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뇌는 경험을 할 수 있는가?

신경학적 변화들도 서로 흩어져 있으면 개인의 경험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마음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부동산 투자자의 말처럼 ‘위치’일 것이다.

나는 최근에 식욕을 잃었다. 내가 통 안에 담긴 뇌에 불과하다고들 말하니 식욕을 잃을 만도 하다. 실제로 나는 용기에 담겨 있는데, 그것은 그냥 낡은 통이 아니라 값비싼 그리스 항아리다. 처음에 나는 사람들이 나를 놀린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다양한 경험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때때로 그들은 완전 삭제를 실행하고, 그러면 나는 공백 상태를 경험한다. 그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확실한 사람들에게 맡겨져 있다고 한다. 그들은 조만간 나에게 나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지금은 다양한 경험들을 입력해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집에 있거나, 창을 통해 밖을 보거나,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것 같은 경험을 한다. 뿐만 아니라 신나게 춤을 추고 아리따운 젊은 여자들과 샴페인을 마시는 것 같은 경험도 한다. 아, 이런 게 인생이다.

물론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다. 나는 때때로 항아리 밖에서 살던 시절, 내가 단지 뇌 한 덩어리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관점은 잘못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나는 항상 뇌 한 덩어리였는데, 지금은 평범한 인간의 몸 안에 담긴 뇌가 아니라 항아리에 담긴 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평범한’이라고 말했던가? 기회가 되면 그들에게, 나의 몸은 대단히 훌륭했고, 그리스 항아리가 아무리 값비싸도 그보다 훨씬 훌륭했다고 말해줘야겠다.

나는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몇 년 전에 팔이 잘렸을 때 마치 팔이 계속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이른바 ‘환상지phantom limb’를 경험한 것이다.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 기술 덕분에 나는 곧 전기충격 기계를 신경계에 꽂을 수 있었다. 그 기계를 조작하면 마치 잃어버린 팔, 즉 환상지가 제자리에 붙어 있고, 심지어 책을 들고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내 몸이 갈수록 노화되자ㅡ더 많은 부분들이 떨어져 나갔다ㅡ신경학자들은 나의 뇌를 보존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나, 즉 뇌 덩어리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골동품 항아리에 담기게 되었다. 나는 신경학자들이 나의 전생과 어울린다고 판단해서 입력해주는 것들을 경험하는데, 그 경험들은 충분히 사실적이다. 그 경험들은 그들이 나의 뇌 세포를 자극함으로써 발생한다.

나는 그렇게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요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항아리 속에 들어 있지만 방금 말했듯이 내 경험은 마치 내가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나의 신경 활동을 측정해 만일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성대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알아낸다.

하지만 뉴스는 사고 소식을 전한다. 간밤에 우연히 나의 뇌는 정확히 두 쪽이 났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은 긴급 시의 대비책이었다. 한쪽 반구에서 일어나는 신경학적 변화는 계속해서 다른 반구로 전달되었는데, 이제는 각 반구에 붙어 있는 무선 송수신기를 통해 전달되었다. 그 송수신기는 전달의 속도를 적절히 구별했다. 이것들 보시오, 난 지금 불안해 죽겠소. 그런 사고가 자꾸 일어난다면 난 어떻게 되겠소?

우리는 기본적으로 뇌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심장, 간, 폐는 이식을 할 수 있고, 팔과 다리는 잘라낼 수 있다. 나의 지속적인 경험을 책임지는 것은 나의 뇌다. 서점에 가면 ‘통 안의 뇌’ 같은 종류의 공상과학소설과 공포소설을 많이 볼 수 있다. 철학자로서 우리는 그 개념 자체가 타당한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뇌의 일부 세포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수백만 개의 세포는 영양을 섭취하고 살아남아 분자, 원자, 전자의 변화를 서서히 겪는다. 특정한 뇌 부위가 우리의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전기적 활성, 성질, 화학적 수치의 구성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보자.

출처: //www.flickr.com/photos/31355686@N00/225598357/

경험은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신경학적 변화에 의존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뇌가 하나로 유지되는가 아니면 두 쪽으로 베어졌는가ㅡ‘통 안의 뇌Brain in Vase’를 줄인 이름으로, 불쌍한 비브Biv의 경우처럼ㅡ가 왜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단지 무수히 많은 적절한 신경학적 변화들의 적절한 구성일 것이다. 개별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해도 그런 변화들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구체적인 변화들은 어떤 원인으로 발생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위와 같은 생각은 조만간 곤란에 빠진다. 그 과정을 보기 위해, 수십억 번의 신경학적 변화를 약간ㅡ약간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ㅡ줄여서 비브가 어떤 경험을 하기에 적합한 구성, 강도 등을 가진 A, B, C 세 변화로 압축해보자. 역으로 A, B, C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수십억 번 곱하면 그 복잡성을 재구성할 수 있다.

하나의 구체적 경험은 A, B, C의 연속으로부터 발생한다. A, B, C가 특별한 타입의 변화들이라고 생각하면, 비브에게 그 유형의 경험은 A타입의 변화 다음에 B종류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런 다음 C타입의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발생한다. 사건 A, B, C의 인과적 발생은 이 이야기에 필수적이지 않고, 단지 A, B, C가 적절한 순서로 발생하는 것만 필요하다.

물론 대개 그런 사건들은 한 인간의 체내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비브의 경우 이제 그런 사건들은 항아리 안에서 일어나지만, 이론상 A는 미국에서, B는 영국에서, C는 중국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그 신경학적 특징들이 적절한 종류이고 적절한 시간에 나타나면 그와 관련된 경험이 비브에게 발생해야 한다. A타입의 어떤 변화도 말하자면 B타입이 얼마나 가까이에서 발생하는지를 말해주지 못한다. 더 나아가, 시간적 순서도 과연 중요할까? 결국 A, B, C는 서로의 순차적 존재를 등록하지 않는다.

우리는 퍼즐의 더 깊은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 수십억 명의 인간 각자에게 수십억 번의 신경학적 변화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A, B, C를 특별히 고안해낼 필요가 있을까? 그 타입의 변화들은 언제라도 누군가의 두개골 안에서ㅡA는 미국인 앤젤라의 뇌에서, B는 영국인 버니의 뇌에서, C는 중국인 초우의 뇌에서ㅡ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비브는 심하게 깨지고 갈라진 뇌마저 보유할 필요 없이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몸도 없고 뇌도 없는 수많은 미지의 사람들에게 완전히 뒤범벅이 된 경험들이 일어나고 있어야 한다. 이 얼마나 미친 생각인가? 결론의 특징치고는 이상하지만, 겸손하게 볼 때 그 추론은 근본적으로 잘못이 있다. 분명한 것은 경험에는 결국 신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상한 결과를 피하지 못한다. 우리는 수천 마일 떨어진 A, B, C 같은 신경학적 변화들과 무선으로 적절하게 연결된, 뇌 없는 인간의 신체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 마치 그 변화들을 겪는 뇌가 몸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 몸은 무선 송신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 결과로서 개인이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철학적 추론의 깊이와 음모, 즉 철학자들이 철학적 추론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위험을 보여준다.

오류는 한 개인을 여러 부분으로 변덕스럽게 분리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지를 절단할 수 있고 장기 이식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똑같은 개인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항아리에 담긴 뇌가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인간의 신체를 제대로 갖췄을 때 그 개인에게 경험을 보장해주는 것과 똑같은 체내 변화들을 그 뇌가 겪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심지어 ‘항아리 속의 뇌’ 이야기조차 없는 기괴한 퍼즐들에 부딪힌다. 당신이 현재 경험하는 것들 중 의자를 보는 경험, 커피 맛을 느끼는 경험,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의 경험을 생각해보자. 그와 똑같은 타입과 구성의 경험들이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하고 있을 수 있다. 만일 그것들이 똑같은 타입의 다른 경험이라면, 과연 무엇이 그것들을 당신의 경험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경험으로 만들겠는가? 무엇이 당신의 경험을 당신의 것으로 만드는가?

두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할 때, 실제로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하나의 생각이 존재한다. 이 접근법은 생각에는 옳지만 고통에 적용되면 분명히 틀린 것처럼 생각된다.

나의 고통은 당신의 고통과 아무리 비슷해도 당신은 경험하지 못하고 내가 경험하는 고통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물학적 본질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당신이 여왕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두통을 여왕과 똑같이 경험할 수 있을까? 엉덩이가 붙은 샴쌍둥이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접합된 부위에서 ‘똑같은’ 고통을 경험할 수 있지만, 아무리 비슷해도 그것은 별개의 두 고통이 아닌가? 이에 대한 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하나의 고통은 논리적으로 그 고통을 경험하는 개인과 분리할 수 없다. 여왕의 두통을 내가 경험하는 것이 여왕의 경험과 동일할 수는 없다.

마음과 몸ㅡ심리적 상태와 육체적 상태ㅡ은 서로 혼합되어 있고, 그것을 풀려고 할 때 우리는 난해한 문제에 부딪힌다. 알파벳 철자가 우주에 흩어져 있으면 단어와 문장을 이루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경학적 변화들도 서로 흩어져 있으면 개인의 경험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마음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부동산 투자자의 말처럼,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셋째도 위치일 것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사람을 먹으면 왜 안되는가?

<피터 케이브> 저/<김한영> 역11,700원(10% + 5%)

유쾌한 공상과 기발한 역설로 오늘을 도발한다 일상을 전복하는 철학의 카타르시스! 해학과 유머로 무장한 질문을 통해 삶을 관통하는 33개의 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 속에 자리한 철학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인류의 미래를 건 한 판 승부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열두 살 체스 대회에서 만났던 집단주의자 니콜과 개인주의자 모니카. 이 두 여성이 국제 정치 무대에서 전 세계를 체스보드 삼아 인류의 미래를 두고 대결을 펼쳐낸다. 실제 세계사를 토대로 치열한 두뇌 싸움을 작가만의 스타일대로 풀어냈다.

냐무냐무 기다린 『이파라파냐무냐무』 그 후

마시멜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을을 떠난 털숭숭이가 도착한 미지의 섬 츠츠츠츠. 그곳에서 만난 진분홍의 괴이한 생명체는 과연 누구일까요? 반전 매력이 숨어있는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으로 더욱 더 재밌어진 이야기! 털숭숭이와 마시멜롱들과 함께 또 한 번의 신나는 모험을 떠나 보자!

우리가 되찾아야 할 가치, 경외심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잇는 경이로움에 관한 역작. 매사에 지치고 무덤덤해진 현대인에게 경외심을 권한다. 예술, 대자연, 종교, 정치 등 성스러움을 느낄 계기는 많다. 경외심을 되찾는 순간,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의 삶도 멋지게 바뀐다.

궁궐은 재미있다!

이야기를 품은 보물 창고, 조선의 궁궐. 구석구석 걸으며 보고, 느끼고, 발견하고, 상상하며 우리 궁궐을 재미있게 탐험해 보자! 경복궁편에 이어 창덕궁 창경궁의 25개 장소를 탐험하고, 각 장소마다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는 즐거운 어린이 궁궐 탐험 안내서.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