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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불안정했던 열여덟 살, 그때 만난 『상실의 시대』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고등학생 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공부하는 걸 싫어했을까?’란 의문이 들 만큼 공부와는 완벽하게 담을 쌓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고등학생 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공부하는 걸 싫어했을까?’란 의문이 들 만큼 공부와는 완벽하게 담을 쌓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이 열심히 세계사를 공부할 때 좋아하는 록 밴드의 계보 외우기에 한창이었고, 친구들이 영어 성적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문법책을 들출 땐 뜻도 모르는 가사와 곡 순서를 외우기 위해 부클릿을 펼쳤으며, 모두가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맨 뒷자리에 앉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보노의 목소리에 심취하곤 술에 취해 무대 위에 오르는 뮤지션처럼 몽롱한 상태로 그림 그린 기억밖에는 없으니까요. 수업이 끝나면, 여학생과 데이트하느라 바빴고, 열여덟 살 나이로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만나던 이성과 안 좋게 헤어지면서 ‘이런 게 가슴이 아프다는 건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상처라 말하는 종류의 감정이라는 게 별것 아니구나.’라고 당시의 청소년은 아주 쉽고 가볍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면서 경험해 볼 수 있었던,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받을 수 있는 상처에 대한 아픔이라든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 버렸을 때의 상실감, 타인과의 관계에선 100퍼센트 완벽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에서 밀려오는 서글픔 같은 복잡한 심경의 변화를 책 한 권을 통해 느껴본 적이 있었는데, 그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입니다.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교실 한구석에서 숨기기도 힘든 두꺼운 책을 교묘하게 숨겨 가며 전부 읽고는 심장의 반쪽을 누가 도려낸 것 같은 아픔과 함께, 모두가 컬러로 존재하는 세상에 혼자 흑백인 상태로 살아가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꼈고, 귀에서는 누군가 종이라도 세게 치고 사라진 것 같은 무언의 울림을 들을 수 있었으며, 몸은 커널패닉이라도 걸린 것처럼 경직된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내 안의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을 때 느껴지는 공허란 이런 것인가? 내 심장은 멀쩡히 뛰고 있는데, 누군가 칼로 상처를 내어 피가 철철 넘쳐흐르는 것 같은 이 아픔은 무엇인가? 내 몸 구석구석에 구멍을 뚫고 통과하는 바람처럼, 차갑고 기묘한 스산함과 외로움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불안정했던 열여덟 살. 인격이 완성되어가는 가장 중요한 시기, 주위의 사소한 것에도 쉽게 흔들릴 수 있는 그런 인성이었기에 『상실의 시대』 한 권으로 심장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가끔 펼쳐놓고 구석구석 조금씩 읽고 있노라면 내면의 실타래가 무엇 하나 제대로 풀려있지 않던 열여덟 살의 복잡한 나 자신을 돌이켜볼 수 있고. 그때의 봄날 오후와 같은 햇살과, 심장까지 닿을 것만 같았던 깊은 한숨까지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도 좋아하지만, 93년에 한양출판에서 나온 김난주 씨 번역의 『노르웨이의 숲』도 매우 좋아합니다. 물론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겠지만 말이에요. 아 참, ‘상실의 시대’ 하니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데, 제 지인 중 한 사람은 『상실의 시대』를 무척 재밌게 읽은 나머지, 번역본이 아닌 원본을 꼭 읽어보고 싶다며 일본어 공부를 몇 년 열심히 하고는 원서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을 읽으며 매우 흡족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를 좀 더 먹고는 번역 일을 종종 하기도 하면서 말이죠. 지켜보던 저로서도 무언가 의욕이 불끈 생겨서는 ‘나도 일본어 공부해서 하루키 책을 전부 읽겠어!’라며 의욕적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지만, 어느덧 U2의 신보에 귀 기울이며 일본어 교재 위로는 부클릿이 올라와 있고 오른손으론 교재 구석에 낙서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라며 시무룩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