋았고, 사람들 눈에 덜 선동적으로 비쳤다.
이제 ‘신의 개입’이라는 특징은 접어두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아주 특이한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인가에 초점을 맞춰보자. 편의를 위해 지금부터는 그런 사건을 ‘기적’이라 지칭하고, 특별히 신의 개입이란 특징을 다룰 때에는 ‘신의’라는 말을 추가하기로 하자.
사람들은 흄의 입장을 종종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실은 오해에 가깝다. 기적은 가능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믿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항상 불합리하다. 여기에는 역설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종류의 사건이 가능하고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런 종류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는 것은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역설로 들린다. 어쨌든 우리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목격자가 있기 마련이다.
기적을 믿는 것이 항상 불합리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글쎄, 자연의 법칙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믿음의 증거가 많기는 하다. 예를 들어 간절한 바람과는 별도로 우리 중에 누구도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실 물에는 여러 가지 일들―결빙, 증발―이 발생하고, 설득력 있는 이론들이 성립되어 그런 변화를 설명해왔다. 그러나 성경에 적힌 것처럼 물이 알코올음료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증거는 전무하다. 물에는 원래 그런 가능성이 없다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수십억 인구의 경험상 물은 한 번도 포도주로 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오래 전에 몇 번에 걸쳐 약간의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생각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을까?
우선 몇 명의 목격자들이 그런 변화를 봤다고 보고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그들의 증언 때문에 물이 그렇게 변했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을까? 이 문제와 관련된 몇 가지 증거를 평가해보자.
한편으로 우리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상당한 증거를 갖고 있으며, 그 증거는 수세기에 걸친 한결같은 일상적 경험과 실험에서 나왔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사건에 대한 보고가 고의적으로든 우연으로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상당한 증거를 갖고 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증거에 걸어야 한다. 게다가 예외적이고 특이한 사건의 보고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증거는 매우 강하다. 사건에 대한 보고, 즉 증언의 신빙성은 때때로 낮다. 그러므로 다른 요인이 없다면 이른바 기적이라고 하는 그 사건ㅡ그리고 같은 이유로, 이른바 기적이라고 하는 다른 모든 사건들ㅡ을 믿는 것은 비합리적으로 여겨진다. 특별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기보다는 그 보고들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만일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적처럼 보이는 일을 경험했다면 상황이 본질적으로 달라질까? 이때에도 그것이 기적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그 경험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그것이 기적이라면 그 경험의 특별한 성질은, 우리가 이따금 실수를 범하고, 예외적인 현상에 속고, 현혹되고, 유혹 당한다는―또는 단지 지루함을 못 견딘다는―잘 알려진 사실과 대조될 필요가 있다.
전체적인 결론은, 우리는 ‘기적’에 대한 모든 보고가 거짓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기적이 발생했다고 믿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결론마저도 너무 포괄적이다.
흄은 17세기의 처음 8일 동안 어둠이 지구를 덮었다는 사람들의 보고가 여러 나라에서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렇다면 보고의 수, 여러 출처 등에 근거하여 아주 특이한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흄은 이른바 ‘기적’이 일어났다고 믿는 것이 항상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흄의 입장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그 사건들을 신이 만든 신의 기적으로 믿는 것이 항상 불합리하다는 입장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때에도 우리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8일 간의 어둠에 대한 보고에, 하늘에서 벼락같은 목소리가 세상의 모든 언어로 우주 만물의 창조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그것이 우리가 숭배해야 할 유일신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밝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특별한 사건이라면 어떤 의식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겠지만, 따라서 그 힘이 영원하고 전지전능하고 완전히 선한 신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여전히 큰 비약일 것이다. 어쨌든 이 세상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이것만으로도 문제의 그 힘이 완전히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선하고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된다.
기적, 즉 대단히 특별해 보이는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보고는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그런 신중함이 오류의 회피를 보장해주진 않는다. 18세기에 샴의 왕은 얼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네덜란드에 겨울이 오면 물이 코끼리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진다는 네덜란드 대사의 보고를 믿지 않았다. 그가 다른 어떤 증거를 접할 수 있느냐에 따라 샴의 왕은 비록 틀리긴 했지만 대사의 보고가 잘못이라고 믿었을 때 합리적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사건의 가능성 외에도 보고자의 동기, 보고자의 입장, 그리고 비슷한 사건들이 발생할 수 있고 조사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원칙상 샴의 왕에게 이런저런 증거가 더 많이 제시되어 특정한 상황에서 물은 항상 얼음으로 변한다는 사실이 입증될 수도 있었다.
흄은 신자들이 그들 자신이 종교적인 믿음을 유지한다는 사실에서 지속적인 기적을 의식해야 한다고 정곡을 찔렀다. 아마 그것이 진정한 기적일 것이다. 그러나 기적에 대한 신앙과 믿음이 너무나 흔한 탓에 기적의 존재는 결코 기적이 아니다. 그 믿음이 비합리적임에도 사람들이 기적을 믿는 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다. 사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믿는 것은 왜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바로 그 비합리성일지 모른다. 결국 많은 신자들이 합리성만으로는 신에게 끌리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들은 신앙의 비약, 앞에서 풍자했듯이, 신앙의 삼단뛰기를 감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