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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흥의 카피라이터와 문장] 어른의 일
<월간 채널예스> 2021년 8월호
광고 만드는 일이 아이디어를 내는 것 즉, 발상이 일의 핵심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판단이 일의 전부다. (2021.08.04)
무솔리니는 최후에 애인인 클라라와 함께 총살을 당하고, 시체는 광장에 공개되었대. 군중이 그 시체를 향해 침을 뱉고 매질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시체를 거꾸로 매달게 되었는데, 클라라의 치마가 뒤집혔지. 군중들은 굉장히 즐거워했대. 죽여준다, 속옷이 훤히 다 보인다 하며 흥분했겠지. 어느 시대건 그러기 마련이지. 남자들이란. 아니, 여자들도 그랬겠지.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치마를 올려주고 자신의 허리띠로 묶어서 뒤집히지 않도록 해줬대. 무섭지 않았을까? 네놈은 저 여자를 편드는 거냐, 하며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른다 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미츠요 씨는 소중한 물건에 숨을 불어넣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사실 나는 늘 최소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이사카 고타로 『마왕』 286-287쪽
“가자!”가 일요일 새벽의 알람이었다. 목욕탕에 가자는 아버지의 그 호출에는 꿀맛 같은 늦잠을 자고 싶은 어린 마음에도 거역하고 싶지 않은 뭔가가 있었다. 빨간 얼굴이 되어서 먹었던 하얀 계란이 물론 맛있는 유혹이기는 했으나, 나는 쓸데없이 조숙한 아이였다. 중학생 때까지 계속 되었던 아버지와의 그 목욕탕 나들이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순간은 매표소 앞이었다.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은 남탕, 오른쪽은 여탕을 가리키는 단호한 화살표가 있었는데, 그 결정적 갈림길의 정중앙에 난 작은 창이 매표소였다. 아버지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어른 하나 국민학생 하나요, 라고 말씀하셨다. 가격표에는 분명 대인 얼마 소인 얼마 식으로 써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당신 스스로를 어른이라 칭하고 계셨다. 어린 나는 그게 참 좋았다. 어른이라는 말이.
몇 살부터가 어른이고 몇 살까지가 어린 걸까? 민법상 성년은 19세부터이고 영화와 게임 관련 성년은 18세부터이며 형법상 미성년은 14세 미만을 말하는데 이 기준도 나라에 따라 또 달라서 우즈베키스탄에선 16세, 이집트에선 21세, 스코틀랜드는 16세, 북한은 17세부터 성인이라고 한다. 근데 성인 말고 어른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70 노인이 노인정 가지 않는 이유를 다들 아시지 않는가. 막내라서 커피 심부름 하는 게 싫어서,라는. 우리 사회에서 어리다는 건 나이가 나보다 어리면 아직 애, 나보다 위면 어른이라는 얘기. 나이 한 살 차이에도 그렇게 엄격하게 따지는 사회에서, 정작 어른다운 어른을 찾기 어려운 건 씁쓸한 일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들이 어린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였을까? 가죽 점퍼에 선글라스를 쓰고 틱톡 영상을 올리거나, 롤린 댄스를 추거나, 평생 안 하던 SNS를 시작하거나. 공통점은 하나같이 못 봐주겠다는 것. 누가 옆에서 저런 조언을 하는지 아니면 제대로 된 조언자가 없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에 물어봐도 좋은 반응은 찾기 힘들었다. 왜 그럴까? 어린 사람들을 흉내 낸다고 어린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조용필이 BTS를 존중한다고 해서 BTS 흉내나 내서야 되겠는가. 어른으로서 해야 할 행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 그게 어른이 할 일이다. 설령 그로 인해 어린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해도.
김상현이라는 정치인이 있었다.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 신문에 실렸던 추모 기사의 한 부분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배신이란 단어를 유독 싫어했다고 한다. 자기 신세를 졌던 사람이 뒤통수를 친 일이 생겼을 때 누가 와서 저 사람이 당신을 배신했다고 하면 그런 말 하지 마라, 내가 부족해서 나를 떠난 거니 배신한 사람은 오히려 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거짓말일 수도 있다. 위선일 수도 있다. 그도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서운하고 속상했겠는가.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거짓이든 위선이든 아니 연기라 한들, 배신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이를 악 물고서라도 남 탓하지 않고 오직 나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 그게 어른이 할 일이다.
US 오픈에서 욘 람이 우승했다. 그는 경기가 잘 안 풀리면 욕을 하거나 골프채를 집어던지는 등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 하는 선수였다고 한다. 아들이 태어났고 어느 날인가 캐디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아들 케파에게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은가, 에 대해서. 심리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그는 말했다. 아버지가 되고 맞은 첫 번째 아버지의 날에 US오픈 챔피언이 된 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욘 람은 아들의 눈에 비칠 아버지로서의 자기를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가 메타인지라고 부르는 자기 인식과 비슷한 것이리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자기 자신의 언행을 성찰하는 것, 그게 어른이 할 일이다.
드라마 전원일기에 나왔던 김혜정이라는 여배우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제 등뼈에 기대요.” 나는 그 생각과 표현에 깜짝 놀랐었다. 굳이 여배우라고 소개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 같은 남자들이 더 집단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는 걸 떠올려 보고자 해서다. 고등학교 동문이다, 같은 고향 출신이다, 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하는 집단의 아이덴티티를 개별적인 자기 정체성보다 앞세워 쉽게 휩쓸리는 걸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왕』 에 나오는 저 바람과 비슷한 마음이리라. 광장에서 뒤집힌 채 조롱받는 여인의 치마를 묵묵히 바로잡아 주는 사람, 적어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사는 사람, 나도 미츠요 씨처럼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휩쓸리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하는 것, 그게 어른이 할 일이다.
광고 만드는 일이 아이디어를 내는 것 즉, 발상이 일의 핵심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판단이 일의 전부다. 제품의 장점을 중요하게 볼 것인가, 타겟의 라이프 스타일을 중요하게 볼 것인가 판단하고 아이디어 회의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판단하고, 감독이 할 일인가 제작팀이 할 일인가 판단하고, 편집실과 녹음실은 어디로 할 것인가 판단하고, 두 번째 컷을 뺄 것인가 말 것인가 판단하고, 마지막 부분에 카피 한 마디를 넣을지 말지 판단하고, 음악을 이걸로 할지 저걸로 할지 아니면 다른 음악을 더 찾을지 판단하고, 프리젠테이션을 누가 할지 설명의 첫 시작을 결론부터 할지 흥미로운 트렌드로부터 시작할지 판단하는, 판단의 연속이 일이다.
유능한 광고인이란 그 판단이 명쾌하고 빠르고 설득력이 높다는 말이 된다. 더 나은 광고인으로 성장한다는 건 그 판단이 점점 좋아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판단해야 할 것을 판단하지 않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플래너가 전략을 판단하지 않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아이디어의 우열을 판단하지 않고, 카피라이터가 카피의 판단을 광고주에게 맡긴다. 아마도 스스로는 그것을 유연한 태도로 여기는 것 같다. 아니다. 도망치는 것이다. 일의 모든 판단에는 리스크가 있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 그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직급 높은 리더만 어른인 건 아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우리는 모두 자기 일의 리더다. 어른답게 일해야 한다. 자기가 맡은 일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건 어른이 할 일이 아니다. 당장은 이해받지 못하지만 꼭 필요한 쓴소리와 악역조차 결코 마다하지 않는 것, 그게 어른이 할 일이다.
프레젠테이션 전에 떨리지 않냐고,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에서 프레젠터를 맡은 후배가 내게 물었다. 단 한번도 떨어본 적 없다고 말했다. 이건 웅변대회가 아니지 않냐, 누가 더 말 잘하는가 겨루는 오디션이 아니지 않냐, 함께 준비한 걸 내가 다만 전달할 뿐이라는 일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냐, 그렇다면 긴장하거나 떨린다는 건 난센스라고도 말했다. 후배에게 어떻게든 힘을 주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쟁이가 되기도 하는 것, 그게 어른이 할 일이라고 그 순간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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