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 위로 하얀 천이 덮여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죽은 것이다. 의식이 있는 걸 보니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다. 바로 옆에서 내 아내가 눈물을 훔치고 있고, 죽음이 뭔지 모르는 어린 두 딸이 한 발짝씩 떨어져 서 있다.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아빠가 죽었는데, 부둥켜안고 울지는 못할지언정 저만치 떨어져 있다니 말이 되는가?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려는데, 아내가 나를 대신해 아이들을 나무란다. “이리 못 와. 아빠가 너희들 먹여 살리느라 밤잠 안 주무시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알아? 일하다 일하다 과로로 쓰러져서 돌아가신 거라고.”
아내가 통곡하기 시작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해주니 쑥스럽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래, 다시 일어나면 뭐 하겠나. 사는 게 더 귀찮다. 그냥 이대로 지하로 들어가서 잠이나 실컷 자자. 몇 년 동안 잠 한번 제대로 잔 적도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내가 열심히 산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까지 있지 않은가. 그래 이대로 눈을 감는 게 그들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장례를 치르려면 또 얼마나 힘들겠는가.
내 마지막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은 꼭 이럴 것 같다. 마음만 있다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일어나면 또 뭐 하나 싶어서 그냥 눈을 감을 것 같다. 오래 살아봐야 짐만 무거운 세상, 눈을 감으면 잠이라도 실컷 잘 것 아닌가. 더군다나 내가 바라는 것은 겨우 한 가지다. 내가 죽은 이후에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떠올리면서 “그래도 우리 아빠는 우리 먹여 살리려고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라고 말해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러면 나는 ‘그래도 나를 좋게 추억하는 사람 세 명은 남기고 죽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죽는 게 두렵긴 하지만, 꼭 생각하는 것만큼 요란하고 가슴 찢어지는 일도 아닐 것 같다. 옆에서 지켜보게 되는 타인의 죽음은 그럴 수 있지만, 당사자들은 자신의 죽음이 생각보다 힘없이 진행된다고 생각할 것 같다. 오히려 살아남은 사람들을 걱정하면서, ‘앞으로 남은 생을 또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니, 내가 먼저 차표를 끊어서 미안하다.’ 이런 생각으로 미안해하며 떠나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지쳤다 싶으면 조용히 눈을 감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선택이다.
사람은 정해진 시간을 살다가 간다. 마흔을 앞둔 어느 선배가 “요즘은 사는 게 행복해졌다”는 말 뒤에 붙인 표현이다.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같다. 그 정해진 시간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해진 날짜 하루하루를 쓰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돈 걱정, 직업 걱정,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 같은 게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대한민국 남자 평균수명 75년을 기준으로 하면, 38년 8개월을 산 그 선배는 이제 36년 4개월이 남았고, 36년 6개월을 산 나는 38년 6개월만 살면 된다. 절반 정도 살았고, 절반 정도 남았다. 크게 욕심 부릴 것 없이, 크게 걱정할 것도 없이, 지금 버틴 시간만큼만 버티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고, 눈이 침침해졌고, 자도 자도 피곤하다고 우는 소리 할 필요도 없다. 조금만 더 버티면 그런 걱정조차 필요 없어지니까. 욕심 부릴 필요도 없다. 그만큼 인생만 고달플 뿐이다.
이 세상은 승자여서 행복하고 패자여서 꼭 불행한 것도 아니다. 내가 만난 승자들은 한결같이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고 이야기 한다.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만날 때마다 사람 대하는 태도가 틀리다. 그래서 꾸준히 만나기 쉽지 않고, 그러니 사람도 없다. 그들이 전혀 부럽지 않다. 돈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다. 돈을 벌지 못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누르지 못해 진급도 하지 못한 우리들은 패자인가? 여기에도 동의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해 살았고, 돈만 없을 뿐이다. 승자보다 불행한 것도 아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들과 똑같다.
다시 한 번 나의 임종 순간을 상상해본다. 내 옆에 아내와 두 딸이 서 있다. 어머니가 안 계신 게 무엇보다도 다행이다. 눈을 감는 순간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너무 쉽게 진행되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규원의 「칸나」라는 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