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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意의 소년

나의 꿈 많고 호기심 많던 유년에 성룡 선생이 출연한 홍콩 무협영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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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과 홍콩 무협영화가 있어 나의 유년은 충분히 즐겁고 아름다웠노라.

유일한 복수의 방법은 그들보다도 즐겁게 사는 것이다. - 무라카미 류, 『69』


나의 유년에 영화가 있었다.

나의 꿈 많고 호기심 많던 유년에 성룡 선생이 출연한 홍콩 무협영화가 있었다. 성룡과 홍콩 무협영화가 있어 나의 유년은 충분히 즐겁고 아름다웠노라.

내가 (비디오나 TV에서가 아닌) 영화관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는 무엇이던가? 초등학교 5, 6학년 때쯤 보았던, 그때로선 경이롭기 그지없던 <007 문레이커>였던가? 고등학교 때 보았던, 역시 그때로선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던 <터미네이터 2>였던가? 서너 해 전인가, 같은 극장에서만 서너 번 정도 본 적이 있는 스페인 영화 <그녀에게>일까? 그러나 그 모든 영화보다 불쑥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내가 영화관에서 제 돈 내고 가장 많이 본 영화는 단연 위대한 성룡 선생의 출세작인 <취권>이다.

몇 해 전까지 간신히 동시상영으로 연명하다가 마침내 문을 닫고야 만 옛 동네 ‘현대극장’에서 초등학교 3, 4학년 무렵 이 영화 <취권>을 거의 대여섯 번쯤은 본 기억이 있다. 그때가 나에겐 무협영화의 시대였고 성룡 선생에 대한 절대숭배기였다. 권선징악의 시절이자 사필귀정의 시절이었고 삼강오륜과 화랑오계의 시절이기도 했다.

초등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개봉 영화를 대여섯 번이나, 그것도 제 돈 내고 본단 말인가? 여기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유년의 범죄행각을 처음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당시 구멍가게를 하던 우리 집의 금고 서랍을 몰래 열어 부모님이 땀으로 벌고 모으셨던 꼬깃꼬깃한 돈을 몇 푼씩 훔쳐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어린 양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 영화 <취권>을 대여섯 번씩이나 보면서 위대한 성룡 선생이 스크린 속에서 묵묵히 암시로 가르쳐주시던 취권의 정신과 자세, 동작을 순전히 독학으로 연마해야만 했다. 영화를 거듭 보면 볼수록 나는 이 전대미문의 위대한 권법을 터득하고 싶어졌고, 영화를 본 뒤 그 가슴 벅참을 어찌할 줄 모른 채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 돌아와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혼자 비틀거리며 머릿속에 저장된 장면들을 따라 움직이곤 했다.

아! 내게도 소화자 같은 술주정뱅이 스승이 어디선가 나타나 희대의 권법을 전수해준다면!

아! 내게도 강렬한 복수의 마음으로 불타게 하는 악의 무리가 나타나 사정없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가, 마지막 장면에 가선 비로소 무릎을 꿇어준다면!

제법 열심히 권법을 흉내 낸 나의 등줄기는 쏟아지는 땀방울로 흥건히 적셔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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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사형도수><사제출마> <소권괴초>로 이어지는 성룡 선생의 필모그래피는 황홀하고 위대했지만 <취권>의 그 압도적인 충격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후에도 홍금보나 주윤발, 이연걸 같은 이가 혹세무민하며 강호와 무림의 세상에 깝죽거렸지만 어찌 성룡 선생이 보여준 달관과 초월의 경지에 감히 근접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후에도 설이나 추석마다 성룡 선생은 도무지 늙지도 않고 강림하셨지만 이미 마음속 스승의 무거운 소임을 내려놓으신 뒤였다. 오직 <취권>의 성룡만이 절대자이고 스승이었다.

리장의 골목을 무심히 지나가는데 정말이지, 도무지 믿기 어렵게, 극적으로, 꼭 30여 년 전 옥상 위를 홀로 주름잡던 유년의 내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혼자 골목에서 열심히 권법을 흉내 내고 연마하는 아이. 어린 내 모습과 다른 점이 있다면 태권도조차 변변히 배워보지 못해 엉성하기 그지없었을 나와는 다르게 녀석의 자세는 어딘지 제대로 배운 세련됨과 단단함이 넘쳐흘렀다. 녀석의 마음속에도 악한 자에 대한 복수심과 정의감이 넘쳐 어쩌지를 못하는 듯했고 위대한 스승의 의발을 전수받아 혼탁한 강호에 평정자가 되리라는 야심이 가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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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은 현실보다는 대체로 꿈속에서 살았던 시절 같다. 그나마 깨어 있거나 인지했던 현실도 어느 정도는 파랑새의 빛깔을 띠고 찾아왔다. 어떤 꿈이든 실현이 가능하며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봉사하는 것만 같았다. 머리털을 몇 개 뽑아 허공에 ‘훼~’ 하고 불면 손오공처럼 무수한 내가 나타날 것만 같고 철이가 되어 태권V를 조종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과학자가 되어 그런 로봇 몇 개쯤 쉽게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비 다리 부러뜨리면 금은보화가 가득 든 박씨가 떨어질 것 같고, 권총 한 자루 손에 쥐면 단번에 예닐곱 명의 악당을 넘어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 그런 출처 불명의 오만함, 그런 아름다운 엉뚱함은 도대체 언제 어느 사이에 내 곁에서 모두 달아나버렸는가? 그런 아름다운 헛발질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내겐 겉만 번드르한 현실과 비겁하게 주눅 드는 초라함만 남았는가? 그 많던 내 마음속 영웅은 모두 어디로들 떠나버리셨는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쑥스러워하기는커녕 더욱 씩씩하고 자신 있게 자기가 연마하고 터득한 권법의 정수를 뽐내는 아이. 이런 똘똘한 아이들이 있는 한 적어도 악의 무리가 땅에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고 언제나 정의와 평화만이 승리하는 세상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어른의 세상, 이 암담하고 슬픈, 대책 없이 커버린 자들의 현실은 누가 구원해주고 지켜줄 것인가.


현자가 된 아이들
이희인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베테랑 카피라이터이자 여행가인 이희인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그 얼굴을 담은 사진들을 함께 실어둔 포토 에세이이자 여행 에세이. 몽골 초원과 시베리아 벌판,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의 실크로드, 신들의 거처가 있을 법한 티베트 등 아시아 각지에서 만난 아이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거칠고 힘든 땅을 방문하면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풍경 대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자'인 어린이들을 사진기에 담았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현자가 된 아이들>은 ‘웅진지식하우스’와 제휴하여, 매주 목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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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가 된 아이들

<이희인> 글,사진10,800원(10% + 5%)

베테랑 카피라이터이자 여행가인 이희인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그 얼굴을 담은 사진들을 함께 실어둔 포토 에세이이자 여행 에세이. 몽골 초원과 시베리아 벌판,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의 실크로드, 신들의 거처가 있을 법한 티베트 등 아시아 각지에서 만난 아이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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