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뛰고, 구르고, 소리치는 소녀들
<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3화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좀 더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벌써 작년의 일이다. 막 추워지기 시작한 11월 마지막 주, 끝내주게 멋진 연극을 봤다. 친한 선배가 나와 겸사겸사 갔던 공연에 홀딱 반해 며칠을 끙끙 앓았다. 전국 댄스 대회 우승을 노리는 열네 살 소녀들(과 한 소년)의 고군분투기였는데, 이렇게 단순한 줄거리로 절대 압축될 수 없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예민한 문제들과 감정들을 솔직하고 용감무쌍하게 대면하는 실로 놀라운 작품이었다. 공연 내내 폭발하듯 뻗어나가는 배우들의 에너지에 잔뜩 취할 수 있어, 오랜만에 좋은 이야기를 만나는 황홀경에 푹 빠질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특히 극중 춤추고 싶고, 이기고 싶은 열네 살 소녀들(소년도) 한 명 한 명이 다 너무 좋았다. 모두가 너무 다른데, 또 너무 이상했고, 또 너무도 난폭했으며, 또 너무도 다정했다. 모두가 너무나 밉고, 또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실제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십대 아이들의 마음속을 굽이굽이 탐험하며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런 아이들의 마음 안에서 내 마음을 끝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렇듯 너무도 다르고 이상해서 그렇게 외롭고 아플 수밖에 없는 걸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더 깊이 연결되려고, 아니 연결될 수밖에 없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 날에도 흥분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서 응당 해야 할 것, 그러니까 소소한 덕질을 시작했다. 우선 공연 연출자와 배우들의 필모그래피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작품의 원작자와 오리지널 공연에 관련한 인터뷰들과 영상들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그러다 미국의 여러 댄스 대회들의 공연 영상들을 파고들기 시작했고(로열패밀리 댄스크루 영상들은 아예 시작하질 말았어야 했다), 또 그러다 전 세계의 탤런트쇼들에서 온갖 아크로바틱한 춤사위를 뽐내는 지구촌 사람들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무려 십여 년 만에, 영화 <브링 잇 온>을 재생하는 나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랬다. 이 영화를 지극히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살면서 가장 많이 본 영화를 뽑으라면 <시스터 액트 2>, <패컬티>와 함께 순위권을 다투는 나름의 인생 영화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영화학교에 입학하던 무렵엔 좋아하는 영화 목록에서 슬그머니 빼버렸다. 그래도 감독을 꿈꾼다며 늦은 나이에 대학원까지 왔는데, 춤 영화에 관심 있다면 그래도 <블랙 스완> 같은 걸, 십대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를 좋아한다면 아무래도 <로제타> 같은 걸 말해야 영화인답지 않을까 싶었다(두 요소를 합한 예로는 <피쉬 탱크>가 있다. 물론 다 좋아하는 영화긴 하다).
아무튼 그런 별 시답잖은 이유로, 이십대 내내 애정하던 영화를 어물쩍 지우고 떠나왔는데(그 정도면 잠수이별이지), 십여 년이 지난 아닌 밤중에(새벽 2시쯤이었나), 이렇듯 난데없이 불쑥 찾아도 되는 걸까(자니?). 나는 대체 지금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를 구차한 전 애인처럼 어색하고 경황없는 눈빛으로 우물쭈물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삼분도 채 지나지 않아, 오프닝곡에 맞춰 온몸을 흔들며 신나게 폭주하기 시작했다.
오 미키, 유아 쏘 파인
유아 쏘 파인 유 블로우 마이 마인드, 헤이 미키!
헤이, 헤이, 헤이 미키!
여전히 놀라운 영화였다. 오랜만에 보니 불편하고 거슬리는 농담들이 새롭게 눈에 띄긴 했지만, 20년 전에 나온 하이틴 영화임을 감안하고도 부드럽게 통하는 미덕들이 있었다. 치어리더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으려는 시도라든가, 비록 1등을 하지 못해도 노력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행복해지는 이야기 등은 지금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특히 주체할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밝고 건강한 에너지가 정말 좋았다. 뛰고, 구르고, 소리치는 보통의 여자애들을 이렇게 활기차고 멋지게 그린 작품이 또 얼마나 있었나 곱씹다 보니 더 강렬한 애정이 불타올랐다.
오래 전 <브링 잇 온>을 보고 또 보면서 매번 즐거울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살아있는 소녀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매번 주장 토랜스(커스틴 던스트)의 거침없는 밝음과 지치지 않는 쾌활함에 반해버렸고, 어떤 방해물이든 다 씹어 먹을 같은 미시(엘리자 더쉬쿠)의 당당함과 자신만만함에 빠져들었으며, 언제든 우아하고 꼿꼿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시스(개브리엘 유니언)의 여유와 카리스마에 기꺼이 압도당했다. 멋진 그녀들을 배우고, 닮고 싶었다. 그 안에 속하고 싶었다. 한 팀이 되고 싶었다.
치열하게 부딪히면서도 절대 서로를 놓지 않는 소녀들. 서로가 있기 때문에 더 용감하고 강력해지는, 심지어 라이벌조차 연결되어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소녀들. 그런 무시무시한 여자애들의 이야기를 어찌 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이런 멋진 영화를 십여 년이나 돌아보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단 말인가!
<브링 잇 온>이 쏘아올린 흥분과 광기는 결국 <피치 퍼펙트> 시리즈까지 정주행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되었다. 어쩌면 내겐 이런 ‘서로 다른 이상한 여자애들이 팀을 이루고 무언가 해내는’ 이야기들에 전적으로 빠져들고 마는 이상한 약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이상하고 약한 나라서 그런 이야기를 사랑하는 건지도.
선배에게 좋은 공연을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며, 손가락 끝까지 영혼을 실어 춤을 추라던 영화 속 ‘스피릿 핑거스’ 선생 사진을 보냈다. 사실 선배가 연기한 연극 속 선생은 그런 사기꾼 선생과는 전혀 다른, 오히려 춤과 아이들에 지나치게 진심인 사람이긴 했지만. 사진을 본 선배가 웃음을 빵 터뜨렸다. 그 영화를 알고 있다며 반가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래. 어쩌면 <브링 잇 온>은 나만 몰래 숨어서 좋아하는 영화는 아닐 수도 있겠어.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좀 더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를 더 많이 응원해줘야겠다. 비 어그레시브! 비 비 어그레시브!
추천기사
관련태그: 예스24, 채널예스, 윤가은 칼럼, 영화칼럼, 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브링잇온
영화 만드는 사람.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단편영화 <손님>(2011), <콩나물>(2013), 장편영화 <우리들>(2016), <우리집>(2019)을 만들었습니다.