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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 거리에서

넘실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한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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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 그녀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여느 날처럼 무더운 날이었다. 등에 땀이 흥건했지만 내게 주어진 오늘을 살기 위해 골목과 골목 사이로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기온의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실거렸고 기온 거리만의 냄새가 코끝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게이샤의 분 냄새이거나 다코야끼의 앙념 냄새이거나 무더운 여름, 관광객의 땀 냄새일 가능성이 컸다. 냄새는 코로 맡는 것이 분명하지만 기온 거리에 스며있던 냄새는 보이기도 하고 스치기도 하고 심지어 만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넘실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한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빛 그녀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기다림의 시간들이 그녀의 움직임에 스미는 만큼 그녀의 말수는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침묵만큼 그녀의 숨도 깊어졌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하늘빛 뒷모습을 지닌 그녀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을 ‘그’가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은 소설의 한 장면을 읽어주었다. 그 소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완성 될 수도 없는 읽어버린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금세 머리속에서 지워졌지만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가진 질감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기온 거리에
당신과 나 사이에

많은 시간을 기다려보았지만 기다림에는 늘 익숙하지 못했다. 스무 살 무렵 마음을 던져 놓고 군대를 가버린 친구를 기다릴 때는 그와 손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나 자주 손을 감추었고, 제법 어른 흉내를 낼 무렵 돌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 그의 마음을 기다릴 때는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붙들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전화기 대신 내가 울어 버리기도 했다. 기다림을 지우는 방법은 나 자신을 조금씩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늘 잔인했고 늘 버거웠다.


서른 살 무렵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마치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인 듯 자연스럽게 그를 앓게 되었다. 마음은 점점 진해졌고 그도 나를 앓았으면 하고 욕심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그 시간만큼 기다림이라는 생의 지독을 견뎌야 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었기에 더욱 지독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어디서든 네 자신을 잃지 않으면 돼, 우린 겨우 시작이니까.”

그가 말한 ‘시작’이 내가 견디고 있는 기다림의 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서든 네 자신을 잃지 않으면 된다’는 말은 진정한 것이 되어 다가왔고, 적어도 나와 그사람 사이의 기다림은 하늘색의 빛감을 가지게 되었다. 끝내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더라도 나는 충분히 앓다 가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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