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잎을 삼키듯 회한도 삼키다
‘토란’. 어쩐지, 오래 잊고 있었던, 다정했던 이웃집 동생 이름 같기도 하다. 토란을 발음하면 토란처럼 입이 동그래진다. 동그란 토란, 하얀 토란, 토란을 발음하면 토란이 내가 아끼고 아끼던 보물같이 여겨진다.
‘토란’. 어쩐지, 오래 잊고 있었던, 다정했던 이웃집 동생 이름 같기도 하다. 토란을 발음하면 토란처럼 입이 동그래진다. 동그란 토란, 하얀 토란, 토란을 발음하면 토란이 내가 아끼고 아끼던 보물같이 여겨진다. 동그랗고 하얗고 무엇보다 포근포근하게 맛있는 토란, 기억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발견한 나의 토란.
한여름의 토란밭을 본 적이 있는가. 여름 아침 토란잎 위에 똑또그르 올라앉은 이슬방울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세상 어떤 구슬보다도 영롱하게 빛나던 여름 아침의 그 물방울을 보고 은밀하게 가슴 설레어본 적이 있는가. 소나기 퍼붓는 한여름 낮에 토란잎 우산을 쓰고서 달리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가. 우산이 되어주기도 했던 널찍한 토란잎, 토란잎 위에 궁글어 다니던 영롱한 이슬방울만으로도 토란은 내게 충분히 환희였다. 똑또그르 굴러다니다가도 숨 한 번 크게 쉬면 ‘금도 망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아슬아슬한 환희였다.
가려움이 가시지 않은 손을 비비며
올림픽이 열리던 해, 나는 아버지 혼자 살고 있는 시골 친정집에 와 있었다. 추석이었다. 세상은 올림픽으로 떠들썩한데 우리 집은 적막했다. 엄마가 안 계시니 적막했고 아버지가 아파서 적막했다. 식구가 없어 외로운 집은 명절 때 더 적막한 법. 지난봄에 아버지가 습기 많은 개울 쪽 밭에 심은 토란을 캐와 토란탕을 끓였다. 엄마 살았을 때 추석이면 언제나 끓여주셨던 토란탕.
나는 그 적막한 추석날에 엄마 흉내를 내보고 싶었다. 토란탕만으로도 추석 기분을 좀 내고 싶었다. 엄마가 어떻게 토란탕을 끓였던가, 머리를 짜내어 최대한 엄마가 끓였던 그 토란탕을 재현해내고 싶었다. 예전에 엄마는 분명히 토란잎 무침과 토란대 나물과 토란탕만으로도 풍성한 추석 상을 차려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토란잎 무침은 아예 엄두가 나지 않았고, 토란대 나물은 지나치게 뻣뻣해서 아무 맛도 안 났고, 토란탕은 멀건 토란국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다 당시 우리 집엔 냉장고가 없었기에 애써 만든 토란탕은 추석 상에 올리기도 전에 위에 허연 막이 생기면서 금방 쉬어버렸다.
나는 쉰 토란탕을 앞에 두고, 토란 껍질 벗기느라 그때까지도 가려움이 가시지 않는 손을 비비며 근원으로부터 솟아올라오는 듯한 울음을 삼켰더랬다. 그때가 내 나이 스물몇 살. 그리고 이제 내 나이 마흔하고도 여섯. 나는 이제 예전의 엄마처럼 능숙하게 토란잎 무침과 토란대 나물과 토란탕을 끓일 줄 알게 되었다. 명절이라고 집에 찾아온 아이들한테 나도 예전의 울 엄마처럼 토란 한 가지만으로도 풍성한 상을 차려줄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능숙하게 토란탕을 끓여내는 그 과정 동안 내 젊은 날을 가슴 아리게 생각하는 줄을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토란탕을 어떻게 끓여야 좋을지 몰라 빨리 돌아가신 엄마를 야속하게 여겼던 그날들을.
세상의 많은 이들이 음식을 만들면서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을 떠올린다고 한다. 내가 토란탕을 끓이며 서둘러 세상 떠난 엄마를 야속하리만치 그리워했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명절에 내가 끓여준 토란탕을 끓여보려고 노력하다가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나를 그리워할는지는 모르겠다.
토란탕을 맛있게 끓이는 첫 번째 비결은 먼저 토란을 뜨물에 담가두는 것이다. 그리고 맑은 뜨물에 끓이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생깨를 갈아 넣는 것이다. 톱톱하게 거른 깻국물에 토란이 완전히 익게 끓이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음식은 자기 입맛에 맞게, 자기 식대로 요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요리법일 터. 나는 토란탕을 좀 많이 끓여 냉장고에 넣어두고 속이 출출할 때 한 그릇씩 퍼서 데워 먹는 정도까지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한밤중에 간식으로 먹는 토란탕은 내 출출한 속을 채우며 말할 수 없는 부드러움과 향기로 내 근원적 외로움까지 위로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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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이 먹고 자란 것들을 둘러싼 환경들, 밤과 낮, 바람과 공기와 햇빛, 그것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몸짓과 감정들이 실린 스물여섯 가지 먹을거리 이야기을 담은 음식 산문집. 봄이면 쑥 냄새를 좇아 들판을 헤매고, 땡감이 터질듯 무르익는 가을이면 시원한 추어탕 한 솥을 고대하던 지난시절의 기억들을 소복한 흰 쌀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