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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프로 거짓말쟁이의 걱정
<월간 채널예스> 2021년 4월호
그렇다고 아내에게 정색할 수는 없다. 소설이 거짓말인 건 사실이니까. 나는 소설이 그럴싸한 허구 이상이라고 믿지만, 다른 무언가가 되기 전에 소설은 먼저 그럴듯한 허구가 되어야 한다. (2021.04.01)
“자기는 정말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야. 그게 자기의 최대 강점이야. 앞으로도 하루에 10개씩 거짓말을 지어내도록 해.”
며칠 전 정말로 아내에게 들은 얘기다. 부부싸움 중에 비꼬는 말투로 던진 비난이 아니다. 원고가 안 풀려 고생하는 나를 위로하면서 해준 격려의 말이었다. ‘당신,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야’라는 의미로.
정작 내가 그 말을 들으며 감격하지는 않았고, 솔직히 말하면 약간 떨떠름했다. 글쎄, 내심 자신을 지능적인 플레이어라고 자부하는 축구선수가 “자기는 참 발재간이 좋아”라는 말을 듣거나 추상화가가 “당신은 정말 붓질을 잘해”라는 찬사를 받으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내에게 정색할 수는 없다. 소설이 거짓말인 건 사실이니까. 나는 소설이 그럴싸한 허구 이상이라고 믿지만, 다른 무언가가 되기 전에 소설은 먼저 그럴듯한 허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가한테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잘한다’는 평가는 조금 엇나간 칭찬인지는 몰라도 비난은 아닐 테다.
여기서 ‘그럴싸함’이라는 요소가 핵심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개소리에 대하여』에서 철학자 해리 G. 프랭크퍼트는 거짓말과 개소리를 구분한다. 거짓말을 잘하려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거짓말쟁이는 진실에 관심이 있으며 나름의 방법으로 그 진실을 존중하지만 개소리쟁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개소리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나는 그런 관점을 소설 쓰기에도 적용해본다. 진실을 존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쓰면, 정성스러운 거짓말이어야 할 소설이 그저 개소리가 되어버린다고. 그리고 소설에서 진실을 존중하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가 사실성, 혹은 개연성/핍진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실제 작업 현장에서 나는 사실성이나 개연성, 핍진성을 어떻게 추구하는지에 따라 소설들을 이렇게 분류한다.
① 사실성을 추구하는 소설: 이런 소설에는 현실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해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혹은 우리의 앞 세대가 겪을 수도 있었던) 사건에 휘말린다. 리얼리즘 소설, 역사 소설들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고증이 중요하지만, 고증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상황에 놓인 인간이나 배경 세계의 작동 방식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깊지 않으면 독자들은 설득되지 않는다.
② 사실성은 없을지라도 개연성과 핍진성을 추구하는 소설: 잘 쓴 SF나 정교한 판타지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소설에서 묘사하는 종류의 사건은 아마 우리 세계에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도 독자도 그걸 안다. 그러나 그 세계는 비록 상상의 산물이더라도 나름의 규칙이 있으며, 그런 규칙 속에서 사건들은 그런 식으로 벌어질 것 같다. 고증은 무의미하지만 인물과 사건을 움직이는 내적인 논리는 탄탄해야 한다.
③ 사실성, 개연성, 핍진성을 추구하지 않는 소설: 고증이나 내적인 규칙은 큰 의미가 없다. 우발적이거나 비현실적,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이 예고 없이 벌어진다. 이런 작품을 쓰면서 작가들은 설득력을 어느 정도 포기하는 대신 언어나 인물을 보다 깊이 탐구하거나 특정한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또는 소설 전체를 현실에 대한 비유처럼 활용할 수도 있다. 뛰어난 작가는 이런 소설에서도 박진감을 자아낸다.
①, ②, ③ 사이에 우열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테리 이글턴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에서 ‘핍진성이란 문학적 가치를 판가름하는 데 있어서 터무니없이 부적합한 척도’라고 주장하는데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시시한 리얼리즘 소설이 있고 빼어난 SF가 있으며 압도적인 환상 문학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①, ②, ③에 해당하는 소설들을 다 시도하고 있고, 그 작업들은 모두 각각의 이유로 매력적이다.
한편 이글턴은 같은 책에서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문학 작품에 특별한 장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도 썼는데 나는 이 말에는 매우 반대한다.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문학 작품에는 바로 사실성이라는 특별한 장점이 생긴다. 사실성은 강력한 실감과 몰입감, 설득력을 주고, 독자가 현실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물론 ②, ③의 작품들도 나름의 고유한 장점들을 가진다. 그러나 사실성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하고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일인지 잘 알기에 나는 ①번 계열의 작품을 쓰는 작가들을 각별히 존경한다. 기본적으로 애정을 품고 있다. 게다가 지금 한국에 그런 소설가들이 특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앞부분은 ①이나 ②인데 결말이 ③인 경우다. 한때 이런 글이 많았다. 한국 현실을 꼼꼼히 검토할 것처럼, 혹은 거대하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처럼 시작해놓고는 주인공이 술 처먹고 기이한 환상을 겪고 토하는 걸로 마무리하는. 거기에 탈근대니 해체니 운운하는 해설이 붙어 있기도 했다. 음…… 개소리 같은데. 그냥 작가의 욕심을 역량이 받쳐주지 못한 거 아닌가.
②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어차피 현실이 아니니까’라는 태도로 규칙을 아예 정하지 않거나 초반에 정한 규칙들을 뒤에서 무너뜨리는 것도 탐탁지 않다. 독자로서 나는 이들 장르에 꽤 깐깐한 배경 논리를 요구하는 편이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과거의 나와 소통할 수 있는 휴대폰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식의 설정을 잘 견디지 못한다. 너무 편협한가.
과학이 발달한 미래에서 우주 최강자들이 강력한 힘을 지닌 오색보석을 둘러싸고 다툴 때에도, 그들이 이종격투기로 싸운다면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여긴다. 미국 대통령과 중국 주석이 석유를 확보하려고 권투를 벌이는 것만큼이나 기이한 상황 아닌가?
소설을 쓸 때에도 그런 자세다. 나처럼 강퍅한 독자가 책장을 넘기다 ‘말도 안 된다’며 콧방귀를 뀔까봐, 읽던 책을 내려놓을까봐 신경이 쓰인다. 첫 문장을 쓰기도 전에 이미 그 글의 성격이 ①~③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를 정하고, 마지막 문장까지 그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다.
원래도 소설을 쓰려고 거짓말을 지어낼 때 그게 그럴싸한지를 오래 따지는 편이었다. 이 과정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스트레스도 제법 받는데, 얼마나 유용한 습관인지 모르겠다. 대개의 독자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관대한 것 같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다소 억지스러운 전개나 설정,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도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 버릇이 더 심해져 요즘은 거의 강박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원고를 쓰다가 혼자 ‘이건 아니다’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울산에 내려간 주인공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우동 한 그릇을 먹는 대목을 쓰면서 울산고속버스터미널에 분식점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보는 스스로를 자각했던 것이다. 그 정도는 그냥 지어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현실 세계는 소설만큼 그리 개연성 있게 굴러가지 않는다. 요즘은 세계 전체가 ‘예측하기 어렵다’의 수준을 넘어, 숫제 맥락들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프랭크퍼트는 개소리가 넘치는 게 우리 문화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데, 그와도 상관있지 않을까. 개소리쟁이들이 움직이는 세상이라니, 프로 거짓말쟁이로서 참으로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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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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