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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잠수하고 싶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가? 잘 살아가다가도 문득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공간에 폭 파묻혀 숨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까지 주로 오지를 다녔고 장기여행도 많이 했으며 여행자로서 주목을 받았고 비슷한 여행자들끼리 늘 어울렸다. 그것도 좋은 경험이었고 즐거운 추억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것도 피하고 싶어졌다. 내가 여행자인지 현지인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릴 필요도 없는 그런 곳이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완전한 익명으로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은 채 있고 싶었다. 그런 조건을 만족시켜주는 곳은 바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대도시였다.
요즘 들어 도시를 몇 군데 여행했다. 우선 타이페이. 나는 심해를 잠수하는 기분으로 타이페이로 숨어들었다. 이런 여행에서는 친구도 만들지 않았고 여행자도 찾지 않았으며 한국 사람도 찾지 않았다. 잠수함 창문을 통해 물고기와 산호초를 구경하는 기분으로 사람들과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노트북을 가져갔고 호텔에서 인터넷에 접속했다. 편한 세상이었다. 모니터 속에는 집에서 늘 보던 화면이 떴고 내 블로그도 불러낼 수 있었다. 나는 해저에서 잠망경을 빙빙 돌리듯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내 블로그에 인사말을 남겼다.
“매일 저녁 타이페이 여행을 사진과 글로 실황 중계할 생각입니다. 좋은 음악 CD를 사면 그것도 올릴게요. 사실 저는 배낭여행을 하면서 주로 오지를 좋아했고 방랑을 좋아했습니다. 여행할 때는 문명의 이기에서 가급적이면 멀리 떨어지려고 했는데 이번 여행에는 도시 속으로 파고들 생각이에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색다른 여행을 해보려구요. 남들에게는 익숙할지 모르는 이런 인터넷 세계가 저에게는 흥미진진합니다.”그리고 메일을 체크했다. 몇 개의 메일에 이런 답장을 보냈다.
“저는 현재 타이베이에 있습니다. 며칠간은 휴대폰도 되지 않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바다 건너에 있거든요.^^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나중에 연락하세요.”그런 답장을 보내며 묘한 쾌감에 젖어들었다. 세상과의 관계는 끊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 관계를 벗어난 상태. 우와, 해방이다!
나는 냉장고에서 타이완 맥주를 꺼내 쭉 들이켠 후 배낭 속에 있는 물건들을 다 끄집어내 어질러 놓았다. 이건 버릇이기도 하지만 꽉 짜인 생활을 하다가 밖에 나오면 마냥 풀어지고 싶은 충동이 일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이베이에서 1주일 동안 숨어 지냈다. 아니, 숨은 것도 아니었지. 매일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녔고 근교까지 나가서 여행을 즐겼다. 아침이면 카페에 들러 빵과 커피를 마셨고 느긋하게 앉아서 중국어 신문을 읽기도 했다. 그런데 왠지 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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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의 행색을 한 이방인은 빈둥거리며 도시 곳곳을 구경하다가 밤이 되면 스파이처럼 인터넷에 접속해 디카로 찍은 사진들을 올리며 여행지를 실황 중계했다. 그러면 부러움의 댓글들이 달렸다.
“빈둥빈둥 모드 정말 좋아하는데. 많이 보고 느끼고 오시길….”
“하하하 어질러 놓은 사진 좋아요! 여행 중 한순간이 고스란히 느껴지네요. 타이베이 중계 기대합니다! 실시간 포스팅이네요.(지금쯤 야시장 돌고 계실려나)”나는 그들과의 대화를 잠시 즐기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인터넷을 끄는 순간 다시 깊은 바다 속이었다. 그때 밀려드는 것은 고독함이 아닌 평화로움. 몸은 떨어져 있으나 정신은 접속하니 외롭지 않았고 정신은 이어지나 몸은 떨어져 있으니 자유로웠다.
그런 재미에 중국과 일본의 대도시를 짧게 여행하다가 올여름에는 오사카와 교토도 다녀왔다. 노트북을 가져가지 않았고 인터넷도 하지 않았지만 외롭지 않았다.
이곳에는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게 있었다. 틀기만 하면 언제나 재즈가 나오는 라디오였다. 그걸 들으니 내가 이국 땅에 왔다는 것이 더 실감났다. 오사카에선 어딜 가나 재즈가 흘러나왔다. 지하철역 구내를 비롯해 맥도날드 매장과 레스토랑 등 아침부터 밤까지 재즈가 흘러 나왔다. 그 재즈를 들으며 나는 바삐 사는 그들의 삶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그들에게는 일상이고 우리와 비슷한 풍경이었지만 여행자인 나에겐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오갔다.
‘내가 이들에 섞여 바쁘게 일을 하러 가는 처지이었다면 그렇지 않았겠지. 나는 게으른 여행자. 아, 달콤하다. 시간이 달콤해!’재즈를 들으며 노트에 이런저런 생각을 담는 동안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잠수하고 싶을 때, 완전한 익명성을 즐기고 싶을 때는 도시로 짧은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로 깊이깊이 잠수해서 익명의 여행자가 되어 게으르게 빈둥거리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세상을 무책임하게 구경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에서 잠시 벗어나 숨구멍을 좀 트면, 바쁘게 살아오느라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되살아나 우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 저자 이지상의 블로그 -
이지상의 여행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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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행길에서>는 ‘중앙books’와 제휴하여, 매주 수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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