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예스 책꽂이 >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
남미의 정글에서 게으름에 취해 있는 나무늘보, 날개를 퍼덕이는 나비를 만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대화 도중에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온다면, 글쎄, 어떻게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빽빽한 덩굴, 더위, 관목 숲을 뚫고 나가고 있었다. 어쨌든 휴식이 필요했다.
나비는 나무늘보의 삐죽한 코 위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느리고 게으르다면, 왜, 굶어죽을 수도 있잖아. 키케로의 책(『운명론』을 말한다. 결정론에 대한 스토아 철학자 크리시푸스의 반박이 실려 있다.ㅡ옮긴이)에서 무얼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일어날 일은 일어나.”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나무늘보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일어날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건 아냐.”
나무늘보는 늘어지게 한숨을 쉬었지만, 나비는 말을 더 시키려고 그의 코를 간질였다.
나무늘보가 말했다. “이봐, 만일 오늘 저녁에 내가 식사를 할 운명이라면, 먹이를 찾든 안 찾든 나는 식사를 하겠지. 만일 굶어죽을 운명이라면, 먹이를 찾든 안 찾든 굶어죽을 것이고.”
“아하, 게으른 논증(결정론을 설명한 고대 그리스 문서ㅡ옮긴이)이군.” 나비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나무늘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론 느려터진 목소리로 청산유수 같이 늘어놓았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식사를 하는 것도 운명이고 못 하는 것도 운명이니까, 어쨌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건 시간 낭비야.”
나비가 날개를 퍼덕이며 말했다. “키케로를 좀더 읽었어야지. 너의 추론엔 오류가 있어.” 나비는 흥분해서 허공을 한 바퀴 돈 다음 이번에는 나무늘보의 삐죽 튀어나온 혀끝에 내려앉았다. 나무늘보는 나비를 꿀떡 삼킨 다음 입맛을 다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조그만 전채를 먹는 것도 다 운명이란 말씀이지.”
고통, 절망 또는 죄의식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한숨과 함께 “일어날 일은 일어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종종 ‘케세라세라(보통 ‘될 대로 되라’로 번역ㅡ옮긴이)’라는 스페인어로 이것을 노래한다. 그런 한숨, 그런 노래, 그런 말은 절망을 나타낸다. 우리는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혹은 지나간 과거를 한탄한다고 해도 현재 상황을 뒤집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의 사건들은 별자리, 운명의 손 또는 신의 섭리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면접을 보기 위해 말쑥하게 차려 입을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합격 아니면 불합격인데.’ ‘시험공부를 뭐 하러 해? 붙기 아니면 떨어지긴데. 파티나 하자.’ 이런 추리에는 유명한 이름이 붙어 있다. ‘게으른 논증’이 그것이다.
정말로 일어날 일은 꼭 일어날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숙명론, 즉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 일을 막거나 조장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과 무관하다는 믿음으로 흐르는가?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예정되어 있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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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난다
<피터 케이브> 저/<김한영> 역11,700원(10% + 5%)
유쾌한 공상과 기발한 역설로 오늘을 도발한다 일상을 전복하는 철학의 카타르시스! 해학과 유머로 무장한 질문을 통해 삶을 관통하는 33개의 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 속에 자리한 철학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