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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한번 맛보면 헤어 나오기 어려워요

여행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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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갔다 오면 늘 후유증이 있다. 긴 여행이든 짧은 여행이든, 소속이 있든 없든.

여행을 갔다 오면 늘 후유증이 있다. 긴 여행이든 짧은 여행이든, 소속이 있든 없든.

난생 처음 휴가를 이용해 8박 9일의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가 없었다. 그 뻥 뚫린 가슴을 메울 길이 없었다.

‘저 끝없이 펼쳐진 길이 너를 부르는데,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니?’

그래서 길을 떠났다. 여행이 직업이 된 이후에도 여행후유증은 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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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마약 같다. 한번 맛을 보면 헤어나기가 힘들다. 손에 책을 들고 있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일을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게 나의 삶일까?’ 회의가 들기도 하고 한동안 여행하던 때의 추억 속에 파묻혀 마음고생을 한다.

TV에서 직접 가본 유럽의 도시와 풍경을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며 잠 못 이루고, 더운 여름 거리를 걷다가 매연 섞인 공기를 맡으면 방콕에서 활보하던 추억이 생각나 가슴이 저려온다. 인도 음식점에서 카레 냄새만 맡아도 가슴이 울컥하고, 지하철 안에서 길을 묻는 외국인만 봐도 지난 여행이 떠올라 괜히 우울해진다. 몸은 돌아왔으나 마음은 아직 그곳에 있는 상태.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듯 그곳이 계속 생각난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자꾸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가고 일상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젊은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내 동생은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고 성실하게 사회생활을 했다. 그러다 결혼 15년 만에 큰마음 먹고 유럽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는데, 돌아와 한동안은 밤마다 앨범 정리를 하며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여행은 중독성이 강하다. 하물며 학생이나 직장을 다니는 싱글들은 오죽할까? 빡빡한 입시제도에 시달리는 고등학생, 온갖 인간관계와 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직장인은 정말 모든 걸 떨쳐버리고 떠나고 싶을 것이다. 새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을 것이다. 내가 그랬기에 나는 그들의 심정을 잘 안다. 그러나 그렇게만 살아갈 수 없기에 고민되는 것 아닌가.

그런가 하면, 요즘 들어 부쩍 나처럼 용감하게 직장을 그만 두고 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을 만난다. 학생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가라고 하지만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나는 쉽게 ‘떠나라’고 얘기하지 못한다.

글쎄, 이렇게 말하면 ‘아, 저 사람이 과거에 대해 후회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건 전혀 아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30대 초반에 그 일을 저지른 것이고, 죽을 때 눈 감고 그 장면을 생각하면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라고 상상할 정도로 아주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에게는 시원스럽게 권하지 못할까?

긴 여행 끝에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벅차 보이기 때문이다.

한때, 아니 요즘도 ‘떠나라’는 외침이 삶에 지친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과 용기를 준다. 모든 것 버리고 떠나기, 이 얼마나 쿨하고 멋진 말인가. 요즘은 이런 심플하고 자극적인 구호가 사람들에게 어필한다. 말이 길면 안 된다. 많은 이들이 떠난 후의 이러저러한 현실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하지 않거나 외면한다. 지금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떠나고 싶기 때문에 뭔가 용기를 북돋아주는, 혹은 떠나고자 하는 자신을 합리화할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지만 그 후 이런저런 과정을 겪고 나니 저절로 조심스러워진다. 사실 여행이야 뭐 어려운가. 누구나 걱정하는 것은 그다음에 이어질 불안하고 긴 삶일 것이다.

물론 몇 년간의 긴 여행 후 흔들림 없이 잘 사는 사람들도 있다. 여행을 긴 휴식이나 배움, 혹은 재충전의 계기로 삼고 더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다. 그들에게 여행은 자신의 삶에서 기획된 ‘이벤트’이기에 여행을 끝내고 나서도 앞으로 가야 할 분명한 목표가 보인다. 이런 태도는 그동안 우리가 살아왔던 사회적인 분위기였고 거기에 만족하고 살면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와 자리를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며, 일상에 마음 붙이고 산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한번 금단의 과실을 맛본 이는 돌아온 현실에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삶의 고통 때문도, 돈 때문도 아니다. 우리 사회가 너무 숨 막혀, 그 반복되는 일상과 팍팍함이 싫어서 떠났는데, 다시 그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답답한 것이다. 결코 게을러서가 아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사람은 주어진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뛰는 사람들보다 더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

자신이 살던 세계를 버리고 떠난 사람은 돌아와 가슴속에 자신의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이 사회에서 만든 신기루 같은 관습과 가치, 윤리와 법과 질서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일상은 변한 것이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이 변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가치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니다. 사회의 뻔한 가치를 따르기도 싫고, 그렇다고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상태에 빠져 삶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유하는 이 세상에 몸과 마음을 바칠 가치가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에 그런 데에서 오는 내적인 갈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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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행이든 긴 여행이든 여행후유증은 있다. 오늘은 추억을 회상하며 행복할 것이고, 내일은 변함없는 일상에 한숨도 쉬겠지. 직장이 다시 생기든, 친구들이 있든, 부모가 있든 낯선 땅에 유배된 것처럼 이 익숙한 세계가 종종 서글프고 허전할 것이며,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을 향한 끝없는 그리움에 가슴이 저릴 때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다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진한 연민을 느낀다.

여행후유증이 생기면 나 역시 고스란히 여행병을 앓는다. 그럴 때는 책의 구절도, 거리의 철학도, 흔하게 떠도는 얘기들도 나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다. 다만 어디론가 흘러가는 검은 강물을 바라보는 순간들이 위로가 될 뿐.

그래, 저 강물처럼 나도 흘러 가거라.

시간이 가면 여행 모드가 다시 일상 모드로 변하겠지.

어차피 우리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시간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 저자 이지상의 블로그 - 이지상의 여행카페


※ 운영자가 알립니다.
<낯선 여행길에서>는 ‘중앙books’와 제휴하여, 매주 수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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