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어떤 빈틈을, 나로선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 같은 것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줄 그 빈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산책이란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주는 수단이 아닐까?”
그것은 나에게 빈틈을 만드는 일이었다. 살면서 빈틈을 만드는 일은 삶을 무언가로 채우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만큼 쉽지 않다. 언제나 그랬다. 중요한건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련하고 싶은 내 생의 빈틈은 <산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때로는 <여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겹겹이 쌓여진 일상에서 어떤 빈틈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하는 면에서 산책과 여행은 닮은꼴이었다.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혹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오월의 미루나무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의 의지 같은 것이어서 자주 나를 바깥으로 내몰았다. 다시 말하면 산책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간신히 몸을 돌려 코에 바람을 넣는 일이었고 나는 콧바람을 몹시 좋아했다.
모든 것에는 취향이 있기 마련, 산책에도 내 나름의 취향이 있다. 코에 바람을 들게 하기 위해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일지 고민하는 것처럼 사소한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다. 그저 내 이야기가 당신의 경우이기도 하여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산책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어디인가? 우선 나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을 선호한다. 숨을 깊이 내 쉴 수 있는 공기와 관조할 수 있는 볕이 잘 드는 곳이면 더욱 좋겠다. 우연이라도 이런 장소를 만난다면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 같군”이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릴 것이고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면 “여긴 산책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그치?”라고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할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한적한 교토의 좁은 골목들은 그런 면에 있어서 거닐기 좋은 곳이었다. 가끔씩 골목에서 불쑥 나오는 사람들이 산책의 재미를 더해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떠한가? 장 그르니에는 낮의 열기가 사라진 뒤나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난 뒤의 시간, 그러니까 온대 기후에서는 해질 무렵이고 다른 기후대에서는 밤이 좋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 시간은 깨어있기만 한다면 동틀 무렵의 새벽 시간이다. 여행지에서 새벽 산책을 늘 시도하지만 ‘깨어있기만 한다면’의 조건이 까다로워 거의 대부분 실패한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은 단지 좋아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나에게 종종 두근거림을 주는 산책 시간은 해가 적당한 기울기로 기울어져 있는 오전 10시와 오후 네 시경이다. 이 시간의 빛은 수줍은 듯 투명하고 열기를 머금은 채 차분하여서 다 닮아진 풍경조차도 반짝반짝하게 한다. 오전 10시의 산책은 명상하기에 좋고 오후 네 시의 산책은 몽상하기에 좋다.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명상은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고 몽상은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함. 또는 그런 생각]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오전 산책을,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오후 산책을 추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느즈막히 일어나 한 끼를 채우기 위해 방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골목에는 뜬금없이 빨래를 널고 싶을 정도로 깨끗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바람은 잠깐씩 가볍게 지나갔다. 나는 골목 이리저리로 거닐며 빨래 대신 나를 널기로 했다. 머리위로 떨어지는 햇볕에 뽀송하게 살균 소독되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평소보다 깊은 호흡으로 시간과 공간을 거니는 것.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산책이었다. 그렇게 거닐 때, 들고 나는 것은 바람과 빛뿐이 아니라 사유와 가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