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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소년 십자군, 그리고 최악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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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네것의 『제5도살장』은 작가가 직접 겪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SF 법칙을 따르는 SF소설이기도 해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죠.

『제5도살장』

커트 보니것 저/정영목 역 | 문학동네


책이 너무 짧고 뒤죽박죽이고 거슬리네요, 샘. 대학살에 관해서는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지요. 원래 모두가 죽었어야 하는 거고, 어떤 말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거고, 다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거지요. 원래 대학살 뒤에는 모든 것이 아주 고요해야 하는 거고, 실제로도 늘 그렇습니다. 새만 빼면.

 (『제5도살장』, 33쪽)

모든 것이 고요해야 한다. 생각해 보니 그건 내 속마음이었다. 전쟁과 학살과 죽음 같은 것을 깊이 생각하기가 싫었다. 처참한 기록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순간이 지나면 안락한 상태로 돌아갔다. 참담한 감정을 너무 오래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소시민, 소인배, 소소한 관심과 인색한 마음 씀씀이. 내가,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태도였다. 커트 보니것은 인간의 이런 습성을 익히 알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드레스덴에서 대규모 폭격과 학살을 겪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그처럼 단기적인 사건으로 사람들의 생활이 바뀌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드레스덴 사건은 경악스러웠지만, 경악스러운 경험이 당신을 전혀 바꾸지 못할 수 있다.” 

커트 보니것은 전쟁에 미군 보병으로 참전했다. 그는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으로 호송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담은 소설 『제5도살장』에는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인물이 간간이 등장한다. 드레스덴에 도착한 보니것은 그곳의 화려하고 섬세한 풍경을 보고 무심코 ‘오즈’ 같다며 감탄한다. 그는 5번 도살장이었던 공간에 수용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격기가 드레스덴 상공을 휩쓸고 지나간다. 하루 만에 그곳은 ‘달 표면’처럼 매끄러운 폐허로 변한다. 다만 달의 먼지 대신 대량의 시체가 폐허를 뒤덮는다. 그는 잔해에서 시체를 파내고 묻고 태우는 작업에 동원된다. 그러고 나서야 귀국한다.

작가가 된 후로 보니것은 돈이 필요했고, 드레스덴 경험을 살리면 돈이 되리라 생각했고, 금방 소설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그는 소설을 쓰겠다고 공언한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 드레스덴 소설’을 쓰다 말다 뒤엎는 과정을 반복했다. 『제5도살장』의 플롯은 수십 번 바뀌었다. 보니것은 함께 복무했던 친구를 찾아갔을 때 비로소 실마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친구와 대화하며 기억을 되짚는 동안, 친구의 배우자는 분노를 꾹꾹 누르는 태도를 취한다. 보니것이 다른 전쟁 영화들처럼 경험을 미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틀림없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던 척할 거예요. (...) 그럼 전쟁은 그냥 멋지게 보일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또 많이 하게 될 거예요. (...) 어린아이들이 나가 싸우게 되겠죠.

(『제5도살장』, 28~29쪽) 


보니것은 진지한 태도로 그녀에게 약속한다. 절대로 전쟁을 멋지게 쓰지 않겠노라고. 소설을 완성하면 ‘소년 십자군’이라는 제목을 붙이겠다고. 소년 십자군은 마을의 부랑아나 말썽쟁이를 모은 부대였다. 군인으로 길을 나선 그들은 도착 지점에서 노예로 팔렸다. 신성한 전쟁을 수행한다는 십자군의 명분은 거짓말이었다. 『제5도살장』의 전체 제목은 ‘제5도살장 혹은 소년 십자군 - 죽음과 억지로 춘 춤’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빌리 필그림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가느다란, 전쟁 영웅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몰골로 등장한다. 그는 절대로 비장하거나 엄숙하거나 감상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 빌리의 관점에서 전쟁은 어떻게도 포장되지 않는다. 사악한 범죄로 심판대에 오르지도 않는다. 전쟁은 고통스럽지만 어쨌거나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빌리는 그에 대해 비난도 변호도 하지 않는다. “다 괜찮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같은 책, 246쪽)

전쟁 외에도 두 가지 사건이 빌리의 삶을 어그러뜨린다. 빌리는 1944년, 참전 중에 갑자기 시간에서 풀려난다. 그의 의식은 시간의 순서에 매이지 않고 무작위로 이동한다. 마치 경련을 일으키듯 젊은이에서 어린아이로, 노망이 든 홀아비 상태에서 결혼식 날로, 몇 년에서 몇십 년씩 널을 뛴다. 이동은 빌리의 의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는 어느 위치에 있을지 선택할 수 없다. 예측할 수도 없다. 눈을 뜨면 어느새 상대방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빌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빌리는 얼떨떨한 채로 재빨리 맥락에 맞춰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그는 항상 무대 공포증 같은 기분을 느낀다. 당연히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상황에 몰입하지 못한다. 죽음이, 혹은 삶이 그를 억지로 붙들 때면 빌리는 중얼거린다. ‘날 좀 내버려 둬.’ 

과거의 경험에 돌연히 빠져드는 상태는 PTSD와 유사하다. PTSD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빌리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를 다시 경험한다. 비록 보니것이 소설을 쓸 때는 PTSD라는 용어가 없었지만, 전쟁에서 돌아와 ‘미친’ 사람들은 계속 존재했다. 그들의 공포와 고통은 비합리적이다. 현재엔 존재하지 않는 사건으로 괴로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의 원인은 과거에 속하고, 사람이 정말로 과거를 다시 겪을 수는 없다. 시간여행은 SF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제5도살장』은 SF를 동원한다. 빌리는 작중 킬고어 트라우트라는, 지독히도 안 팔리는 작가가 쓴 SF 소설에 빠져든다. SF는 우주의 법칙을 다시 만든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예를 들어 트라우트가 쓴 「4차원의 미치광이들」은 “병의 원인이 모두 4차원에 있기 때문에 정신병을 치료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같은 책, 135쪽)다. 3차원에 사는 지구인이 병의 원인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인간의 능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실, 애초에 그럴듯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를 이어주는 인과관계는 없다. 사건은 그저 임의로 짝지어진다. 세상은 본래 부조리하게 굴러간다. 빌리는 트랄팔마도어에 사는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동물원에 전시된다. 납치되는 지구인이 하필이면 빌리여야 할 이유는 없다. ‘왜’를 묻는 빌리에게 트랄팔마도어인들은 설명을 찾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알려준다. 인간과 달리 그들은 모든 시간을 한눈에 본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도록 정해져 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리 알려줄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있는 거죠. 그걸 한순간 한순간씩 떼어놓고 보면, 우리 모두가,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호박 속에 갇힌 벌레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같은 책, 112쪽) 외계인들은 누가 죽더라도 ‘뭐 그런 거지(so it goes)’라는 태도를 취한다. 모든 이가 어차피 일어날 사건에 둘러싸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니 개중 좋은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다.

트랄팔마도어의 철학은 사람을 죽이는 최악의 방법과 일맥상통한다. 전쟁에서 패잔병으로 만난 롤랜드 위어리는 빌리에게 잔인한 이야기를 하염없이 주절거린다. 그가 생각하기에 최악의 살해법은 사람을 사막의 개미집 위에 묶는 것이다. 그의 몸에 꿀을 바르고, 눈을 감지 못하도록 눈꺼풀을 자른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대로 당한다. 휘말리고 흔들리며 거대한 무력감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어 있다. 그가 할 만한 일이라곤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나마 좋았던 순간을 생각하는 것이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제5도살장』에는 ‘뭐 그런 거지’가 106번 나온다. 죽음이라는 말이 106번 나오는 셈이다. 그렇게 많은 죽음 가운데, 하필이면 별로 살고 싶지도 않았던 빌리가 살아남는다. 가축을 죽이는 장소인 도살장이 도리어 안전한 피난처가 된다. 도살장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예측할 수도, 방지할 수도 없는 부조리한 결과다. 커트 보니것은 한입에 삼키기 어려운 불편한 이야기를 제시한다. 우리 삶에는 아름다운 부분이 들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최악일 수 있다. 등장인물인 킬고어 트라우트는 작가인 보니것을 인터뷰하는 글에서(물론 실제로는 보니것이 직접 썼겠지만) 감상을 적는다. “보니것은 내게 살 가치가 없는 삶을 주었지만, 살고자 하는 강철 같은 의지도 주었다. 이는 지구상에서 흔한 조합이었다.”

빌리 필그림의 묘비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어떤 것도 아프지 않았다”(같은 책, 157쪽)라는 말이 새겨진다. 너무나 천국 같고,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묘사다. 하지만 어느 한순간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빌리에게 햇빛이 내리쬐던 순간처럼 모든 것이 평안한 시간을 포착할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최악이라도 분명히 아름다운 한 부분이 들어 있다. 어리석게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는,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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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심완선

SF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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