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16일, 백발의 한 남자가 가녀린 소년에게 쏟아지는 총알을 온몸으로 막으며 죽음을 맞았다. 독일 패망을 목전에 둔, 어쩌면 마지막으로 집행된 총살형이었다. 쓰러져 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늙은 몸이 어린 소년을 지켜 주기를 간절히 바란 남자의 이름은 마르크 블로크. 프랑스가 자랑하는 역사가이자 명문 소르본 대 교수였다.
리옹에서 고대 사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 고등 사범학교와 소르본 대를 거쳐 전형적인 엘리트로 성장한 마르크 블로크는 평생 실천하는 삶을 산 역사가로 명망이 높다. 학자로서 그는 정열적인 연구가였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언제나 현장에 나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웠다.
1939년에 일어난 제2차 세계 대전은 여섯 아이의 아버지로, 안정된 교수로 살아가던 그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는 과감히 교단을 떠나 일개 대위로 전쟁터로 나가 자신이 믿어 온 정의와 역사를 위해 싸웠다. 1940년 프랑스가 항복한 뒤에는 리옹에서 레지스탕스 지도자로 활약했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잡힌 후 총살형이라는 비극적 생의 종말을 맞은 순간에도 마르크 블로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노력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형형하게 살아 있는 눈빛으로, 철이라도 녹일 듯한 정신력으로 아이들을 온몸으로 지켜 내고 싶어 했다. ‘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그는 죽어 갔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란 마지막 갈망은 단순하지만 위대한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신념을 버리고 비굴해지기 쉽다. 그러나 마르크 블로크는 달랐다. 그는 역경 앞에서 오히려 강해지고 빛나는 사람이었다.
빛이 위대한 까닭은 멀리 퍼져 구석구석에 쌓인 어둠을 걷어 내기 때문이다. 마르크 블로크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빛으로 남았고,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의 양심이 꿋꿋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의 마르크 블로크라 불리는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 박사의 경우가 그렇다. 그 역시 마르크 블로크처럼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학 교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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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 |
미국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 치타공 대의 교수가 된 그는 충격적인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라 안 곳곳에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이 넘쳐 났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하기조차 힘든 상황이었고,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똑같은 모습이었으며, 사람들 나이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노인은 어린아이 같았고, 어린아이는 노인처럼 보였다.
그는 미래가 보장된 연구실과 대학을 모두 내려놓고 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골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라민 은행을 창설해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 운동을 펼쳤다. 이는 농민, 어민, 여성 등 빈곤층에게 무담보 소액 대출을 해 주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으로, 설립 당시인 30년 전은 물론 지금도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빈곤 대책으로 평가받는 운동이다.
뜨거운 가슴을 지닌 휴머니스트 무함마드 유누스의 빛나는 실천은 가난에 빠진 방글라데시를 구출했으며, 그의 열정과 의지는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다. 무함마드 유누스는 1984년 막사이사이상, 1994년 세계 식량상, 1998년 시드니 평화상, 2006년 서울 평화상과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또한 그라민 은행은 현재 방글라데시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북미 등 여러 대륙에 걸쳐 설립되어 있으며, 소액 대출로 창업하는 사람들에게 갖가지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공로는 그가 피운 자립의 불씨가 또 하나의 빛이 되어 새로운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라민 은행의 대출을 받아 일어선 한 여인, 암마잔 아미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적신다.
암마잔 아미나는 아이를 열을 낳았지만 두 딸을 빼고는 모두 잃었다. 또 심한 위장병을 앓던 남편은 집 한 채만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의 나이 마흔이었다.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돈을 벌어 본 적도 없었다.
남편이 죽자 시부모는 그녀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남편과 함께 20년 동안 살아온 집을 떠날 수 없던 그녀는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옷감이나 과자, 손수 만든 비스킷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누군가가 지붕을 뜯어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시동생이 지붕을 이은 함석을 다른 사람에게 판 것이었다. 파출소에 신고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웃에 가서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기가 닥쳐 이웃에 더 이상 신세를 지기도 어려웠다. 춥고 배가 고팠지만 돈이 없어 쫄쫄 굶어야만 했다.
결국 지붕도 없는 집에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돈을 벌기 위해 나갔다. 그런데 아직도 가혹한 운명이 남아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비바람을 이기지 못한 벽이 무너져 있었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정신없이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헤매던 암마잔 아미나는 무너진 돌에 깔린 큰딸을 발견했다. 젖먹이만 겨우 살아남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고 싶던 그 순간에 그녀는 그라민 은행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아무런 담보도 없었지만 소액의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이 돈으로 그녀는 대나무 바구니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얼마 뒤 여유가 조금 생기자 그녀는 암송아지를 사서 키워 새끼도 치고 우유도 팔아 원금을 모두 갚았다. 그리고 마침내 빈곤에서 벗어났다.
무함마드 유누스는 자서전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200만 건 이상이라고 적고 있다. 그동안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사람은 2006년 기준으로 모두 660만 명에 달한다.
많은 사람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린 탓에 이성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없고, 돈이 생기면 바로 쓰느라 저축을 할 줄 모르며,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종교나 전통에 맹목적이라 세상을 보는 눈이 편협하며, 함께 일하거나 나눌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함마드 유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감과 자립 의지를 북돋워 주고 창의력과 열정을 심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단순히 보조금을 주는 것은 오히려 자립 의지를 저해하고 계속 구걸하고 싶은 노예근성을 심어 준다고 믿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 주자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과 반대의 행동을 보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박한 만큼 기를 쓰고 노력했고, 법을 잘 지켰으며, 변제 능력이 대단했다. 그라민 은행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 준 소액 대출의 경우 원금 상환 비율이 98퍼센트에 달했다.
무함마드 유누스는 이후 빈민들의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도록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라민 은행 외에도 그라민 폰, 그라민 사이버넷, 그라민 샥티(전기), 그라민 시카(교육) 등을 만들어 빈민들이 이동 전화를 대여해 수익을 얻도록 하고, 인터넷을 통해 일자리를 구하게 만들었으며, 양질의 교육을 받게 해 주고,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곳에 태양열 전기를 공급하는 프로젝트도 시행했다.
그는 그라민 은행의 총재로서 기업가지만, 뜨거운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낸 창조적인 사회 개혁가이기도 하다. 그는 한 사회의 삶의 질이 개선되려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사람들이 변화의 물결에 동참해야 한다고 믿는다.
무함마드 유누스는 “소액 대출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며,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인간적 자산을 일깨우는 수단이고, 인간이 가진 꿈을 일깨움으로써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존중의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라민 은행의 사례는 단순한 한 기업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힘없는 자들과 함께 만들어 낸 것’으로, 자립해 보려는 사람들과 함께 키워 나갔다는 점에서 나라 안팎으로부췅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극빈자들의 동반자’를 꿈꾸며 설립된 그라민 은행과 무함마드 유누스는 저임금과 실업,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방글라데시 빈민들에게 대부와 같은 존재가 되었으며, 경제 활동을 갈구하는 힘없는 여성들에게 대출을 해 주어 여권 신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은 사람 중 97퍼센트는 여성이었다. 이들의 입 소문을 듣고 농민, 어민, 도시 빈민 등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거대한 강을 이루듯이, 소액으로 시작된 대출 운동은 무수한 빈민들에게 자립 의지를 고취시켰으며, 마침내 국내외에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해 중앙 정부와 국제기구를 움직이게 했다.
결국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중앙은행이 1979년 무담보 소액 대출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후 그라민 은행과 무함마드 유누스의 철학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37개국 9,200만 명의 회원이 이 혜택을 받기에 이르렀다.
무함마드 유누스는 ? 세계를 상대로 창업 정보와 기술을 지원하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1989년 그라민 트러스트를 창설했으며, US-AID와 세계은행이 이에 동참했다. 유엔은 무함마드 유누스의 활동을 기려 2005년을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해’로 정했고, 2015년까지 전 세계 극빈층 10억 명을 절반으로 줄이기 위한 빈곤 타파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최근 그라민 은행은 신용 불량 등을 이유로 자기 계좌를 갖지 못한 뉴욕 시민들에게 대출을 해 주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서 은행 계좌를 갖지 못한 빈민은 2,800만 명, 일부 제한적인 금융 서비스를 받고 있는 빈민은 4,47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뉴욕 퀸스 지역 잭슨하이츠 자치구의 해외 이주 여성들에게 한 달간 5만 달러를 쥐여 준 그라민 은행은 향후 5년간 뉴욕 지역에 총 1억 7,600만 달러를 대출할 예정이다. 최빈국 방글라데시의 빈민 단체가 세계 최강국 미국 경제의 자존심인 뉴욕 시민들의 자활을 돕는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부족한 것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생생한 사례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대단하다 하겠다.
가난한 한 어촌 마을 어민 42명이 낡은 어망을 고치는 값 27달러를 빌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작한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노동의 의지, 열망, 꿈을 불어넣어 주고 싶던 무함마드 유누스의 소박한 꿈은 이제 벅찬 성과를 거두고 있다.
무함마드 유누스는 “그라민 은행의 목표는 가난한 사람이 모두 없어져서 은행이 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존귀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과거에는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기업이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요즘은 오히려 지속 가능한 성장의 지름길이 되고 있다.
그라민 은행은 이미 자국을 넘어 국제적인 신뢰와 사회적 자본을 확고히 쌓았고, 무함마드 유누스의 정신은 인류의 가슴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가난과 싸우기 위해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나와 가난 해결 프로그램을 갖지 못한 정부와 기성 체제에 도전한 무함마드 유누스는 ‘빈자의 레지스탕스’요, 방글라데시의 ‘마르크 블로크’라 할 수 있다.
그라민 은행의 성공은 인본주의적 관점에서는 빈민을 위한 구호 활동이었지만, 기업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블루오션의 특별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은행이 돈을 가진 자를 위한 곳이라는 개념을 바꾸어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해 존재함으로써 그 가치와 역량을 키웠기 때문이다. 빈민을 돕기 위한 새로운 발상 전환이 무함마드 유누스에게 새 시장을 열어 준 셈이다.
남들이 가는 길을 뒤따라가서는 새로운 기회의 바다를 발견할 수 없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서 길을 발견해야 한다. 남들이 시도해 보지 않는 곳, 남들이 뛰어들지 않는 곳으로 가 보라! 그리고 그곳에서 열정을 불태워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블루오션이다. 경계선을 허물고 진정으로 몸을 던져 보라! 새로운 기회의 바다가 달려와 당신 품에 안길 것이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나를 뛰어넘는 도전>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