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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서윤후X최다정 – 내 방에 없어도 되지만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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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시인과 최다정 한문학자가 ‘내 방’을 주제로 서로 에세이를 주고 받습니다. 나를 길러내고 사랑하게 하는, 방 안의 잡동사니들.


사진 : 최세운


서윤후


나뉘어 있지 않은 길 위에 서 있었다. 출발도 도착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혼돈이라도 기꺼이 누리고 싶은 마음이어서, 나는 이 세계에 들어왔다. 잡동사니의 세계.

학교 다닐 적, 나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아이 중 하나였다. 학급 환경 미화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는데, 그것은 정해진 구역을 정해 둔 주제로 자유롭게 꾸미고 채워 나갈 수 있어서였다. 친구들과 보낸 시간들, 저마다 바라는 것을 오리고 접고 그려 교실 뒤 초록색 부직포로 덮여 있던 빈 게시판을 요모조모 꾸몄다. 사실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방과 후 남아 아무도 없는 교실 안에서 도란도란 모여 앉은 채로 우리들의 목소리만 새어 나오는 그 고요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속삭이고, 그렇게 갑자기 꺼낸 비밀 하나로 우정을 체결했던 그곳의 두서없던 이야기가 지금의 나를 길러 냈다고 믿을 때, 무언가 꼭 들어맞는 기분이 든다.

훗날에는 학급 신문을 만드는 일부터, 교지 편집부에 들어가 잡다한 것들을 만지고 편집하고 다듬는 일을 자처했다. 대학에 다닐 때 유일하게 기뻐하며 했던 일은, 친구와 블로그에 매달 잡지 형태의 글을 발행하는 일이었다. 그림판으로 원고를 올리고, ‘ㅇ’ 자음 속 동그라미를 페인트로 채워 넣던 허접한 시간이었지만. 이야기가 있어서 견딜 수 있는 날들이었다. 첫 직장으로 잡지사에 들어가는 일은 내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난장이었다. 8구짜리 멀티탭이 된 것처럼, 기사 하나를 내는 데 정말 많은 일이 필요했다. 주어진 두 페이지를 채우기 위해 섭외와 인터뷰, 협찬과 기사 쓰기, 사진 고르기까지…… 일은 그만큼 힘들었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잡동사니를 좋아하는 마음.

색깔이나 종류별로 흐트러짐 없이 정리된 모습을 보면 어딘가 숨이 막힌다. 생활이라는 감각 속에서 여기저기 자기 몫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사물들의 어우러진 풍경이 내게는 더 생동감으로 다가온다. 가끔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것을 아기자기한 것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은 내게, 남자애 취향치고는 여성스럽다든지, 특이하다든지 그런 비아냥 섞인 이야기를 하곤 했었는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잡동사니의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것이 내겐 말하는 일과도 같았으니까. 어쩌면 생존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0년 전 독일 뉘른베르크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구매했던 다람쥐 인형이 놓여 있는 내 방 스탠드 아래로, 얼마 전 통영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다른 다람쥐 열쇠고리를 기대어 놓았다. 마치 오래 떨어져 지낸 가족을 만나게 해준 것 같아 홀로 기뻐하며 축하하기도 했다. 사실은 아주 작은 우연에 불과했지만. 나로 인해 이 잡동사니의 세계가 이야기로 연결되는 것이 좋다. 사연마다 정거장이 되고, 살아 내는 동안의 이야기가 시간의 노선도처럼 복잡하지만 정교하게 흐르는 이 잡동사니의 풍경 안에도 질서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꼭 그것이 내가 지나온 시간의 지도를 그리는 것만 같았다. 그것을 알아봐 주는 사람과는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믿는 것은 좋은 집이나 좋은 음식이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사는 일 사이사이로 아무렇게나 붙여 놓은 스티커, 사놓고 쓰지 않는 엽서,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인형, 귀여운 일러스트가 그려진 접시나 컵,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이 자수로 놓인 양말이 서랍에 잘 개켜져 있을 때, 비로소 사람 사는 것 같다며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방 안에서 노래를 들을 때, 보통은 컴퓨터와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듣지만 얼마 전부터는 LP를 열심히 듣고 있다. 집에 온 사연이 달라서 마모된 모서리, 앨범 커버, 비닐 유무 등 LP들이 한데 모여 있는 풍경도 잡동사니를 이룬다. 한 곡의 노래를 듣는 데 공을 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뭐든지 쉽고 신속하게 해치우고만 있다고 여긴 탓에, 나를 스스로 번거롭게 만드는 일로 그 노래에 기꺼이 다가가 기대어 감상하는 일을 한다. LP를 듣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 과정이 필요하고, 그 뒤로 노래 한 곡을 듣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준비를 거듭해 감상하려는 태도에 이르게 된다. 컴퓨터에서 무작위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흘려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앨범에 몰입하는 감상으로부터 자동적이고 무작위로 구성되던 생활을 일시적으로 지연시킨다. 잡동사니에도 그런 힘이 있다. 멈춰 세우고,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 어떤 비명은 너무나도 커서 들은 체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귓속말은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 없듯이. 작은 것들이 말을 걸어오고, 작은 것들에게 다가서는 이 두서없지만 고귀한 풍경을 잡동사니는 가능하게 만든다. 사물을 그들의 이야기로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들과 조응할 수 있다는 사회학자 팀 잉골드의 말을 영혼의 등에 오롯이 새기면서 하는 생각들.

잡동사니 속에는 한 번도 호명되지 못하고 잊힌 물건들도 많다. 가끔은 그런 것들을 꺼내어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고 인기척하는 것이 예의다. 내가 최근에 손에 든 것은 두부 스탬프였다. 이사하면서 호기로운 마음에 구매했다가 순번을 잊고 지나쳐 버린 귀여운 물건. 따뜻한 두부 한 모의 머리 위로 자동차 모양의 스탬프를 찍은 다음,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참에 그것을 발견하고선 잠깐 귀여워하며 화기애애한 식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그러나 내 삶에 끼어든 팔 할의 두부는 스탬프를 남기기 어렵게 언제나 차갑다)

잡동사니의 세계에는 그런 미덕이 있다. 웃을 수 있고, 흐뭇한 얼굴을 하고선 소란을 고삐에 걸어 둔 채 멀리 침묵에게로 잠깐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 다채로움을 지나는 나의 어둠은 본래 알록달록했을 것이라고 이상한 희망을 쥐게 만든다. 어둠을 분간하지 못하는 고난 속에서도 귀여운 장면은 사진으로 남기고, 발걸음을 멈춰 말을 걸고, 사물에게 저마다 나를 찾아온 이야기를 쥐여 준다. 어디선가 이들이 나를 돕고, 나도 이들을 풍경 속에 심어 주었다는 사실을 나눈다.

잡동사니의 세계에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 나와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진 잡화들과 하나의 이야기에 뒤섞이는 과정에서 나는 아주 맑고 기분 좋은 현기증을 느끼곤 한다.



최다정


나를 미워할 순서는 혼자가 된 방에서 돌아온다. 어떤 사건이 종료된 이후에 지나간 나를 돌아보면서 그제야 느끼는 감정은, 뒤늦게 도착한 후회와 슬픔이다. 방에서 웅크리고 마음껏 나를 미워한 시간 끝에 남는 것이 깊은 절망인 적도 있지만, 때로는 반성과 사랑이 남기도 한다. 후자인 경우, 나는 몸도 마음도 조금 자라난 기분이 든다. 좁은 방에서 애써 어렵게 벌어지는 일종의 성장 과정을 홀로 겪기 위해선, 말없이 나를 도와줄 사물들이 곁에 필요했다. 방에 사는 나를 키워 낸 공로는 침묵하며 나와 동거해 온 사소한 사물들에게 돌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생활하는 방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내 방엔 있는 것들.

지금 글을 쓰는 책상 위 모니터 근처엔 도토리 한 알이 보인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 동안 자꾸 손을 뻗어 동그란 도토리를 만지고 굴려 본다. 인고 끝에 맺힌 세상 모든 열매는 애틋하고 대견하지만 특히 도토리를 편애한다. 내가 한문(漢文) 공부의 길을 걸어온 비결이, <도토리를 발견하고 줍는 다람쥐의 반가움과 기쁨으로 이 길에 임한 것>이라고 여기저기에서 말한 적 있다. 이런 나의 도토리 사랑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예쁜 모양의 도토리를 주우면 나에게 가져다준다. 그렇게 모아 온 도토리 한 알은 지갑 안에, 한 알은 책상 위에, 한 알은 LP 수납장 위에 놓여 있다. ‘알’이라고 세는 것이 아주 잘 어울리는 도토리. 얼마 전엔 나를 아껴 주는 사람이 주머니에서 따뜻해진 도토리를 일곱 알이나 꺼내 건네었다. 산에서 나에게 주려고 주워 왔다는 옹골진 도토리 중 몇 알을 화분에 심어 방의 창가에 두었다. 아직 싹이 돋을 기척 없는 도토리 화분 곁을 서성이면서, 키가 커진 나무가 다시 도토리를 주렁주렁 맺는 어느 날을 그려 보곤 한다.

도토리 화분이 놓인 창가 앞엔 성냥갑과 인센스 스틱 상자들을 쌓아 둔 구간이 있다. 향을 내는 재료와 크기, 빛깔이 제각각인 인센스 스틱들은 그간의 자취 생활 동안 모아 온 것인데, 출처가 다양한 향들 사이에서 성냥갑은 딱 하나이다. 초록색 바탕에 금빛으로 크리스마스트리와 순록이 새겨진 성냥갑. 지금은 모서리가 낡아진 이 성냥갑을 처음 방에 둔 건, 가장 좁은 방에 살던 시절이었다. 싱글 침대조차 들어가지 못해 이불을 펴고 간신히 누웠던 방이다. 그러나 공부와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는 혼자의 공간이 간절했던 때였기에, 그 방에서 지내는 시간 내내 몹시 감사했다. 크리스마스 무렵, 양초와 함께 트리 그림이 그려진 이 성냥갑을 사서 방에 놓아두었다. 성냥갑 속에서 빛내는 트리의 작은 아름다움에 기대어도 충분히 안온했던, 겨울의 내 방이었다. 이후로 여러 형태의 방을 지나오는 동안 매번 이 성냥갑을 챙겨 다니며 나의 향 구간에 두고 아껴 썼다. 이사한 낯선 동네의 방에서도 성냥 하나를 꺼내어 불을 붙이는 순간, 작고도 컸던 지난 방의 기억에도 불이 켜졌다.

과거의 기억 중엔 영영 불을 꺼둔 채로 두는 편이 안전한 조각도 있지만, 자꾸 불을 밝혀 소환해 내는 게 이로운 기억도 있다. 여행의 추억이 그렇다. 돌아갈 수 없는 여행을 여기로 불러오는 신속한 촉매제는 사진이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떠났던 여행 끝에는 인화한 사진이 기념품으로 남고, 그중 몇 장면은 오래도록 방 곳곳의 벽에 걸어둔다. 구례의 골목길 담벼락에 뜬금없이 그려져 있던 고래, 제주도 호텔 방 창문으로 내다본 해 질 녘 바다, 경주 첨성대 앞 꽃밭에서 바람에 흔들리던 해바라기가 담긴 사진들. 사진이 붙은 벽을 지나며, 나는 방의 생활 속에서 잠시나마 여행의 길목들을 걷게 된다. 이사 다닐 때마다 사진을 떼어 가 새 방에 또 붙여 두곤 했기에, 사진 뒷장에는 여러 색의 마스킹 테이프 흔적이 남았다. 벽 일부를 차지한 이미지 중에는 그림엽서도 있다. 대체로 여행 도중 괜한 용기가 생겨 누군가에게 써주려고 고심해 골랐던 엽서인데, 텅 빈 면을 뒤로 감춘 채 벽에 액자처럼 붙여 두게 된 것들. 어떤 엽서엔 ‘OO에게’까지만 적혀 있기도 하다. 이제는 너무 늦어 버린 안부일지라도, 살가운 마음을 이면에 숨긴 풍경들이 내 방을 좀 더 정답게 둘러 주고 있다.

도토리, 성냥갑, 사진과 그림엽서 들이 있는 방과 없는 방은 분명히 다르다. 생활 공간을 꾸리기 위해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내 방엔 있는 것들이, 공간을 내 방답게 만들어 준다. 캄캄한 방으로 돌아와 자신을 미워하다가도 결국엔 사랑과 고마움의 자리를 더듬어 찾아내도록 도토리 한 알, 성냥 한 개비, 사진 한 장이 나를 돕는다. 온기 어린 기억을 조용히 간직하며,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소품들의 모양을 만지고 냄새를 맡고 색을 눈에 담으면서 나는 여러 번 나를 용서할 수 있었다.


*필자 | 서윤후

1990년에 태어나 전주에서 성장했다. 2009년 《현대시》로 등단했으며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등을 펴냈다. 제19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2022년생 코리안 숏헤어 고양이 ‘희동’이와 함께 살고 있다.

*필자 | 최다정

한자와 만주문자를 단서로 삼아 옛날을 탐구하고 있다. 여기 너머에 있는 옛 문자의 세계를 동경한다. 고려대학교 고전번역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한자 줍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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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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