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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소설가의 에고서핑
<월간 채널예스> 2020년 2월호
지금으로서는 몇 가지 타산지석 사례만 알 뿐이다. 나는 라흐마니노프나 비비안 리가 빠졌던 함정을 피해가고 싶다. 자신에 대한 비난 글을 모아 놓고 공개 반박할 기회를 벼른다는 파울로 코엘료처럼 굴고 싶지도 않다. 에고서핑을 하는 횟수를 줄이고, 나 자신을 더 믿으려 하고 있다. (2021.02.01)
“작가님은 인터넷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하세요? 서평을 찾아 읽으세요?”
가끔 받는 질문이다. 단순한 흥밋거리용 질문은 아닌 듯 보일 때도 있다. 주저하는 얼굴에 ‘내가 어떤 소설에 대해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면 그게 작가에게 전달이 될까’ 하는 궁금함과 간절함이 비칠 때도 있다.
내 경우에는, 검색한다. 서평도 찾아 읽는다. 딱히 일정을 정해서 계획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주로 술을 마시고 해치운다. 어차피 내 책에 대한 서평이 엄청나게 많이 올라오는 것도 아니니까, 일주일에 한두 시간이면 다 찾아 읽을 수 있다. 그러다가 ‘작가님은 이 글 못 읽으시겠지만’이라는 문구를 보고 미소를 짓기도 한다.
다른 소설가들은 어떨까나. 다들 나 정도로는 에고서핑(인터넷으로 자신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는 행위)을 하는 것 같다. 몇몇 또래 작가들과 술을 마실 때 한 신랄한 서평 블로거가 화제에 오른 일이 있었는데, 같은 테이블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그의 블로그를 알고 있었다. 아침마다 온갖 검색어를 동원해 자신을 우회적으로 거론하는 트윗이나 게시물까지 다 찾아보려 애쓴다는 젊은 소설가도 한 사람 안다.
첫 단행본을 출간했을 때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모든 검색엔진과 모든 게시판에서 내 이름을 검색했다. 모든 인터넷 서점의 판매지수를 매일 확인하고 모든 서평을 다 읽었다. 간혹 내 책에 대해 이례적으로 좋거나 나쁜 평가를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쓴 다른 서평도 다 찾아 읽었다. 내게만 그런 특별한 평을 남긴 건지 확인하려고.
그러다 에고서핑 횟수를 지금 수준으로 줄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시간이 아까웠고, 내가 점점 더 병적으로 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들의 평가를 확인하는 일에는 중독성이 있다. 심한 날에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제 이름을 검색하게 된다. 전에 읽었던 서평을 보고 또 보고……. 그러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고서핑을 할 때마다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도 싫었다. 정확하고 깊이 있는 비평, 애정 어린 서평을 읽고 감사한 때도 많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싶게 터무니없는, 때로는 악랄하게 느껴지는 글도 있다. 책을 읽지 않고 그저 작가를 조롱하기 위해 트윗이나 포스트를 올리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에는 끔찍한 인터넷 게시물도 하나 읽었다. 제목이 ‘작가 멘탈 터뜨리는 게 취미’인가 그랬다. 연재 중인 웹소설에 여러 계정으로 다양한 댓글을 올리다가 점점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작품에 우호적인 평가를 하던 계정이 항복하고 달아나는 상황을 연출하는 게 취미라는 고백이었다. 오로지 괴로워하는 작가 모습을 보기 위해서. 이 무슨 『댓글부대』 같은 상황인가.)
그런데 나쁜 평가는 좋은 평가와 1대 1로 상쇄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생겨먹었다. 인간이 그렇게 진화했다. 내게 우호적인 사람들보다 나를 공격하려는 사람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안전에 훨씬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인간은 부정적인 신호를 긍정 신호보다 더 크게 받아들이며, 비판을 극복하는 데에는 대략 그 네 배의 칭찬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마도 그 비율에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비율이 남보다 현저히 높은 것 같다. 그래서 에고서핑을 하고 나면 늘 뒷맛이 쓰다. 또 누가 지켜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왠지 부끄럽다. 자기 평판을 필사적으로 확인하고 남들의 평가에 목을 매는 것은 아무래도 성숙한 인격이 몰두할 만한 일은 아니니까(그래, 알면서도 그런다).
한편으로는 그 역시 진화에서 비롯된 본능적인 욕구이기는 하다. 특히나 예술을 한다는 인간들은 자의식까지 비대하다. 자기 작품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무관심한 예술가가 있다면 거짓말이다. 판매량에는 무심할 수 있어도 다들 비평에는 예민하다. 인터넷이 없던 과거에도 그랬다. 필명으로 책을 낸 사람도 초연할 수 없다.
가명으로 『제인 에어』를 발표한 샬럿 브론테는 초판에는 쓰지 않았던 작가 서문을 재판과 3판에는 썼다. 재판 서문에는 ‘흠잡기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길게 나온다. 3판 서문에는 당시 영국 문학계가 쑥덕거렸던 사안―『제인 에어』의 작가가 『폭풍의 언덕』도 쓴 것 아니냐―에 대한 반박이 적혀 있다.
인터넷이 없던 과거에도 혹평으로 괴로워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 평가가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납득이 안 가는 것일 때조차. 문학만의 일이 아니다.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에 악평이 쏟아지자 지독한 우울증에 빠져 몇 년간 곡을 만들지 못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받은 비비안 리는 평론가들의 비평에 너무 집착했고, 조울증이 점점 심해졌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가 되었다. 이제 타인의 평가를 확인하는 일은 너무나도 쉽고, 그런 평가의 양이나 직설적인 정도는 인터넷 이전과 비교가 안 된다. 표현을 고치고 질문 대상을 바꾼다면, 어쩌면 이 글 앞머리의 질문은 이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야 하나? 거기에 얼마나 신경 써야 하나?’
나는 헷갈린다. 작가는 동시대 독자들의 반응을 살피고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동시에 대중의 평가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지침이 아니라는 의견도 옳게 들린다. 좋은 작품을 쓰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게 좋은 작품임을 내가 혼자서 알아차린다. 동시에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도 악평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리고 스스로에 대해 의심이 생긴다.
지금으로서는 몇 가지 타산지석 사례만 알 뿐이다. 나는 라흐마니노프나 비비안 리가 빠졌던 함정을 피해가고 싶다. 자신에 대한 비난 글을 모아 놓고 공개 반박할 기회를 벼른다는 파울로 코엘료처럼 굴고 싶지도 않다. 에고서핑을 하는 횟수를 줄이고, 나 자신을 더 믿으려 하고 있다.
유리 거울이 발명되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 생김새에 대해 얼마나 확신이 있었을까? 흔들리는 물이나 금속 거울에 비춰 보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 나는 자아상에 관한 한 우리가 여전히 고대인과 다를 바 없는 처지 아닐까 생각한다. 인터넷이 전에 없던 방식으로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기는 하지만, 정확한 거울은 분명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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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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