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의 편이에요. - 여섯 살 아니타의 말, <러브마크>
어느 날인가, 밖에서 뛰어놀던 꼬마는 갑자기 심각한 얼굴이 되어 집으로 헐레벌떡 들어와 어머니를 찾는다. 부엌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를 발견하자마자 아이는 대뜸 묻는다.
“엄마, 여기가 남한이야, 북한이야?”
그 두 곳 가운데 한 곳이 무시무시한 지옥 같은 곳이고 그곳 사람들은 폭력과 노동 속에 참혹하게 혹사당하고 굶주리며 살고 있다는 얘기를 어딘가 누군가에게서 들은 모양이다. 아이의 얼굴엔 초초함과 궁금함, 공포가 가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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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릴 적 어머니께 던진 첫 질문이다. 어머니가 그때 웃으셨는지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어떤 대답을 주셨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하튼 아이는 어머니의 대답에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첫 질문의 기억은 당대의 대한민국에 사는 아이답게 그렇듯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이고 심각한 측면이 있었다.
세상에 아무런 경계와 구획이란 것이 없이 지내다가 마침내 하나 둘 삶의 안팎으로 가로와 세로, 위와 아래, 앞과 뒤로 금이 그어지면서 아이는 차츰 어른이 되기 마련이다. 좋게 말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꿈과 함께 절망이, 내 편과 함께 타도하고 미워해야 할 적이 생기는 일과 다름없을지 모른다. 누군가 앞서 그어놓은 경계 안에 들어섬으로써 아이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해가지만, 그 강요된 울타리가 후일 예기치 못한 질곡을 예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윈난 성의 고도 리장을 병풍처럼 두르고 선 5,596미터의 옥룡설산에서 만난 작은 아이에게선 그 어떤 경계와 구획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이는 그저 아이일 뿐이었다. 청나라의 흔적이라 할 변발과 그의 배경에 야크가 있다는 것 외엔 보통의 중국 아이로도 혹은 한국이나 일본, 몽골, 인도차이나의 아이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생김새의 아이였다. 나그네는 아이의 꼬집고 싶을 만큼 통통한 볼과 티없이 맑은 얼굴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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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크 한 마리를 관광객들에게 태워주고는 돈을 몇 푼 받는 부모 곁에서 아이는 저 혼자 곧잘 뛰어놀고 있었다. 그러다 수상한 관광객이 다가오자 짐짓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하루 종일 보는 것이 먼 데서 온 낯선 관광객들이지만, 자신을 향해 집요하게 장난을 걸고 카메라를 들어 보이는 나그네가 어찌 수상하고 불안하지 않았겠는가. 나무로 된 울타리에 얼른 얼굴을 감췄다가 한참 만에 슬쩍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발그레하면서도 뽀얗고 탱글탱글한 볼과 푼더분한 얼굴을 한 아이. 티베트 쪽 아이일까? 변발을 한 머리 모양으로 보아 청나라의 피가 흐르는 아이일까? 혹은 한족의 아이일까? 아니면 윈난 성에 흩어져 사는 어느 이름 모를 소수민족의 아이일까?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아이는 그렇듯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아이와도 다르지 않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아이다운 수줍음과 친근함을 드러내고야 만다.
지금은 화폐 개혁을 이뤄 1위안`元부터 100위안까지 모든 지폐에 마오(모택동) 아저씨의 동일한 모습이 그려진 도안을 사용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 화폐 단위마다 중국에 흩어져 있는 소수민족들의 모습이 화폐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때 2자오角짜리 지폐에 새겨진 것은 한복을 입고 있는 조선족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지폐에 소수민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킬 만큼 소수민족의 문제는 중국이 짊어지고 가야 할 불가피한 운명이자 천형인 셈이다. 몽골, 거란, 위구르 족 등이 한족의 자리를 밀고 들어가 잠시 중원의 주인공이 된 역사도 있거니와 저희끼리 잘 어울려 살고 있던 티베트나 위구르 등 소수민족을 무리하게 동화시키려 한 질곡과 폭력도 상처가 아물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윈난 성은 특히 인도차이나, 티베트와 지리?역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탓에 수많은 소수민족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중국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25개의 소수민족 수로도 확인된다. 티베트 민족인 장족, 윈난 성에 넓게 분포된 나시족, 그 밖에도 회족, 이족, 묘족, 샨족, 라후족, 타이족, 바이족 등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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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족이면 어떠한가? 귀엽거나 엉뚱하거나 해맑거나 순수한 착한 마음씨의 민족. 대뜸 경계심부터 갖지만 아주 쉽게 마음을 녹여 누구와도 친구가 되는 온순한 민족. 쉽게 울음을 터뜨리다가도 간단히 웃음으로 돌아서는 이 요령부득의 민족은 세상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세상 어디서나 그다지 다르지 않은 ‘아이’라는 민족, ‘아이’라는 공화국의 사람들이다.
다가오는 조금 더 합리적인 세상에선 이 아이들이 어떤 경계와 구획 안에 있다는 이유로 상처 받거나 절망하지 않기를. 폭력에 무릎을 굽히거나 눈물 흘리지 않게 되기를. 어른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어놓고 강요해온 혹독한 금들이 모두 사라지기를. 그리하여 그런 아이들이 만나 만들어나가는 세상에서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