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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인연(因緣)책’이 있는가?
곽아람, 공부의 위로 1화
‘인생책’을 묻는 질문엔 도저히 한 권을 꼽지 못하겠지만, ‘인연책’을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한 권을 콕 집어 말할 수 있다. (2022.01.13)
‘인생(人生)책’뿐 아니라 ‘인연(因緣)책’이라는 것도 있다. 사람과 사람이 연을 맺듯, 인연이 닿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내 인생의 행로에 등장하는 책. ‘인생책’을 묻는 질문엔 도저히 한 권을 꼽지 못하겠지만, ‘인연책’을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한 권을 콕 집어 말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영국서 활동한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1909~2001)의 『서양미술사』다.
우리말 제목은 “서양 미술사”이지만 원제는 ‘History of Art’(미술사)가 아니라 ‘The Story of Art’(미술 이야기)다. 곰브리치는 자신의 책에 거창하게 ‘역사’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는 책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이 책은 아직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다.”
나는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읽었다. 하룻밤 만에, 대학생이 되기 이전에, 어느 겨울날에.
1998년 12월이었는지 1999년 1월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고, 나는 대학 입시를 치르러 서울에 올라왔다. 입시생들에게 방을 내어주던 신촌의 한 대학 기숙사에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내게 방을 비워 주고 집에 내려간 학생의 책장이 눈에 띄었다. 무슨 책이 있나 훑어보다가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를 발견했다. 그 대학엔 미술사학과가 없으므로, 아마도 그 방의 주인이 서양미술사 교양 강의를 수강했던 것이었겠지만 그때는 그 책이 왜 거기에 꽂혀있는지를 몰랐다. 곰브리치가 누구인지도, 『서양 미술사』가 무슨 책인지도 몰랐지만, 마음속으로 그 책의 주인에게 ‘언니, 저 잠시만 볼게요.’ 양해를 구하고 일단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림 보는 걸 좋아했고, 며칠 후에 다른 대학 미술사 관련 학과 시험이 있기도 하니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았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유명한 첫 문장이 중후장대하게 머릿속을 울려 왔다. 읽기 쉬운 책이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저자의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내가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었다. 문장이 매끄러웠던가? 번역서라 그렇겠지만 술술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읽었다. 그림 보는 재미로 훑어보며 넘겼다. 활자로 된 것이라면 뭐든 먹어치우듯 읽던 시절이었고,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한참 책을 읽고 있는데 책장(冊張) 속에서 환한 빛이 비쳐왔다. 그건 분명히 빛이었다. 낯선 기숙사 방의 어둠을 뚫고 따스하게 흩뿌려지는 빛. 이내 깨달았다. ‘이 그림은, 정말 환하고 따뜻하구나.’ 곱은 손을 호호 불며, 따스한 불빛 새어나오는 남의 집 창문을 들여다보던 성냥팔이 소녀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나는 한참을 그 그림을 보고 있었다. 16세기 북부 이탈리아의 파르마에서 활동한 화가 코레조(Correggio, 1489-1534)가 1530년경에 그린 <거룩한 밤>이었다. 곰브리치는 그 그림을 이렇게 묘사했다.
천사들은 기분 좋게 구름을 타고 다니며 긴 지팡이를 든 목동이 급히 들어오는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목동은 허물어진 마구간의 어둠 속에서 기적을 본다.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사방에 빛을 발하고 있으며 행복한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다.
_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서
책이 아니라 구유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아기 예수가 방금 이 땅에 오셨다! 성스러운 존재가 발하는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춥고 어두운 마구간이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의 별처럼 밝아졌다. 벅찬 기쁨의 빛. 입시 공부에 찌들려 몇 년간 즐길 새 없었던 성탄(聖誕)을 오래간만에 떠올렸다. 삭막한 기숙사 방 천장에 그 순간만은 노랗고 작은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림이 준 위로 덕에 마음이 한층 밝아졌다. 나는 힘차게 책장을 넘겼다.
며칠 후 다른 대학의 면접장. 면접 준비하면서 무슨 책을 읽었냐고 깐깐한 인상의 젊은 교수가 물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었습니다.” 며칠 전에 느닷없이 내 인생에 등장해 읽게 된 책이 생각나 나는 답했다. “아, 그래?” 면접관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썩 괜찮은 답변이었다.
보수적인 대학 사회는 미술 에세이 같은 이른바 ‘대중서’에 후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곰브리치라면 괜찮다. 고등학생 혹은 재수생이 ‘히스토리 오브 아트’를 읽었다 했다면 과해 보이겠지만,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라면 입시 준비를 위해 읽을 법도 하게 보인다. 실제로 곰브리치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우선해서 염두에 둔 독자는 자신들의 힘으로 이제 막 미술 세계를 발견한 10대의 젊은 독자들”이라 밝힌다.
나는 난생 처음 들어본 그 이름, 곰브리치 덕에 무난히 그 대학에 합격해 미술사 전공자가 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내가 우연히 읽었던 그 책이 미술사학도의 필독서라는 걸 알고는 놀라며 생각했다. 그 책과 나와의 만남은 어떤 운명의 실로 엮여 있는 것일까?
대학 시절 서양미술사 관련 전공 과목을 세 개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한 과목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이었다. 황제들을 새긴 조각이나 고딕 성당 벽의 부조, 중세 기도서와 태피스트리 등은 도무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반 고흐나 고갱, 르느와르 같은 인상파 미술을 좋아했지만 나는 열광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니 어쩐지 너무 흔해 보였다. 나의 관심은 그보다 조금 전의 시대, 종교화가 좀 더 왕성했던 시대, 그렇지만 중세의 암흑기와는 달리 신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는 시대에 향해 있었다.
나는 프라 필리포 리피의 얇은 종잇장처럼 아련하게 선 고운 여인을 사랑했고, 라파엘로의 손끝에서 피어난 성모의 부드러운 미소를 아꼈으며, 눈꺼풀 움푹 꺼진 눈으로 아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보티첼리 그림 속 여신(女神)들에게 신비감을 느꼈다. 그림을 보고 도상을 읽어내는 걸 좋아했는데, 그러기엔 종교화가 제격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부터 카라바지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화(聖畵)를 보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항상 코레조의 <거룩한 밤>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그 그림에 대해 배웠던가? 필기를 뒤져보니 그렇지 않다. 곰브리치는 그의 책에서 코레조에 대해 두 페이지를 할애했지만, 사실 코레조는 서양미술사에서 크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는 아니다. 수업에서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다룬 날에는 베네치아의 거장 티치아노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우기만도 바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곰브리치를 집어들어 책장을 넘기던 그날, 코레조의 빛은 이미 고스란히 내 것이 되었으니까.
첫눈에는 이와 같은 배치가 기교가 없으며 우연한 것같이 보일 것이다. 왼쪽의 복잡한 장면에 대응하는 군상(群像)들이 오른쪽에는 없으므로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빛을 던져 강조함으로써 전체 그림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코레조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보다 더욱 잘 활용하였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장면으로 목동과 함께 달려가 「요한의 복음서」가 전하는 어둠 속을 비추는 ‘빛’의 기적을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_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서
크리스마스 이브, 열두 시 정각,
우리가 난롯가 잉걸불 곁에 옹기종기 모여 쉬고 있을 때,
나이 많은 누군가 말해 주었지.
“이제 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있단다.”
‘영시의 이해’ 수업 시간에 축사의 소들이 구유의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는 성탄의 기적을 노래한 토마스 하디의 시 「소들(The Oxen)」을 배웠을 때, 나는 그 시와 코레조의 그림이 꼭 맞는 짝이라 생각했다. 서양미술사 수업은 내게 여러 이미지를 기억하도록 했지만, 그 어떤 이미지도 <거룩한 밤>만큼 깊숙한 곳에 자리 잡진 못했다. 생각만 하면 미소를 머금게 되는, 그 어떤 엄혹한 추위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따스한 기운을 뿜어내는 이미지.
많은 중세 건축물 못지 않게 기념비적인 중세 조각들도 처음에는 채색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조각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 마찬가지로 중세 작품의 외양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도 당연히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끊임 없이 수정을 요하는 것이 과거를 공부하는 가슴 설레는 기쁨 중의 하나가 아닐까? _곰브리치, 『서양 미술사』에서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는 이렇게 끝난다.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우리는 보통 그리스 조각을 흰색으로 생각하지만, 원래는 채색이 되어 있었던 것이 시간이 흘러 색이 벗겨진 것을 본디 흰색이었다고 착각해 ‘그리스 조각=흰색’이라는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눈에 돌기둥과 다름없어 보이는 회색의 중세 조각품도, 예전에는 채색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 이해력이 예전에 비해 얼마나 도약했는지를 체감하는 이런 순간마다, 거의 모든 단어가 낯설어 더듬더듬 책을 넘겨보던 스무 살 짜리의 나를 막힘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사십 대로 키워낸 대학 교육의 힘이 놀랍다.
별빛을 따라 무작정 걸어 아기 예수가 탄생한 구유로 인도된 동방박사처럼, 나 역시 코레조의 빛에 이끌려 무작정 책장을 넘기다 진리를 빛으로 여기는 대학이라는 ‘마구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마구간에서 뻗어 나온 길은 결코 곧고 평탄하지 않았다. 장애물과 막다른 골목, 시행착오 투성이였다. 힘들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재미도 보람도 그래서 생겼다.
대학 1학년 때 구입한 예경출판사의 초판본 『서양 미술사』는 나달나달해져 책등을 고정시킨 아교풀이 다 떨어져 나갔다. 검정 바탕에 만테냐의 <성모와 아기 예수>가 그려져 있던 표지도 개정판이 나오면서 타이포 위주의 모던한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낡아버린 책을 볼 때마다 코레조의 빛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도, 그 책을 들고 대학 캠퍼스를 누비던 시절도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이렇게 끊임 없이 수정을 요하는 것이 과거를 공부하는 가슴 설레는 기쁨 중 하나가 아니겠느냐.”는 곰브리치의 말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예술가들이 자신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보고 느끼는 그러한 해방감과 승리감을 우리가 같이 느낄 수 없다면, 그 작품을 이해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방향에서의 득이나 진보가 다른 방향에서는 손실을 수반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 주관적인 진보가 그 자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예술적 가치의 증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_곰브리치, 『서양 미술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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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곰브리치> 저/<백승길>,<이종승> 공역47,700원(1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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